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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기,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시 25:1-10, 대림절 1주, 2024년 12월 1일,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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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기,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시 25:1-10, 대림절 1주, 2024년 12월 1일,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
벌써 2024년 마지막 달이 됐습니다. 12월 1일이 대림절 첫째 주일이었습니다. 지금 설교 복기를 녹화하는 시간은 12월 3일 화요일 9시입니다.
주일날 서울센터 갔다가 하룻밤 자고, 동생들 만나서 오랜만에 밥도 같이 먹고, 시간 좀 보내다가 어제 밤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 테니스장 갔다가, 오후에는 또 부동전이라고, 야외 수도 얼지 않게 하는 그 장치가 고장 나서 기사를 불러다가 또 작업하고, 또 제가 텃밭 넓히는 작업 등등 하느라고 이틀 동안 꽉 채워서 다른 일을 많이 했습니다.
오늘 설교 복기 혹은 설교 톺아보기이라고도 됩니다. 그런 말도 있잖아요, 톱톱아보기... 거기 톺아예요.
하에요. 톺아죠. 순수하게 우리나라 말입니다.(샅샅이 톺아 나가면서 살피다.-표준국어대사전)
10편, 25편, 1절에서 10절, 제가 다른 때도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설교자로 산다는 게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긴장이 있고요. 일반 신자라고 했다면 성경을 읽고 공부는 할 수 있어요. 혼자서라도요.
그렇지만 설교 준비하듯 성경을 연구하기는 쉽지 않죠. 이렇게 자꾸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을 끝내지 않고, 그걸 해석하고, 또 오늘의 삶의 자리와 연결시키고, 그리고 그 텍스트의 깊이로 점점 깊이 들어가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설교자로 살면 어쩔 수 없어서라도 그걸 해야 되니까 기쁜 거죠.
만약에 설교 텍스트 설교가 아니라 그 텍스트, 성경 텍스트 깊이로 들어가는 기쁨을 모른다면, 설교자는 그것도 지루한 거죠. 작업 자체가 저는 아직까지는 성경의 세계가 저에게 늘 새롭게 다가옵니다. 시편 25편 1절에서 10절도 그래요.
끝 구절이 제목은 5절을 잡은 거고요. 나는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시편 기자의 마음이 읽혀져요. 다행스럽죠. 1절에도 내 영혼을 하나님께 들어올린다.
그렇게 표현하잖아요. 그런 시편 기자의 마음, 혹은 영혼 내면의 울림들이 저에게 전달돼서 그걸 준비해서 신자들에게 전하는 설교자로서의 삶이 기쁘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직접 설교하는 그 자리에는 사람들 별로 많지 않아요. 30, 40, 40, 30, 그리고 라이브로 한 4, 50명 접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설교 문을 읽는 사람들은 많죠.
일주일 지나면 제가 사이트에 올리면 일주일이 되면 500명, 600명, 어떤 때는 1000명 되고요. 그리고 그게 한 번 접속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많이들 접속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두 달, 세 달 지나갈수록 계속 늘어나요.
그런 현상들이 왜 일어나는지를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시골교회, 교회도 아무런 체계도 없고, 실험적인 교회에서 설교하는 사람인데, 꾸준하게 많은 분들이 제 설교문을 읽어요. 그게 왜 그럴까, 저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읽으시는 분들이 누군지도 아직까지도 저는 모르겠어요. 정기적으로 회원으로 들어와서 읽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은 분들이 더 많을 겁니다.
거기, 우리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회원 등록을 하지 않고 들어오시는 분들이요. 목회자들도 제법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교회력에 따라서 그 작성된 그 설교문을 좀 기초로 하고, 자기 설교하는 데 도움을 받으니까, 그렇게 들어오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싶은 생각이 들어요.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동영상, 여기에도 음, 몇 명쯤 들어오시나 400, 500, 아직까지는 저에게 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생각합니다. 즐겁게 제가 이 길을 가고 있어요.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편 25편 1절에서 10절을 읽으면서도 스스로 영혼의 어떤 울림, 떨림, 그런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래, 저거다! 저게 내 삶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어야 된다, 그런 생각이 말이죠. 영혼의 깊이라는 말이 있었죠. 영혼을 설명하는 데, 그것도 삶의 심연이라는 말도 나왔어요.
깊이예요, 심연이에요, 어두움이에요, 은폐된 거예요, 숨어 있는 거예요. 그게 어떤 건지를 눈치를 채야 됩니다. 제가 종종 비유를 들은 거 있지 않습니까? 씨앗, 씨앗 속에는 꽃이 있어요? 없어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숨어 있는 거예요. 그대로 있으면, 씨앗 그대로 있으면 그 안에는 아무리 그걸 실험실에서 이렇게 조작을 하더라도 꽃이 나올 수가 없어요. 때가 돼서 땅에 심어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거기서 꽃이 나와요.
