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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기, 충만한 ‘의로움의 열매’, 빌 1:3-11, 대림절 2주, 2024년 12월 8일,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다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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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기, 충만한 ‘의로움의 열매’, 빌 1:3-11, 대림절 2주, 2024년 12월 8일,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다샘교회)
녹취입니다.
바울이 예수님 생전에 일면식도 없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고, 부활한 예수를 경험했단 말이에요. 아마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생략됐을 거예요.
그 사도행전에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 그리고 만나고 아라비아 쪽에 가서 3년여 지냈다가 예루살렘에 가서 예수님의 동생을 비롯한 몇몇 지도자들을 만났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거칠게 표현되어 있어요.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다 모릅니다. 부활의 주님을 그는 아무 예수 믿는 사람들 했다고 하는데, 그거는 사도행전에 나오고 자기가 하는 갈라디아 등등 이렇게 나와요.
근데 왜 그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 당시에는 교회도 아니죠, 나사렛 예수가 다시 오신다는 그 재림 신앙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박해했는지, 거기에 많은 어떤 사연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도대체 뭘 얘기하려고 하는지, 바울이 충분히 공부했을 거예요. 여기저기 말도 듣고, 근데 그러다가 자기 영혼이 점점 흔들리고, 그러다가 어떤 결정적인 특별한 경험을 한 것 같아요.
그게 이제 부활 주님을 색으로 가다가 만났다는 이야기로 자리를 잡은 거예요. 근데 그게 어떤 사실적인 묘사라고, 어떤 특별한 종교 경험을 그 방식으로 설명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렇게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부활의 주님을 승천했다고 우리가 잘 알고 있잖아요.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그건 말이 안 되죠. 그리고 바울과 같은 그런 부활 경험들이 이후로 계속된 것은 또 아니고요.
이러한 것들은 아주 궁극적인 어떤 경험들이 몇몇 문장, 어떤 자료 이런 것만 갖고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듭니다. 어쨌든 이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그 바울은 예수님의 사건을 교리화한 거예요. 신학화한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원 경험, 그걸 얘기했다고 한다면, 바울은 그 원 경험이 어떤 의미냐, 체계적으로 설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을 가르쳐서 이제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라고 하는데요.
다음 주에 제 설교하게 될 주제가 세례 요한과 헤롯 왕입니다. 세례 요한 이야기가 왜 복음서에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그래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뭐 그 분이 특별한 역할을 하긴 한 것 같은데, 예수님과 어떤 관계인지 이것도 아주 객관적으로 찾을 수는 없어요. 근데 분명한 사실은 두 가지만 얘기할게요.
간단하게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 출가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세례 요한이었다 이렇게 봐야 됩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어요. 뭐 친족 간이라도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건 분명한 것 같아요.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이렇게 표현해서 좀 적당할지 모르지만, 아주 그 도반, 아주 그 하나님의 길에서 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사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상당한 정도로 많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 의식이 교회에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일반 신자들이 알고 있는 것은 피상적인 겁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연구할 게 많죠.
수년 동안 신학이 연구됐고, 신학도 여러 분가가 있어요. 뭐부터 시작해서, 초대 그리스도교에 있었던 일들, 또 신조들을 아, 그것이 쭉 내려왔어요. 그런 것들에 대한 연구, 뭐 조직 신학이나 성서 신학 이런 것은 기본적인 거고, 굉장히 많습니다.
일반 신자들이 그런 것까지 다 알 필요는 없고, 하나 알면 좋고요. 교회 지도자들이나 설교할 사람들은 깊이 알아야 되겠죠. 설교 앞부분에서 하나님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종교적 감정만 가득하다면, 그게 제 기독교 신앙이 잘못되는 현상이다,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 두 개가 구하겠어요. 보통 교회에서 믿음 신자들, 뭐 기도를 많이 하신다고 인정받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제가 다 모조리 따져봐서 비판하는 건 아니에요. 상당한 경우에는 자기의 종교적 흥미, 관심, 열망에 한정되 있습니다.
그래, 내가 교회를 위해서 뭐 했지? 뭐 헌금 시작해서, 뭐 교회 청소와 주일학교와 성가대와, 그 열정적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부어서 교회에 애를 쓴 것에 만족하는 거예요. 그게 흡족한 거야, "아, 내가 이러니까 칭찬받을 만하지" 요런 데는 겁니다. 근데 그걸로 이제 기독교 신앙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뭐 그런 사람들도 다 교회는 필요하긴 하죠.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그냥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제가 주변에서 보건데 평생 동안 교회 봉사하고 중직을 맡고 했던 사람들의 나이 들어서 신앙 생활을 보면, 기독교 영성과는 거리가 멀어요. 예, 그 아주 세속이 그 모양만 도적입니다.
