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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큉(Hans Küng)의 「나는 무엇을 믿는가」(WAS ICH GLAUBE, 이종한 역, 분도출판사, 2021년)를 정용섭 목사가 강독한다. 장별 차례는 아래와 같다. 1 삶에 대한 신뢰, 2 삶의 기쁨, 3 삶의 여정, 4 삶의 의미, 5 삶의 바탕, 6 삶의 힘, 7 삶의 모델, 8 삶의 고통, 9 삶의 기술, 10 삶의 비전
39번째 시간입니다. 128쪽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제 4장, 삶의 의미를 읽고 있습니다.
일단 그 제목만 편하게 생각해 보시죠. '삶' 그리고 '의미' 두 단어입니다. 삶은 살아 있는 것, 그것이 당연한 것과 같지만, 또 당연하지도 않아요.
지금 여기, 지금 살아 있잖아요. 제가, 여러분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듣죠? 근데 이게 이어지진 않죠.
곧 저도 말할 수 없는 순간이 올 거고, 여러분들도 듣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삶은 시간 안에 있다는 얘기죠. 시간이 지나면 나 없어지니까, 이거 생명력이 소진되니까 안 됩니다.
도대체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긴 한데, 삶이 뭔지를 누구나 다 동의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물론 생물학 쪽으로 생명체와 비생명체로 나눌 수 있어요. 그거는 그렇게 나타나는 현상을 얘기하는 것이 왜 꼭 그래야만 되는지도 아직까지 모릅니다.
모르는 게 한두 가지 있어요, 자기 복제를 하고 생명 현상 말입니다. 그 몇 가지로 정의할 수 있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삶을 정확실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살아서 움직이고 얘기하죠.
동물, 곤충 이런 것들 움직이지만, 나무들은, 나무 식물들은 움직이지 못해요. 그리고 비생명체와 생명체 중간쯤 되는 어떤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까지 제가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뭐, 어떤 게 생명인지는 알 수 있어요. 그게 이제 100% 완벽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다가 우리가 왜 살아야 되는, 이제 그 의미까지 들어가면, 뭐 대답을 찾기가 정말 힘들죠. 그 의미를 따질 필요가 있냐 없냐, 뭐 그런 거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게, 사는 것이 뭐 의미를 찾냐, 그런 얘기를 합니다.
기독교도 이런 전체 생명, 삶, 그거하고 다 연관해서 어떤 것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생명의 창조주라고 얘기했잖아요. 그러면 생명, 삶이 뭐냐에 대해서 음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
책 좀 계속 따라가 보겠습니다.
128쪽에 삶을 체험하기입니다. 보이죠? 삶 체험은 20세기에 마지막 몇십 년 동안, 세속화된 들 안에서 계속하는 종교의 권위로부터 벗어났다는 얘기예요. 안에서 진행된 이런저런 일을 게하르트 슐체 같은 문화 사회학자들은 체험 사회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체험 사회라는 용어로 설명했다고 하네요. 체험 LF, 에어 프니스 혹은 에플알 웅, 독일어로 거기로 경험이라는 뜻이에요. 경험 사회, 사회는 뭐 영어로 소사이티, 독일어로 게마인샤프트 그렇게 얘기하는데, 그러니까 그 이전에는 세속화되기 이전에는 삶이 뭔지가 이미 주어진 거예요.
종교적으로 대답이 주어진 거예요.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대답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자기가 체험해 봐야 그 삶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 더 이상 종교적 권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속 사회 속에서는 체험이 중요하게 됐다는 겁니다. 이 사회는 더 이상 일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체험과 이벤트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사이다.
아, 저는 지금 내가 바로 설명한 거하고 좀 다른 관점이 여기 나와요. 이제, 요거 어 뒤에 나오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세속화라는 말과 연관해서만 종교적 권위로부터 이제는 자기의 경험이 중요하게 됐다고 말을 했는데, 여기서는 출처 모든 이야기를 그 앞에 나온 이야기를, 일중독 그게 이제 삶의 의미로 생각했는데, 그걸 벗어나고는 어떤 거를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벤트, 왜 여기서 체험은 흔히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는데, 종교적 해프닝의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종교적인 해프닝, 거의 그 놀이 체험, 그 이벤트가 종교 차원으로 올라갔다는 얘기죠. 나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데도, 그래서 가지려고 한다.
