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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기, 성령과 불 세례, 눅 3:7-18, 대림절 3주, 2024년 12월 15일,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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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기, 성령과 불 세례, 눅 3:7-18, 대림절 3주, 2024년 12월 15일,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
안녕하십니까? 2024년 마지막 달, 세 번째 주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 7절에서 18절이 본문이 있어요. 세례 요한 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관계는 미묘합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분명했던 것 같아요. 아니,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서 분명한 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약간 껄끄러운 이야기죠.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이신 그분이 왜 세례를 받느냐 하는 겁니다. 이 수가 끼일 수도 있어요.
죄가 없으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살겠다는 결단이잖아요.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려고 온 사람들을 향해서 세리와 아니 설교한 내용을 보면 새롭게 살아라, 그 얘기입니다. 근데 예수께서는 새롭게 거 말고 하는 말을 붙일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 세, 세례 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에요,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까? 세례 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에요.
근데 세례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세례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떤 뉘앙스가 약간 비추기 하지만, 세례를 딱 받았다 그래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뭐 어떤 일이 일어났다, 뭐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리 요한께서 세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첫 번째 메시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하늘나라에 대한 비전이, 비전이라는 점에서도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세례 요한이 먼저 하늘나라를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예수께서도 똑같은 멘트로 설교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약간 껄끄러울 수도 있는 건데도 불구하고, 딱 그대로 인정한 걸 보면 그 명백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 세례 요한과 예수의 관계에서 우리가 또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은, 그 그리스도교 구성원들 중에 적지 않은 부류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선의의 경쟁, 뭐 그냥 쉽게 표현해서 선의의 경쟁 관계 있었다고도 볼 수 있어요. 근데 세례 요한이 일찍 감치 헤롯 왕에 의해서 참수형을 당했죠.
그래, 그 제자들이 그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 공동체에 들어온 거랍니다. 그리고 그런 전통들이 상당한 기간 이어졌죠. 그래서 세례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종교 의식으로 자리를 잡게 됐습니다.
사도행전 어떤 목인가, 지금 제가 찾지 않겠습니다. 그쪽 사람, 바울이 전도할 때죠. 그쪽 지역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고 해요.(사도행전 19:1-7)
이차 선교 여행 시작할 때인 것 같습니다. 성령으로 성령을 받아야 된다는 부분을 바울이 강조했죠. 어쨌든 세례 요한과 예수의 관계는 그렇게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요한이 예수에게 여러 가지 점에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만은 우리가 인정해야 됩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는 선지자의 전승을 이었어요. 제가 표한 거룩한 상상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거룩하다는 말을 예, 너무 이제 난발하는 경향이 있죠.
저도 이제 거룩하다는 표현을 자꾸 붙여요. 그 이제 그렇게 하는 이유가 일부러 그렇게 하는 건 아니죠. 제가 그렇게 표현할 때는 그 거룩하다는 게 어떤 의미가 아 있기 때문입니다.
뭐, 거룩하다고 하면 뭐 지저분하지도 않고, 뭐 깨끗하고 황홀하고 뭐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뜻이 아닌 거예요. 그 구별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 어원적으로 보면 하기오스ἅγιος에서 온 거거든요.
거룩하다는 거요. 하기오스, 사도신경에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 이렇게 나가잖아요. 거룩한 공교회, 교회를 얘기할 때에 사도신경은 이 거룩성과 그리고 공적이다, 보편성이 두 가지를 짚습니다.
개혁신조는 네 가지를 짚어 거룩성, 보편성, 단일성, 사도성. 그래서 거룩하다는 교회가 거룩하다는 말은 뭐, 뭐 특별한 하나도 없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아주 완벽하게 깨끗한 그런 뜻이 아니라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이 지배하는 건 이 세상의 메커니즘이잖아요.
근데 거기서 구별하는 것은 돈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해를 들어서 말씀드리면 그런 거예요. 이제 구별된다는 겁니다.
거룩하다는, 그러니까 거룩한 상상력이라고 하는 말은 그냥 뭐 되지도 않는 뭐 막 그 엉뚱한 상상을 한다는 게 아니라, 이 세계의 권위주의, 세속주의, 그런 것과 구별되는 세계를 향한 꿈인 거죠. 기다림인 거죠. 거룩한 상상력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늘 거룩한 상상력을 품고 살죠. “부르크만"이라고 하는 사람 있죠. 스펠링을 정확하게 지금 쓸 수가 없어요.