그게 왜 문제인지를 잘 몰라요. 교회에서 인정받는 거, 오래 동안 교회 다녔으니까, 아 뭐 우리 장로님, 권사님 누구누구 뭐 해서, 또 인격적이고 그러면 다 교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잖아요. 그건 제가 나쁘다는 뜻에서 하는 게 아닙니다.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제게 죽음에 대해서도 직면하지 않아요. 정말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어 그리고 꽃 한 송이, 모든 하나님의 창조의 세밀한 것들을 눈여겨보지 않아요. 자기 종교적 열망 안에 갇히는 것, 요게 이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설교 중간중간 가서 재림 신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부록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말씀드렸어요. 실제로 여러분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아, 예수님이 진짜로 오시나, 다시 오시나, 구름 타고 오시나, 성경이 표현한 대로요?" 그리고 우리가 휴고 받는 거 맞나, 이런 거 말이죠.
그걸 이해하기가 좀 쉽진 않죠. 않아요. 초기 그리스도교는 예수께서 금방 온다고 생각했어요.
자기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그래서 사도행전 앞부분에 보면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가져왔고, 그것을 교회 공동소유로 사용했다는 거 아닙니까? 원시 형태의 공산주의에 사적인 거 필요 없어요. 금방 예수님 오시는데요. 근데 재림이 지연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는 교회 체계도 세워야 되고, 그 공동체가 유지되는 어떤 것들이 필요했던 거죠. 그래서 그에 대해서 신학에서도 많은 고민을 하고 여러 가지 설명을 하긴 했습니다. 그건 추해서 얘기하면 이런 거예요.
그 재림 신앙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이거예요. 지금 우리의 삶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정적이라는 거예요. 이게 언젠가 완성된다, 그 완성되는 때를 종말이라고 얘기하고, 그때 예수께서 오신다는 거야.
하늘에서 이렇게 온다고 하는데, 그 하늘이라는 건 어느 공간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생명이 은폐된 곳이거든요. 아직 생명도 잠정적인 거예요. 동성애 문제로 제가 이것저것 서로 옥신각신 할 때, 제가 어느 자리인지 글을 썼는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얘기를 했어요.
지금 현재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아기 낳고 손잡고 사는 것도 이게 결정된 게 아니다, 여태까지 이런 방식으로 종족 보존하고 이렇게 살아온 거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다른 게 될 수도 있어요. 아직까지는 이게 우리는 원칙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분명히 그렇게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한 가정을 이루고, 이게 창조의 원리라고 얘기하지 않냐, 그렇게 아마 말하는 사람들 있을 겁니다. 성은 그렇고 모든 성서 이야기는 그 당시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겁니다. 그걸 뛰어넘지 않아요.
그 세계가, 잘못된 거면 이제 우리가 그 세계관을 받아들이면 안 되죠. 근데 그 세계관을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뭐냐, 그걸 붙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계는 창조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 시점에 시작된 거예요. 그러니까 언제 완성되는 거죠? 재림 신앙은 현재 우리의 생명의 이런,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것들이 정적이라고 하는 거, 정성이라고 그래요. 신학에서도 중요한입니다.
철학에서도 그럴 거예요. 잠정성, 물리학적인 용어로 바꾸면 불확정성이에요. 이 물질 마저도 확정된 게 아닌 거예요.
그 깊이로 들어가면 너무 신비로워서, 없는 그런 겁니다. 근데 그런 것들은 다 묻어두고, 그 뭐예요,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생각하듯이, 언제 그랬어? 1990년가요? 다미 성교회, 들어보셨죠? 다미 성교회. 예, 교회 다니신 분들 알 거요.