새 옷부터 새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체험 가치가 흔히는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 삶의 의미는 멋진 체험의 모색으로의 일부다, 오늘날 흔히들 말하는 일상성의 미학화가 덜 중요하다. 어려운다는 거, 미학화, 미학, 미학, 아름다움을 찾는 학적 노력 이거든요.
미학이 멋진 인생을 즐기려고 한다는 얘기입니다. 모든 것이 더 마음에 들고, 더 멋지고, 또 더 재미있게 되어야 한다. 뭐 맛집 찾아가고, 이런 저런 이벤트들이 많이 있잖아요? tvN , OTT오라고 그러고, 그런 그 공영 방송 말고, 다른 음, 그 아 뭐 유튜브나 이런 쪽을 통해서 송출하는 여러 방송들이 있습니다.
거기의 핵심은 재미죠, 멋진 거죠. 그래, 재미는 것은 허용돼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바입니다.
재미 없는 건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모든 것이 연예와 돼 있습니다. 종교 마저도 이제 그렇게 됐죠.
하지만 많은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우리 사회에서 노동 시장과 나란히 체험 시장이 일상 생활의 한 지배적 분야가 된 것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공급자들은 갈수록 영악해지고, 수요자들이 뭘 재밌었는지 알잖아요. 그래서 경쟁시키고, 뭐 그런 거 많죠. 그런 프로그램들이요, 수요자들은 갈수록 길들여진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익숙해졌다. 수백만 유로의 매출로 올리는 오늘날의 휘황한 광고 산업은 날마다 우리에게 대부분 젊고 행복한 얼굴을 보여 준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언제까지나 젊고 자는 갈망과 미용술, 건강 산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별 수 없이 점점 나이를 먹고, 마침내 정말로 늙어버린다.
오늘날의 체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추가 스트레스가 되어서는 안 되며, 삶의 욕구가 삶의 좌절을 기해서는 안 됩니다. 근데 뭐, 계속 그쪽으로 가는데 어떻게 합니까? 먹방 프로그램도 대단하죠. 그러나 내가 체험을 반대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나의 체험상은 이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나는 즐거운 체험을 아주 많이... 했고, 불쾌한 체험도 적지 않게 했다.
나의 삶은 다양한 세계 종교와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과의 풍요로운 만남, 특별한 사건과 여행들, 성공과 기쁨, 그리고 그와 더불어 고통과 패배도 이에 관해서 나는 할 말이 꽤 많은데, 이러한 것들을 겪은 삶이었다. 예, 80년 동안 살아온 자기의 의 삶을 되돌아보니까 그렇다는 겁니다. 여기서 예외는 없죠.
나는 이렇게 온갖 체험을 했지만, 삶을 세상으로 향하고자 하는 방탕아가 되지 않았다. 응, 이벤트요. 향 향응, 향유.
향유가 나쁜 거 아니에요. 이벤트 자체가 나쁜 거 아니에요. 뭐라, 연예? 여기 이제 치우쳐 버린 게 문제가 되고, 거기 이제 길들어 버린게 문제가 된 거죠.
방금 말씀드린 대로, 종교, 교회도 이런 방향으로 많이 갑니다. 현대 그러 감각에 대단히 예민한 신자들은 다 그런 교회로 쏠리죠. 여러 가지 볼거리가 있는, 향유할 거리가 있는 그런 교회로 말입니다.
이제 그런 현상이 점점 더 많아 질 거예요. 대형 백화점에 가서 이거저거 쇼핑하고, 뭐 눈요기도 하고 하듯이, 교회도 그런 대형 교회에 여러 종교 상품들을 쇼핑하듯이 몰리게 될 겁니다. 그렇지 않은 교회들은 아주 정말 맛집이 되든지, 소수 교인을 위한 빈익빈 부익부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될 텐데, 그것도 오늘 세속과 이후에 현대인들의 방향과 비슷하게 가는 겁니다.