부르크만, 뭐 발음하기에 따라서 부르지만이라고도 해요. 제가 옛날에 읽은 책은 부르지만이라는 우리말로 그 저자를 소개했더니 예언자적 상상력입니다. 예언자적 상상력, 선지자들의 고유한 영적 상상력이 뭐냐 하는 것을 구약 성서학자인 브로크만 혹은 부르지만이 썼어요.
저번 책 여러 번 우리나라에 번역됐습니다. 예. "텍스트로 말하게 하라"라고 하는 걸 제가 그 얼마 전인가 읽었어요.
그것도 번역됐습니다. 이 설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성서 신학자인 설교에서도 일가견이 있어요.
이 텍스트에서 설교에서 중요한 건 자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텍스트가 말하게 한다. 물론 자기 생각이 완전히 빠진 건 아니죠. 텍스트를 해석해야 되니까.
그걸 그냥 문자적으로만 해석이 됩니까? 그 해석하는 사람의 어떤 생각들이 들어갈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의 생각과 텍스트 사이에 어떤 공감이 있을 거 아닙니까? 이 텍스트를 바르게 해석해야 되는 겁니다. 설교하는 분들, 제가 뭐 다른 그래도 써 본 적이 없고 뭐, 뭐 설교 뭐, 학, 그 심포지엄이 뭐, 특강 이런 데 제가 가서 여러분 얘기를 한 거예요.
제가 설교 학자도 아니고요. 대형교회를... 키운 그 유명한 명설교가 아닌데, 설교 비평 작업을 아주 오래 전에, 20년 전에 하는 걸 계기로 해서, 그런 목사들의 설교 공부 모임에 여러분 갔습니다.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주 다녔죠. 그때 그 이야기는 꼭 했습니다. 다른 걸 쓰지 말고, 성경 텍스트 안으로 좀 들어갑시다, 텍스트, 이게 중요한 거거든요.
이 텍스트의 지평이 있어요. 텍스트의 지평, 지평이 텍스트의 차원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텍스트가 기록될 때, 사람들이 생각했던 생명, 구원, 평화, 아, 뭐 세계, 우주, 이제 그런 것들을 먼저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 텍스트에서 그 지평을 알고, 그다음엔 그 설교를 들어야 될 그 청중들의 지평, 이게 지금이죠. 지금 텍스트의 지평, 인문사회연구소 텍스트의 지평과 컨텍스트, 문맥이 컨텍스트, 지금 우리는 이 상황 속에서 하니까, 컨텍스트의 지평을 알아야 돼. 그 인문학 공부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뭐 신학은 뭐 기본으로 깔려 있는 거고요. 양자 역학을 알아야, 그 현대인들이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 거 아닙니까? 그 사람들의 세계 이해를 설교자들이 알아야, 성서의 지평을 오늘 그들이 알아듣게 말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전히 뭐 천동설이나 뭐 진화론 이전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게 된다면, 설교자는 엉뚱한 얘기를 하게 되는 거죠. 이 텍스트와 컨텍스트 관계에 애를 잘 붙들고, 이 가다머의 표현을 따르면, 가다머, 해석학 철학자입니다.
이 두 지평,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지평이 만나서 용해되는 사건이 바로 해석하기 얘기하는 거예요. 말이 옆으로 좀 갔습니다. 이 선지자들, 예언자, 선지자들의 거룩한 상상력, 이게 뭔지를 우리가 가슴 뜨겁게 경험해야 됩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오늘에 따른 스바냐 그 말씀과 참고적으로 또 이사야를 읽었어요. 그 외에도 많습니다. 어린양과 사자가 같이 뛰놀다, 독사 굴에 어린아이가 손을 낸다, 그거는 현실에서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나 그런 세계를 꿈꾸는 거예요. 그게 꼭 사자와 어린양이 같이 논다, 그거만 얘기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지배하는 나라와 지배받는 나라가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가 아니라, 이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세계가 가야 되지 않냐 하는 그 꿈을 선지자들이 영혼 속에서 불태운 겁니다. 그런 게 쭉 이어 내려와서 세례 요한이 왔고요, 그게 또한 예수에게 영향을 끼친 겁니다.
이 세례 요한에게 영향을 받았고, 그리고 요한만이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의 그 영성, 하나님 경험에 예수님, 당연히 영향을 받은 거죠.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이제 그게 뭐냐 하는 걸 알아야 되죠.