몇 날 며칠, 10월 며칠 날 온다, 뭐 이렇게 해갖고 한바탕 소란스러웠고, 상당한 세력을 형성해서 실제로 그만두고 학교 그만두고 그 집회에 가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이 잠정적인 세계가 창조의...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그 관점을 붙드는 게 이제 재림 신앙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마찬가지인데, 기독교 교리 있잖아요? 교리, 교리는 어떤 내용이 있는 거예요? 그 개념을 이해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 없이 그냥 문제적으로 교리만 달달 외워서는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거죠. 잠정적이다, 이걸 불안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다행인 거지, 이런 게 생명의 완성이라고 하면 얼마나 허무해요? 우리 스스로도 실수도 많이 하고, 완전한 자유와 평화도 느끼지도 못하고, 뭐 똑같은 것들이 반복되고, 오, 한 해도 벌써 다 같잖아요. 한 달도 안 남겠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물론 나름대로 의미가 있죠. 그러나 이것이 모든 거라면, 이게 완성된 거라고 하면, 그럼 더 이상 뭐 다른 말 할 건 없죠.
기독교는 이걸 잠정적인 생명으로 생각한다, 이 무의미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완성을 향해서 가는 중인 겁니다. 그때를 기다리는 거죠. 저도 개인적으로는 죽음에 되겠죠, 그때로 기다립니다.
그게 한 가지고, 또 하나는, 그게 이미 여기서 발생했다는 겁니다. 제가 그 교회 있을 때마다 반복한 얘기예요. 이미 선취가 있었다.
그런데 은폐의 방식으로 잠정성, 은폐성 두 개념을 이해해 주십시오. 잠정성, 은폐성, 이게 별 다른 신학, 다른 신앙에도 그렇지만요, 재림 신앙에서 핵심입니다. 이게 이제 기독교, 교리 이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이 세계 자체가 그런 거예요.
잠정적이고, 그리고 은폐되어 있는 거예요. 그 얼마나 아득한지 아시겠죠? 얼마나 깊이 은폐돼 있는지. 물약도 그렇고, 이 세계 전체도 그렇고.
그래서 제가 몇 번 소개한 그 책,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책 "세상은 왜 존재하지 않는가" 그런 책이 그걸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부분부분 알고 있는 그 세계에는 맞는 거예요. 꽃이 있어요, 우리가 예쁘게 생각을 해요.
그러나 이것만이 세계는 아닌 거예요. 그리고 이 꽃을 본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내가 코를 거렸으니까, 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할 거고, 어떤 사람은 향기를 맡을 거고, 어떤 사람은 이걸 보면서 옛날 첫 사랑을 생각할 거고, 아니면 이게 값이 얼마나 될까, 먹으러 생각할 거고, 각각 다 그 경험이 다른 거예요. 그 세계가 다른 거예요.
꽃 장사, 이게 돈이 얼마 된다, 그거만 갖고서 이게 바로 꽃을 보는 유일한 길이다 생각하면 그건 어리석은 거죠. 마르쿠스 가브리엘이라는 말이 그 세계를 자연과학, 현대 21세기는 완전히 자연과학적 세계관에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있는데, 그는 세계를 보는 하나의 방식이다 하는 겁니다. 그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이 사람이 젊은 철학자로서 이걸 안에 새로운 철학 사조로 얘기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 인정을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제 신앙은 이게 담미 선교회, 언제 몇 날 몇 시에 하늘에서 내려오고, 실제 우리가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걸 얘기하는 게 아니다는 생명의 잠정성을 뚫어본 사람들의 그 메시아적 희망이 희망이고, 또 이 세계의 은폐성을 들어본 사람들의 신앙 고백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네, 부유세 그 얘기했습니다. 저는 뭐 부유세 찬성하고, 지금 그게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좀 넉넉한 사람들이 많이 세금을 내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문제를 교회하고 비교 좀 연관시키면, 한국 교회가 철저하게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물들어 있어서 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제가 내년부터, 내년 초부터 대구선수 아카데미 사이트 메일 묵상란에 '교회 구원'이라는 그 글을 쓴다고 했어요. 1년 동안 제가 쓰고, 그걸 무가사 책으로 낼 계획입니다. 그때 이런 얘기도 들어가겠죠.
신학 교리 뭐 이런 쪽이라, 그보다 아주 실질적인 그런 문제를 신학적 바탕을 놓고 한번 써볼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12월 한 달 동안은 그 자료들을 조금 더 모으고 있어요. 자본주의보다 더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에 떨어진 한국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50개를 뽑으면 그 중에 우리나라에 몇 개가 있겠어요? 과반을 수성이 됩니다. 그렇게 부자 교회인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교회 꼽으라고 한다면 또 우리나라에도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얘기하기를 3분의 1이 미자립이라고 합니다.