오\도락가는 나를 즐겁게 하지만,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특히 한량이 쓸데없는 노심초사로 벌써 머리가 세다면, 한량을 플레이보이로 번역했는데, 플레이보이 이거 어떤 뜻으로 이렇게 쓰는지를 모르겠습니다.
플레이보이, 바람둥이라는 뜻이죠. 나는 그대로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그렇게 바람둥이로 살긴 했는데, 근데 그게 시간이 가면 완전히 늙어 버리는 거죠.
더 이상 자기의 그 멋진 바람 피는 모습들을 유지할 수 없잖아요. 제 우스운 거죠. 오로지 욕구 충족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향락주의는 지속적인 삶의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반문한다. 그대의 삶을 체험하라. 이것이 참으로 삶의 의미일까? 삶을 체험하는 게 중요한 거죠.
이게 필요 없다고 하는 건 아닌데, 거기서 향락, 그리 이벤트, 즐거운 거, 오락, 뭐 연예 같은 이런 경험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매우 지루한 컨베이어 벨트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은 오로지 일과가 끝나는 더 많은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나 자신은 고상한 층들에게서 거듭 확인했듯이 그들의 많은 대화는 오로지 휴가 이야기를 많이 [ 하죠.
휴가, 축구. 독일 사람들, 영국 사람도 마찬가지고, 축구 이야기, 제가 테니스 이야기하는 거 비슷하죠. 축구, 건강, 텔레비전, 휴식, 여행, 여행 따위를 이야기한다.
두루 체험할수록 그만큼 더 좋다고 하는 거죠. 과연 그런가? 그러나 사람을 좀 더 만족스럽게 해주는 것으로 충분할까? 더 좋은데 여행 다니고, 더 그 주말에. 그 축구장, 프로 축구 구장에 가고 프로야구 구장에 가서 같이 고함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마시고 먹고, 뭐 그런 거, 충분할까? 오늘날에도 세상에 넘치는 풍요가 사람의 체험 갈망을 참으로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현재 풍요 사유보다 더 잘 실증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는 거죠. 놀랍도록 많은 것들이 소비되고 향유되고 있긴 한데, 갈증이 심한 거예요. 뭔가에 점점 더 굶주리는 것 같습니다.
정치 쪽으로도 그런 갈증들이 막 분출되는 것 같아요. 정치인들도 그런 방식으로, 정치합니다. 팬덤이라 하나요? 팬덤 정치, 그건 뭐, 이성적으로 한 국가가 나가야 될 방향을 서로 의논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드는 거죠. 종교 현상이 되는 겁니다. 정치가.
그다음 단락, 충족된 삶인 거예요. 충족된 삶에 대한 만족에 관한 연구는, 나에게 왜 사람은 본래 주관적으로 그 일시적으로 만족하는가라는 물음에 두 가지 중요한 대답을 제공해 주었다. 첫째, 어떤 유형의 것이든 멋진 체험은 판타스틱한 거요, 오직 제한적으로 할 수 있을 뿐, 실제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증거를 만들어낼 수 없다. 이것은 나도 경험했다. 훌륭히 계획된 일도 실망으로 끝날 수 있으니, 똑같은 휴양지로의 두 번째 여행은 이미 첫 번째의 멋진 경험이 전혀 아니다.
이게 지루해지는 거죠. 둘째, 더 새롭고 더 나은 상품은 예전 것을 언제나 즉시 능가한다. 예전 것을 지루한 것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새로운 체험을 부추긴다. 더 좋은 거, 더 새로운 거, 그쪽으로 가니까 이런 것은 다 이상해지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상품 경제는 아예 작동하지 못할 것이다.
스마트폰이 늘 새롭게 조금 기능을 만들어서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한 순간 충족감을 느끼더라도, 이제 그 다음 것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금세 다시 떠오른다. 이것은 사실상 하나의 모순이다.
사람들이 만족 추구에 깊이 길들어 있을수록, 만족은 그만큼 덜 생긴다. 자극적인 음식에 입이 길든 된 사람은 웬만한 음식으로는 만족을 못 하는 거죠. 불행한 거죠.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게 특히 더 많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냥 집에서 주는 어머니의 밥상, 이걸 젊은 사람들은 내켜하지 않잖아요. 개인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신학자인 내가 아니라 앞에서 거명한 사회학자 게르하르트 슐체가 우리의 체험 사회와 관련하여 이렇게 확언했다. 체험 사회에 문제점을 얘기하는 거군요. 사회 철학적으로 분석한 겁니다.