지금 말씀드린 대목들을 잘 살피고, 그 차이가 뭔지도 알아가고, 예수의 고유성이 뭔지를 좀 명확하게 알고, 아,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신앙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 거 아는 거 재미있지 않나요? 목사라면 물론이고, 기독교 일반 신자라고 하더라도 그런 세밀한 차이들을 알아가는 거, 재밌지 않을까요? 그 세례 요한의 설교가 말하려는 핵심은 유토피아니즘입니다. 말씀드렸어요. 이 정의와 평화, 그리고 휴머니즘, 이게 충만한 그런 세상 말입니다.
유토피아라고 하죠. 유는 없다는 뜻에 우와, 그 토포스, 아는 장소, 어이라는 두 라틴어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예요. 그게 '없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없는 장소예요.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그런 새로운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네, 유토피아니즘이 공산주의와 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어요.
그들이 바라봤던 세상은 완전한 인간 자유가 보장되는 때거든요. 노동으로부터 해방이죠. 근데 그게 말 그대로 없어요, 가능하지가 않아요.
그런데 그들은 폭력적으로, 공산주의는 폭력적으로 그런 세상을 이루어보려고 했습니다. 유토피아를 세워보려고 했어요. 폭력을 통해서라도. 실패죠.
자본주의는 폭력은 아니나, 다른 유형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의 논리로 세계를 그렇게 만들어보려고 하는 거죠. 그것도 뭐 실패하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정치인들은, 정치인들은 저것만 생각합니다.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저것만이라도 생각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양심적으로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정치란 어떻게 보면 이제 필요 악입니다. 없는 게 좋은데, 없으면 이제 세상이 카오스 하여튼 혼란으로 떨어지니까 어쩔 수 없이 있긴 있어야 되는데, 그게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죠. 뻔한 얘기를 제가 지금 이렇게 뜸을 드리고 있는 이유는 다음 이야기를 해야 할까 말까 좀 망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통령 탄핵하고, 노무현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탄핵이 이번에 세 번째라 말이에요. 그리고 거기 대통령했던 분들이 2000년대에 들어서서 했던 분들이 다 불행해졌잖아요.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그 노후를 잘 보내고 있는데, 얘긴 제가 그 원당 일기에 뭐 썼으니까 대신하겠습니다.
할 말이 좀 많이 있기는 한데 줄이겠습니다. 그 정치인들은 정치만이 그런 게 아니죠. 이게 자기 이익 방위, 위험이 실패한 이유도 거기 있죠.
그런 방식으로 완전한 노동으로부터 해방과 인간의 인간다움이 완전히 보장된 세계를 꿈꾸기 했으나, 그걸 만들어 가려다 보니까 인간의 욕망들이 거기서 서로 뒤엉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되지가 않아요. 그걸 가르쳐서 우리 기독교에서는 죄라고 얘기합니다.
인간 자체가, 인간 본질이 병들었는데, 유토피아니즘, 아무리 멋진, 어떻게 실현하겠다 하고, 같이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영적인 존재라서 그런 완전한 유토피아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뭔가 다른 걸 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악수나 반복되는 이게, 정의와 평화, 경제적인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되도 우리가 이 현실 역사에서 보듯이, 지금 21세기 지금 보듯이 국가주의가 점점 팽배해 있다는 데서 그 선지자들의 거룩한 상상력과 유토피아니즘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세례요한과 다 연관되는 겁니다. 물세례, 근데 정말 물세례를 받아서 양심껏 법과 양심에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면 좋은데, 그게 안 되니까요. 이 계몽주의로 인간성이 최고조로 발전하고, 아, 그리고 자연과학과 그 기술이 거 신적인 경제에 옳다고 할 정도로, 뭐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상태가 올라가 있고, 물질적인 풍요가 좀 선진국을 중심으로 본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이제 좋아졌는데, 이 세계는 지금 거꾸로 가고 있어요.