그런데, 꽃이 없던 게 나오거든요. 숨어 있는 거란 말이에요. 은폐예요.
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는 것도 다 예정돼 있던 건 아니에요. 그냥 숨어 있어요.
그래서 누구를 만나, 좋은 인연도 있고 나쁜 인연도 있는데, 사실 나쁜 인연이라고 하는 건 없죠. 어떤 사람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게 다 도움이 되니까요. 좀 불편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인생이 있구나,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구나, 그걸 우리가 깨달을 수 있잖아요.
좋은 사람을 만나면 더 좋은 거고요. 근데 그게 다 정해져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거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정말 우여곡절 우여곡절을 거쳐서 어느 시점에 가서 만나잖아요. 뭐, 많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친구도 그렇고, 연인도 그렇고, 스승 제자도 그렇고, 교회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물리, 생물, 뭐 이런 것을 비롯하여 인간의 삶 전체가 은폐성과 같이 간다, 그걸 좀 느껴야 돼요. 그런 훈련들이 목사들에게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시를 읽고, 소설을 읽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철학도 저걸 얘기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철학적 설교가 되지 않는데,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설교가 아니라, 그건 약정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좋은 뜻으로 약정사를 할 수 있어요.
약을 잘 선전해서 좋은 뜻으로 이렇게 전달할 수 있죠. 그러나 그건 약정사이지, 그 약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아닌 거예요. 약을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은.
복음이라고 하는데, 복된 소식입니다. 복음, 신약, 구약. 이게 상품이 아닙니다.
상품이 아니에요. 자꾸만 상품처럼 사람들이 생각하고, 그렇게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럼 뭐, 뻔하죠.
저 사람이 지금 복음을 성품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잖아요. 말은 그럴 때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많은 청중들이 따라올 수도 있고, 혹시 선동기가 있으면 그건 다 돼요.
선동이라는 말이 나와서 정치인도 그렇고, 종교인도 그렇고 선전적으로 선동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선동 기술을 배우면 돼요, 기술이에요. 히틀러 같은 사람들은 선동가로서 대단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우리는 상품을 포장해서 매뉴얼에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하는 게 아니라 복음 세계 안에도 들어가는 겁니다.
자기가 이해하는 것만큼 들어갈 수 있어요. 이게 뭐 설교자만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동안 교회에 다녀도 복음을 복음대로 조금씩이라도 더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요.
당신은 어떻게 아냐? 뭐, 보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복음에도 다 은폐에서 숨어 있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제가 이 앞부분에서 머물다가 계속 뒤로 나가지 못하네요. 진도 나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편안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말이에요. 십자가 사건도 이것도 아직 은폐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 인류가 구원 받는다, 죄가 용서받는다.
이게 실증적으로 드러났나요? 아니잖아요? 죄가 뭔지? 그리고 믿어서 의로워진다고 하는 게 뭔지? 우리가 부도덕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되는 것을 가르치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예수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한 거죠. 근데 2000년 전 한 역사에서 로마의 반역자들에게 해당했던 십자가 처형에 의해 달렸던 그 한 남자의 운명이, 어떻게 모든 인간의 구원이 가능한 유일한 길이냐 하는 거죠.
그게 복음이라고 하잖아요. 몇 주 전에 성소에 들어갈 담력이라는, 성소에 들어갈 담력이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성소, 지성소, most holy place, holy place 앞에 most를 붙여서 지성소라고도 불러요.
어두운 곳이에요, 은폐되어 있는 곳이에요.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내가 왜 저선을 만나야 되는지, 다 숨어있던 것들이에요.
그리고 그 우리도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만나서 채아가 되고, 거기서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 가까이 있다가 바깥으로 나와서 이렇게 인간이 돼서 사는 거 아닙니까? 이게 어두운 거예요, 이 자체를 보면. 그리고 수십만 년 조금 더 가면 몇백만 년 진화를 통해서 오늘의 인간이 된 거잖아요. 여기 왜 꼭 이래야만 되는지, 다른 쪽으로 진화될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되는지 하는 것들이 다 비밀이에요.
그런 걸 생각하면 아득한 겁니다. 성소, 저는 이걸 사실 그때 설교 반복하지는 않겠어요. 죽음 이후가.
어둠이잖아요, 그건 성소와 같은 거예요. 골칫거리이에요. 거기에는 용기가 필요한 거예요, 그냥 못 들어갑니다.