이런 책은 좀 번역되면 좋겠네요. 주말과 휴가, 그러나 또한 파트너와의 관계, 직업, 그리고 그 밖의 삶의 영역들이 일종의 기대감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데, 뭔가 새로운 게 없나? 이런 거예요. 이런 압박이 실망을 낳는다.
삶의 의미에 대한 체험이 없을수록 체험의 지체 혹은 중단에 대한 불안은 그만큼 더 커진다.정 확한 진단입니다. 이건.
기억해 둬야 될 만한 용이에요. 이것은 나의 확신이 하다, 일은 쉬지 않는 꼼꼼한 일과 마찬가지로 체험, 끊임없이 새로운 체험 역시 결국은 오늘날의 생활 조건 아래 있는 보통 사람들의 삶에 충족감과 의미를 제공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모든 일과 체험 뒤에는 사실, 무엇 때문에 사는가, 실존적 물음이 감춰져 있는 것이다.
실존을 감출 수가 없어요. 무엇 때문에 사는가, 삶의 의미죠. 왜 사는가라는 실존적 질문, 이 실존적 질문을 숨기는 겁니다.
모순적으로도 오늘날 사람들은 점점 더 이른 나이에 은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점점 더 늦은 나이까지 일할 능력이 있고, 즐길 능력도 있으며, 또 그래서 더욱더 충족된 삶을 추구한다. 하지만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보살피는 사람은 쪼그라들기 마련이고, 남을 보살피는 사람은 무언가를 받는다. 무보수 명예직의 일도 시간 쓰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지만, 기쁨과 만족감을 선사하며, 고령에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삶의 권태도 덜하다.
여기서 하나 중요한 통찰이 대도 된다. 직업과 여가, 그리고 은퇴 후의 체험은 결국 인간의 삶 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닐 때에만 의미가 있다. 의미가 있을 때만, 그런 까닭에 나에게 핵심 요점으로 여겨지는 것은 다음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삶이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삶 자체로 의미를 지닌, 삶의 다양한 단계와 연령대를 관통하여, 나 자신을 일줄은 항구한 의미 말이다. 제가 쓰는 용어로 바꾸면 궁극적인 의미, 항구적인 삶의 가치들이 존재하는가? 맛있는 거 먹고, 좋은 집에 살고, 취미 생활하고, 뭐 이것저것 향유하고 체험하는 거, 그런 것에 많고 적은 상관없이 계속되는 변함 없는 그런 삶의 의미와 가치들이 있나 혹은 없나? 없다면 뭐, 그냥 대충 그렇게 살면 되죠. 내 그래서 만족하나? 만족이 안 되거든요.
그럼 그게 뭘까요? 그럼 자기를 실현하기, 자기 실현, 자기 실현인가? 질문입니다. 오늘, 오늘 본 건 삶 체험, 충족된 삶, 세 번째 자기 실현, 여기에 치우치는 것은 건 아니라는 걸 한스 큉이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과거에 일과 체험과 나란히 의미 매개를 도와주던 것들 가운데 많은 것이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다. 가은 경제, 금융의 토대가 삐뚜러 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가치들의 토대 역시 부식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누구도 더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많은 가치는 변화를 겪고 있을 뿐,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니다. 아무튼 교회와 사회 안의 전통적인 여러 의미 체계와 심급이 크게 설득력을 잃었기 때문에, 어단어가 심급, 심사하는 급수, 뭐 이런 거예요.
왜 이렇게 어려운 단어를 썼지? 여러 의미 체계와 세계와, 같이 판단, 심급이니까 판단이죠. 그래서 설득력을 잃었기 때문에, 예전에는 아이 때부터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무엇이 인간적이고 비인간적인지 가르쳤던 도덕, 모랄 윤리가, 이것이 흔히는 주관적 임의적 판단 속으로 해제되었고, 아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거 없어, 자기가 판단해야지, 주관적인 판단을 해야지 되지, 뭐 이런 식입니다.