국가주의가 팽배합니다. 그 마르쿠스 가브리엘이라는 사람이 책장 바로 앞에 조그만 책꽂이에 눈에 보입니다. "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 예, 저기서 또 아마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정치와 기업에서도 이 전공자에 도를 받아야 된다, 뭐 그런 얘기 합니다. 정치나 기업 운영에서도 이 윤리 학제가 꼭 있어야 된다고 얘기하는 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치나 기업은 정치적인 자기 이익과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서 얼마든지 비윤리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뭐 기업체가 자기 이사진에 아니면 중요한 회의를 하면서, 그 중요 회의 때에 괜찮은 윤리 학자를 불러다가 참여 시키나요? 안 하죠. 윤리 이런 거 들어오면 돈벌이에 더 지장이 되니까, 누가 하겠어요? 정치 마찬가지예요. 지금 뭐 여야 어느 쪽에 더 크게 잘못했는지는 차이는 있죠.
물론 예, 뭐 지금 야당에 따뜻한가요? 그렇게 아니잖아요. 이게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양비론에 빠지는 건 또 잘못이고, 70이 잘못했을 땐 따져야죠.
네가 80 잘못했으니까 그만큼 책임지고, 20 잘못했으면 그만큼 책임지면 되는데, 그게 20 잘못한 사람이 아, 나는 뭐 80 저렇게 잘못한 사람 때문에 나는 뭐 세발의 피다, 난 잘못한 거 없어, 저것만 때려잡으면 돼, 이런 생각으로 정치를 하고 기업을 운영하는 거예요. 그게 이제 세계적으로 다 지금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 그렇다면, 테리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고 했어요. 그걸 뭘까요? 불세례에 앞에 이야기를 제가 너무 많이 한 거 같아요. 오늘도 많이 했는데, 아, 설교 시간에는 모르겠어요.
조금 요걸 더 물세례와의 물세례는 좀 더 적게 하고 이 불세례 성령 세례 이거를 많이 하면 좋았을 것 같아요. 근데 이것도 상상상 상관관계에 있는 거라서, 앞에 이야기를 충분하게 해야만 성령 세례를 알 수 있거든요. 그 설교 시간에도 말했지만 물세례는 손에 딱 들어와요, 법과 양심이에요. 근데 불세례는 딱 들어오지 않아요. 그 영혼이 새로워진다, 내가 얘기를 했잖아요.
아고, 그것도 딱 들어오지 않죠. 존재 자체가 새로워지는 거다, 얘기했지만, 그게 뭐지? 그것도 좀 잘 안 들어와요. 우리는 새로워진다는 거짓말, 안 하던 사람이 하던 사람이 안 한다거나, 노름 하던 사람이 안 한다거나, 뭐 그런 정도 생각하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게 완전히 아닌 건 아니지만, 그게 기본은 아닌 거예요. 그건 하나의 결과로 나타나는 거고, 바울의 표현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 아래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는 거예요. 더 이상 우리는 세상의 질서에 지배받지 않는 거죠. 종이 아니라 아들이 되는 거죠.
30평짜리 이상의 아파트에 살아야만 중산층이 된다는 그 사고 방식, 이게 묶지 않은 거죠. 물론 이건 뭐,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다 살긴 하죠. 제가 예를 들기 위해서 그런 말씀 드린 거지, 기독교는 뭐 그렇게 세상의 질서에 지배받지 않는 그런 정도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거예요. 우리 죽음 이후에 미래까지,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거죠.
그래서 이걸 설명하기 힘든 거예요. 이 설명하기 힘들어도 자꾸 그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목사들은 해야 돼요.
근데 그게 자신도 잘 확실하게 잘 안 들어오니까 다른 얘기를 자꾸만 하는 겁니다. 뭐, 교회 봉사 하라지, 뭐 기도했더니 어떤 응답했다든지, 뭐 그런 게 유치하다든지, 뭐 큐티를 한다거나, 뭐 이렇게 저렇게 우리가 사회봉사를 어떻게 잘해야 된다거나, 뭐 우리는 다른 교회에 비해서 우리는 굉장히 개혁적이고 내세운다거나, 뭐 민주적으로 한다거나, 뭐 그런 게 있어요. 아니면 좀 멋진 합창단, 뭐 파이프 오르간, 뭐 그런 것들로 뭔가 있어 보이는 교회를 만들어 가려고 하는 거죠.
뭐 그런 것도 다 뭐 있으면 괜찮죠. 근데 근본은 아닌 거죠. 그 죽음 이후까지 이르는 종말적 생명의 깊이를 자기가 다 설명할 수 없어도, 늘 의식하고 있어야 됩니다.
설교자는,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다 마찬가지예요. 일단 그쪽으로 영적인 촉수가 있어야, 책을 읽고 연관돼서 우리의 생각이 깊어지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이요, 바울이 얘기한 그걸 저는 절대 자유인이 되는 거다 말씀드렸어요.