이런 것들이 다 연결됩니다. 이런 성소의 세계와 철학적 사유, 인문학적 담론, 예술, 음악, 이런 등등의 경험들이 하나님이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철학자가 되거나 신학자, 전문적인 무슨 그런 사람이 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근원적인 것, 놀라운 것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하나님이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하지 않더라도, 삶에 대해서 그 열린 눈으로 보기만 하면 근본을 붙잡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한 겁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 혹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인간론 즉, 엔트로폴로지, Theological Anthropology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에요. Theological Anthropology, 신학적 인간론의 또 다른 항목들은 죄라고 하는 거잖아요. 인간이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하는 걸 보니,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게 분명하고,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지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아는 그러한 신학적 사유를 통해서 죄라고 하는 데까지 온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 저건 있어요. 방금 제가 히틀러 얘기했는데, 그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요.
이게 완전히 죄를 지었기 때문에 완전히 파괴됐냐, 아니면 부분적으로 남아있냐, 그것 때문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최근 현대 신학에서는 바르트하고 브른너가 접촉점 논쟁을 벌였어요. 인간이 타락한 뒤에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있느냐 없느냐, 바르트는 없다 얘기하고 브른너는 있다 얘기하고요. 지금 여기서 그것들을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현대 신학을 비롯한 전체 2000년 동안 내려왔던 신학적 사유의 체계에 대해서 신학생들은 신학교에서 더 철저하게 공부해야 됩니다. 그래야 성서를 해석할 수 있어요, 똑바로 해석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냥 신학교에서는 세미나리라고 하잖아요. 세미나리. 그것을 3년 합니다.
학부 졸업한 다음에 3년 해요. 그럼 전체 7년이잖아요. 공부 많이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 신대원이라고 보통 얘기하는 3년 동안 하는 건 introduction이에요, 아주 기초적인 것만 해요. 그거 가지고는 신학을 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목사가 갖추어야 될 최소한의 소양을 얻었다, 그 정도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는 내가 신학교 나왔다는 걸로, 그리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니까 설교나 할 수 있을 것처럼 서잖아요. 그건 경솔한 겁니다. 그런데 목사의 은사가 있는 거죠.
그러한 일정 과정을 거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면, 교회 안에서 그 권위를 인정해야 됩니다. 그러나 목사 자신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생각을 해야 돼요.
자기 신학, 그렇게 3년 동안 일반 학부 나와서요, 신학 학부를 신학대학 나왔어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일반 학과 나와서 3년 동안 신대원 해봤자 무슨 신학을 공부합니까? 그래서 신학적으로는 생각을 안 해요. 목회 현장에 가서는 그냥 신자들하고 비슷한 수준에서 성경을 봅니다.
그래도 뭐, 인격적이고 성실한 목사들도 많아요. 그렇게 해서 신자들하고 교회를 잘 꾸려가면 나름으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사 스스로는 그렇게 만족하면 안 된 거죠.
말이 세고 오늘 다른 데로 나가네요. "이 사람 내 영혼을 주님께 올립니다"라는 말하고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라는 그 문장이 너무 강렬해가지고, 어떻게 저런 강렬한 문장으로 설교해야 될 사람이 영혼이 그렇게 건조한가, 그런 생각에서 제가 조금 흥분해서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건조하지 않고 굉장히 열정적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그렇게 설교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엉뚱한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하는 거죠. 그런 게 어떤 거냐, 몇 가지 얘기하고 싶은데, 가겠습니다. 정보 과잉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인플레이션, 정보 과잉. 설교 때 그런 얘기를 했네요. 어떤 가수나 배우가 몇 년 전에 건물을 하나 샀는데, 그게 4배, 3배 올랐다, 그런 게 뉴스에 나온다고 하는 거예요.
일반 공중파에는 안 나오고 있죠. 공중파는 안 나오죠. 그러나 인터넷 뉴스에는 많이 뜹니다.
이제 그런 게 또 조회수도 많으니까, 우리가 영혼의 깊이에서 살기가 힘들다, 그런 얘기를 했어요. 저걸 빠트렸네요. 하나님의 형상, 이 이야기할 땐 나와야 되는 건가 모르겠습니다.
일상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거기서 정말 삶의 근본이 되는 것,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다, 누구나 볼 수 있다, 하면서 제가 얼마 전에 우리집 뒷곁에서 본 사진 두 장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줄기였고, 또 하나는 표면 장력을 일으키는 물방울이었어요. 사진을 보여 드리려고요.
사진 보이시죠? 가운데 흰색깔로 내려오는 게 물줄기입니다. 정말 신기했어요. 물론 늘 보는 것들이지만, 그날따라 신비로웠습니다.
물이 막 규칙 없이 막 끈을 똑똑똑 똑 이렇게 떨어지기도 하고, 큰 물결이 물줄기가 막 떨어지기도 하고, 아주 거칠게 많이 떨어지거든요. 근데 그날따라 이렇게 1cm 두께가 말랑말랑한 게 끈이 쭉 이어지는 것처럼 내려왔습니다. 보세요, 얼마나 재밌습니까? 그런 거 보면 두 번째 물방울이에요.