우리나라 자꾸만 제가 이미 늙어서 그러지, 자꾸만 젊은 사람, 젊은 사람 얘기해서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기존에 있었던 전통들을 젊은 사람들은 전혀 인정하려고 하지 않죠,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나쁘다는 뜻으로 제가 드린 게 아니라, 그러한 삶의 패턴에 기울어져 있는 거죠.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판단에 떨어지고 말았고, 그래서 예컨대 십계명은 대체로 망각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 물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이 무조건 다 명제로서, 절대 명제로서 옳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바꿀 건 바꿔야 되겠죠.
그러나 무조건 배척하고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판단만 앞으로 드러나는 삶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파탄으로 대접받는 아이들은, 아동 정신과 의사 미카엘 빈또 호프의 표현에 따르면, 작은 폭군들이 될 수 있다. 예, 아이들이 이제 왕, 왕 하면 되는 거예요.
마음대로 하는 거죠. 어른들은 뭐든지 해도 돼라는 태도로, 나쁜 본을 보인다. 자기 아이들이 식당에 가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더라도 말리지 않는 일들이 좀 있잖아요.
정치에서는 노골적 권력욕이 걸핏하면 정치인의 적극적 성품으로 칭찬받는다. 그래서 팬덤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의 인간의 욕구를 막 자극하는 방식으로, 그 자기 권력욕을 드러내면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는 거죠. 트럼프 같은 사람이 대표적입니다.
금융, 경제와 실물 경제에서는 탐욕적 이윤 추구, 과대 망상, 부패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할 정도로 만연해 있다. 여러 대중매체에서는 표적인 성기 노출이 선전되고, 성적 도착이 아예 통상적인 상품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런가요? 나는 요란하게 한탄하고 하지 않으며, 비분 강개하여 도덕 설교를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확언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참으로 훌륭한 삶을 널리 권장하고, 특히 젊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때를 놓치지 않고 의무, 책임을 강조하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다.
여러 출판물이 알려주듯이 나름대로 의미를 모색하고 있는 많은 심리학자와 정신요법 의사들의 구술처럼 유익한 구술은 글자 그대로 별로 인기가 없는 거죠. 그들은 종종 이렇게 충고한다. 온갖 학문적, 정치적, 종교적 상대화와 혁명에 직면하여, 그래서 이를 한스 큉을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은 로마 가톨릭의 그 정통주의 보수주의에 한 거다가 교수직을 박탈당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학생 운동에 대해서도 무조건 지지하지는 않으나, 상당히 열린 태도로 받아들인 사람이에요. 갈수록 명백해지는 의미 공백에 직면하여, 너는 의미를 너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 수양을 알아, 너의 잠재 능력을 모두 길러내라, 스스로 너희 목적과 도덕을 개발하라. 내 삶의 의미를 창출하라, 내가 의미 있다고 여기는 것을 스스로 규정하다, 그리고 어떤 원칙들에. 따라 살고자 하는지 결정하라.
요컨대, 나 역시 너 자신을 실현하라고 충고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인가? 자기 실현, 너 자신을 긍정해야 돼. 자기 긍정 철학도 지금 그렇게 많이 옆에서 붙이고 있어요. 너를 긍정하고, 네, 너 자신을 찾아야 된다, 그 말이죠.
이게 우리 삶의 의미인가? 나는 반문한다. 자기 실현이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는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정말로 마련해 주나? 아니라는 거죠. 자기 실현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크지 않거든요.
특히 심리학자와 정신요법 의사들이 중요하게 여기기는 거, 즉 개인의 정체성, 통합된 인격, 심각한 위기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통일성과 안정성의 감정을 과연 자기 실현이 제공해 주는가. 내면에 삶에 대한 큰 긍정, 삶에 대한 신뢰, 기쁨, 여기서 열거된 정체성, 통합된 인격 이런 것들을 자기 실현이 제공해 주는가? 그 속되게 표현해, 그냥 거칠게 표현해서 연봉 1억원을 받을 수 있는 정도로 자기를 성취했다고 해서 자기의 통합적 인격성이 확보되니 하는 거죠.
여기까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