미자립이라고 하는 건 그 담임 목사의 생활비와, 그리고 교회 살림살이 이거를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그런 교회를 얘기합니다. 좀 더 수를 정확하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 우리나라 살아가는 그런 기준에 따르면 한 5천, 6천만 원 정도 교회 재정이 되지 않으면 그건 미자립 교회인 거예요. 근데 미자립 교회가 많은데, 대형 교회는 또 너무 넘쳐나서 그걸 어떻게 주최할 줄 모르고 그렇게 됐습니다.
그 부를 걷듯이, 대형 교회 재정을 뭐 30% 아니면 20% 정도 총 차원에서 같이 모아서 그거를 미자립 교회에 지원한다면, 이 문제가 다 해결될 거예요. 내, 그 안 합니다. 왜 안 하는지 아시죠? 뭐, 이유가 한두 가지겠어요.
네, 좋은 쪽으로 그 거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아, 젊은 목사들 좀 고생해, 우리 다 그렇게 힘들게 교회 개척해서 이렇게 그 교회 부흥 시켰는데, 그 도움 받아가지고 너희들 편하게 목회하라 그래, 그러면 안 되지, 이렇게 얘기합니다. 로마서 3장 20절, 뭐 등등에서 율법의 기능은 뭐라 그랬죠? 그죠? 죄를 깨닫게 하는 거라고, 이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은 자기의 무능력을 깨닫는 거, 율법은 완전한 걸 요구하거나 불안하거나 믿는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율법의 속성을 로마가 정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거. 저는 이게 기독교 교리는 여러분이 종교의 차원이 아니라니까요.
이거는 실제 삶을 얘기하는 거예요. 종교는 삶을 얘기하는 거예요. 직결돼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세요. 뭐, 연봉 5천만 원 받던 사람이 1억 받게 되었다, 좋죠. 좋은데, 기도하고 뭐 등등 할 수 있죠.
근데 그게 별게 없는 거예요. 그걸로 만족이 안 되는 거예요. 계속 내가 왜 이렇게 아쉽지, 뭐 말로는 아쉽지 않다고 말하지만, 속에는 계속 그게 작동하게 됩니다.
그게 죄, 율법은 가장 모범적이고, 다른 중산층, 부르주아와 그 모범적인 그런 가정을 꾸리고, 그런 인간이 되는 그 목표이 율법적인 거거든요. 그게요, 거기서 만족이 안 되는 겁니다. 만족할 수가 없어요.
그걸 부러워하지 말아야 돼, 일단. 근데 이게 좀 잘 안 되죠. 그런데 그게 부러워하지 않고 산다는 게, 이게 쉽지 않은데, 음,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음, 수도원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 너무 단순하지, 재미 없을 것 같잖아요. 그래도 그들은 만족합니다. 그렇게 사는 데는 많은 게 필요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게 뭔지를 뚫어본다면, 그럼 이제 영혼의 자유, 평화, 희열, 희망, 그 호기심, 좋은 뜻으로 알고 싶은 마음들, 그런 열정들이 가득 차게 되잖아요. 칭의가 죄로부터 해방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아, 그건 뭐 제가 오늘만 얘기한 게 아니라 뭐 늘 입에 달고 사는 겁니다.
제가 지금 하는 얘기, 많이 들었던 거죠. 여러 번 여러 번 들었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여러분 들었는데 왜 나는 이렇게 새롭지? 나한테는, 야, 이거 정말 중요한데, 이거 나는 새롭다고 느끼는데 그렇게 생각이 돼요.
근데 그게 쪽도 맞아요. 여러분들, 아, 저가 지난번에도 종목서 한 얘긴데 하는데 맞아요. 근데 저 얘기도 맞아요.
미세한 차이가 있는 겁니다. 거기에 피아노나 바이올린이나 하여튼 음악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아주, 그게 인상기,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몰라요.
그분 대가죠. 그분이 피아노, 건반 하나 이렇게 누르잖아요. 이게 누르는 것에 깊이가 있다는 거야.
이 터치되는 거, 느낌에 따라서 소리가 다른 거예요. 건반 해봐야 뭐, 2cm 되나 3cm 되나, 그 정도 깊은데, 깊이를 예민하게 느끼면서 연주하는 사람이 있고, 그냥 악보대로 그냥 치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아, 제가 여러분들에게 똑같이 들리는 말을 하는 것 같지 모르지만, 이제 말할 때는 이게 새로운 거예요.
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죄로부터 해방, 다른 거, 여러분들이 잘 기억 안 해도, 이거 하나만 꼭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다른 건 다 해결돼요. 근데 죄, 죄는 이제 자기연이라고 제가 누를 얘기하잖아요.