대단하죠, 물방울이요? 보이시죠? 우주 무중력, 선택하면 물이 저렇게 붕붕 떠다닙니다.
자랑질과 영혼 궁핍 배에 대한 얘기를 했어요. 자랑거리, 여기에 자랑거리 하고 싶은 사람 해라, 이제 얘기한 겁니다. 그건 귀엽게 보면 돼요. 제가 이렇게 말을 하면 완전히 도사가 된 듯 하다 생각할 텐데, 저도 도사는 아니에요. 이렇게 저렇게 막 신경도 쓰고, 싫은 사람.싫고 뭐 그래요. 근데 그래도 근본에 대해서나 아니까, 진짜 그렇게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자랑하게 내버려 두지, 뭐 귀엽게 생각하자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랑하는데 가면 자기가 거기에 떨어지게 되면, 그의 영혼은 궁핍하게 됩니다.
왜 그런지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자꾸 자랑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자기 인정받고 싶어지는 거예요. 인정받지 못하면 좀 마음이 허전한 거예요, 그런 게 영혼의 궁핍이죠. 그 자랑할 만한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다섯 번째, 자기 자신과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놀랄 줄 알고, 그걸 낯설어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영혼이 살아있는 거다,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앞에 물줄기하고 물방울 얘기했어요. 어디 그것만 얘기했습니까? 존재하는 것들은 왜 존재하고, 무는 더 이상 없는가, 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예요. 존재하는 것, 하이데거 용어로 하자면, 자이엔데, 존재하는 건 있어요, 책도 있고, 이것도 있고, 머리카락도 있고, 뭐 있다, 있어요.
이 존재하는 것들이 이렇게 존재하는데, 무, 그 하이데거 단어로 얘기합니다, 니체 없는 거예요. 없는 것은 왜 없나? 그러니까 돌은 있고 물은 있어요, 각각 존재하는 것들이에요. 근데 물과 돌과 물 중간쯤 되는 건 없어요, 왜 없을까? 당연하지, 없지.
그건 없으니까 없지. 이렇게 얘기하면 이젠 철학적으로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철학적으로 생각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창조의 깊이도 그렇게 하면 못 들어가는 거예요.
이상하게 느껴져야 된다니까요? 돌은 있고 물은 있는데, 사이에 있는 건 왜 없냐? 그건 없잖아요. 있을 수도 있는데, 왜 없나 하는 거죠. 양자역학하고도 연관되는 겁니다.
세계는 왜 이렇게 존재하는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그거 밖에 없는가?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100년 산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이잖아요. 이미 그렇게 다 물리학이 말하고 있잖아요. 거기에 결속되어 있다면 도대체 이렇게 존재한다고 하는 게 뭐지? 궁금한 겁니다.
우리가 철학자나 물리학자나 전문적인 그런 사람이 꼭 돼야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일상을 잘 살피면 그게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걸 이제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면, 그러면 전문가가 돼야 되는 거고요. 전문가들도 다 우리하고 비슷해요, 궁금한 거를 이제 자꾸만 연구해 보는 겁니다.
그런 궁금증이 없으면 뭐 안 되는 거죠. 아니라는 거예요. 설교 마지막 부분에 성육신 얘기했어요.
육신을 입었다는 거 아니겠어요? 성육신은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겁니다. Incarnation 이에요. 말씀이 육신이 됐다, 말씀은 이제 로고스예요, 성령이라고 얘기해도 좋고요, 하나님의 섭리, 통치라고 해도 좋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온 이야기예요. 라고 하는 거죠. 삼위일체의 연관 속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어요.
많은 그리스도교 교리사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겁니다. 어쨌든 이 비밀. 성욕신의 비밀, 이걸 이해해야 돼요.
삼위일체 비밀을 이해해야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혼돈하지 않고 잘 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하는 진리와 형상의 관계는 뭔가, 그런 것들이 들어와야 돼요. 다, 정통 그리스도교는 그 철학자들의 사유를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변제한 거예요.
자, 대림절, 우리 기쁨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인정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임마누엘이시다.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미 오신 분의 현재 삶에 우리가 충실하면서, 그러나 이것이 완료된 삶이 아니라 또 기다려야 될 삶의 미래와 긴장 관계에 있는 겁니다. 같이 그냥 사이비 이기단들이 막 이렇게 뭐라고 그러죠? 그 모든 것들을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이렇게 재단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우리 이 안에 신천지 안에 들어와야 하면 어떻게 됐는가, 그런 얘기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다 유치한 거예요, 정말 유치한 거예요, 혼동하는 거예요.
정통 기독교에서도 그런 흔적들이 많이 있긴 있죠. 너무, 너무, 너무 확실한 거를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얻지 못합니다.
긴장 가운데 살아야 돼요. 최선입니다. 좋은 대림절 되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