새로운 피조물, 이전 피조물, 이건 지나갔어요. 그러니까 이전 것은 다 세상의 원리에 지배받는 삶입니다. 꼭 나쁘다는 뜻이 아니에요.
이제 자연주의적이고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질서들은 많잖아요. 그런 것도 다 지나가 버린 거예요. 그 이제 부활 생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그 사실에 기독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근데 미래 생명이에요. 미래는 지금 현재도 모르는데, 뭐 미래...
그렇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자주 설교에 나왔습니다만, 시와 꽃 이야기했잖아요. 지금 시가 시야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데, 꽃은 미래예요.
여기 안에 숨어 있어요. 그 시도지만, 꽃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사람이 있고, 아예 그 시에만 매몰돼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 안에 있으면서 여기에 충실하게 알기만 하더라도 괜찮죠.
그냥, 아, 바람직하게 인생을 살았어, 저렇게만 살아도 있지, 그런 말은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부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아닌 거예요.
그건 물 세례 예식이 있지만, 꽃을 희망하고 미래를 내다본다는 게, 나중에 어떤 결론이 날지는 몰라요. 저는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것도 우리의 거룩한 상상력에 더 이상은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먼 훗날, 그 먼 훗날이 언제일지도 몰라요. 먼 훗날이 이미 지금이기도 하고요. 우리가 기다리는 종말이 되면 모든 시간이 하나가 돼버려요.
그걸 우리가 상상할 수가 없어요. 그런 시간을 우리가 출생하는 순간과 죽는 순간이 하나다, 이 얘기하면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런 세상이 있는 겁니다. 좀 말이 이상하긴 할 거예요.
근데 그걸 극복해야 됩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미래, 생명, 종말의 성,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선취의 방식으로 역사 안에서 예수에게 발생했다는 사실에 우리 기독교의 모든 것이 달려 있어요.
설교 마지막 대목에서, 오늘 조금 뒤에 있네요. 그래, 이건 마주해야 되겠습니다. 힘 기를 한번 해보시라.
그 부활 생명, 뭐 그 설교에서 순교, 뭐 그런 얘기도 했어요. 그런 말 할 때는 조심해야 됩니다. 목사가 자기들 자신이 없는 말을 잠깐만 내뱉으면 신자들에게 부담이 되거든요.
순교, 이게 뭐 어디 말처럼, 이게 만만한 일입니까? 저도 조심하긴 하는데, 그 부활의 능력을 말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짚은 겁니다. 그리고 그 순교의 역사는 그리스도교에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거기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그런 일상 속에서는 힘들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하냐, 제가 그 일을 해결할 수는 없는데 하나의 팁을 준다면 힘을 빼보자.
너무 우리 삶에 힘이 들어가 있어서, 살고 있는 게 뭔지, 생명의 본질이 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거든요. 힘을 빼는 거예요. 젊어서부터 다들 힘 막 죽고 삽니다.
손해를 일절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네, 그런 것들이 서로 사회 안에서 충돌하잖아요. 우리나라에 전반적인 사회 문제와 연관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공부 잘하는 고등학생들이 대부분 의대나 법대를 전공하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가장 어처구니 없는 사회의 현상이에요. 그러니까 법조인이 되는 것과 의료인이 되는 것이 공부 잘하는 모든 학생들의 궁극적 목표예요. 이건 사회가 병드는 거죠.
힘이 꽉 들어 있는 겁니다. 뭐 그렇게 해도 하루 연봉이 2억, 3억 된다고 하더라도, 하루 새끼 먹는 거 똑같고, 숨 쉬는 거 다 똑같고, 책 읽는 시간도 다 똑같고, 약간 좀 편리하게 사냐, 불편하게 사냐 하는 건데, 그런 힘을 빼면 뭐가 중요한지 알겠죠. 그런데, 그 힘 빼기 쉽지 않아요.
성령 세례를 받아야 된다, 뭐 이렇게 설교 마지막 단락에서 얘기했습니다. 힘 빼기, 성령 세례는 서로 상호적인 거예요. 우리는 그냥은 힘 못 뺍니다.
우리 안에 뭐가 들어가야 돼요. 그걸 우리는 성령 받는다고 얘기합니다. 거룩한 영이 있어야 이제 악한 영이 빠지는 거죠.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