자기에게 매달리지만 않는다면, 그러면 삶에 풍요롭게 누를 수 있다는 그런 가르침인 거예요. 근데 어떻게 자기에게 매달리지 않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구하다.
그 십자가에 죽었으나, 그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경험했던, 바로 그분과 함께, 그분을 향해서, 자기의 연민, 자기 집중, 자기 사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하는, 이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거예요. 근데 이게 잘... 안 돼요, 왜 그러냐, 뭐 어쩔 수 없어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반대니까, 계속 너에게 집중하라고 하는데, 맨날 그 소리 듣고, 세계가 그렇게 돌아가는 방식에서 우리가 거의 21시간 중에서 10시간은 계속 그렇게 살고 하고, 뭐 tvN 모든 것들도 다 되게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기독교의 복음이 말하는 세계로, 그 수영 선수가 무로 풍덩 들어가듯이 들어가기가 좀 어려운 겁니다. 네,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해요. 이제 공부해야죠.
기독교를 공부하는 게 최선입니다. 윤성 대통령의 비상 개엄 간 설교 시간 했습니다. 뭐, 저 더 얘기하진 않겠어요.
어떤 한 개인에 따라서 한 국가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거는 참 불행한 일이에요. 이 대통령제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럼 내가 책임지면 다 괜찮냐? 그것도 또, 남북이 대립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은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이것도 앞에서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잠정적인 거예요.
정치 제도도 뭐, 왕정으로 시작해서, 영주 봉건제에서 지금까지 오고 있지 않습니까? 민주 정부가 이게 절대적인 게 아니에요. 사실은 현재까지는 우리가 찾은 방법 중에서는 그래도 최선이다, 예, 그 얘기하는 거죠. 선거라고 하는 것도 공화제를 선거하는 데 우리가 똑바로 선거합니까? 선동당하고, 뭐 이렇게 저렇게 여론에 휩쓸리고, 특히 요즘은 그 유튜브, 그 아주 잘 나가는 유튜버들이, 뭐 100만 이상씩 회원들을 확보해서 하는데,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점점 민주주의가, 내가 보기엔 힘들어질 것 같아요, 이 인터넷 시대, SNS 시대에. 그럼 뭐, 어떤 다른 뾰족한 방법이 있나? 뭐, 그것도 현재로서는 없는 것 같고, 모르겠습니다. 그거는 정치, 뭐 이런 전문가들, 학자들이 더 연구를 해야 될 텐데, 어쨌든 지금 우리는 좀 이런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여튼 12월 들어서, 지난 주간에, 이렇게 아프리카, 아주 미개한 나라 독재에서 벌어질 일, 동남아시아, 아주 불안한 여러 가지 면에서 나라에서는 벌어진 일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인가, 이제 그때 있었던 그런 일들이 이렇게 벌어지면서, 한강은 노벨 문학상을 타고, 거기서 또 맛있게 연설도 하고, 최고급의 그 한국 문화를 끌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두 가지가 어울리지가 않아요.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고 하는 게 코미디 같은 일들을 벌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이제 의로움의 열매를 맺는다고 얘기를 했는데, 숙입니다. 저희도 그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점점 멀어질 거예요. 여러분들도 그냥 교회 생활에만 매달리게 될 겁니다.
아, 이걸 극복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총회나 뭐, 노회나 이런 데 정치, 교회 정치 이런 걸 다루는 분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은 여러분들 없다 봐야 됩니다. 교회를 조직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거할 때, 총장, 신학대 총장 선거할 때도 그렇고, 그 일반 교단의 총회장 할 때 수십 억 원씩 돈을 씁니다. 믿어지지가 않는데, 어쨌든 그런다 그래요. 믿을 만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전해드린 이야기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로움의 열매를 맺는다는 그 기본을 붙들고 나간다면, 우리 뭐 합동, 뭐 통합 장로의 총장 하시라 그러면 안 한다, 그래야 되는 그게 맞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잖아요? 그 목사가 뭐 하라 그걸 합니까? 예배 인도하고 설교하기도 바쁜데, 총장도 마찬가지고, 대학 총장을 왜 합니까? 연구하기도 바쁜데, 뭐 제 흥분해서 말할 것도 없고, 그 근본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붙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 이 생각을 놓지 말아야 될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까지 우리가 돌파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 있을 때 수행하듯이 기독교 영성을 붙들어야 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