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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일 밤 8-9시에 강독한 강의안은 아래와 같다.
16강
믿음에 관해서
우리는 14강 “칭의와 성화에 관해서”에서 솔라 피데에 근거해서 기독교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칭의와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할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 이미 검토했다. 그 논의의 핵심은 인간의 존재론적 변화인 칭의가 단지 믿음으로만 획득되는 것인지 아니면 행위도 여전히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내린 잠정적인 대답은 믿음으로만 칭의를 얻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행위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대립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호 보충적이지도 않다. 이런 관계를 우리는 나무와 열매에 대한 예수의 비유에서 배울 수 있듯이 인간의 의로움이라는 사태 자체가 법적인 차원과 실제적인 차원으로 구분되기 때문에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 다시 한번 더 정리한다면, 칭의 사건에서 믿음 이외에 행위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칭의를 얻은 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행위가 당연히 따른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질문
이제 우리는 칭의의 토대인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가능하게 하는 그 믿음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우리의 능력인지, 아니면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은총인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그 믿음이 우리의 지성에 대립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 여기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믿기만 하면 모든 게 가능하다는 신앙 만능주의가 팽배한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이런 질문은 매우 시급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구원의 ‘확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구원의 확신만을 강조하게 될 때 몇 가지 문제가 파생된다. 우선 이 주관적인 확신은 얼마든지 인간의 심리적 작용으로도 강화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는 전혀 믿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그쪽으로 밀고 나감으로써 믿고 있는 것처럼 과장하는 태도가 곧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확신은 사이비 이단에 가까울수록 훨씬 중요한 요소로 강조되고 있다. 또한 구원을 확신의 차원에서 강조하면 기독교 신앙은 인격적이라기보다는 그 인격 내부에서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감정의 차원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 인간 삶에 감정이 중요하나 그것이 어떤 진리를 규정하는 힘으로 작용하면 그로 인해서 진리가 왜곡될 위험성은 매우 크다.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 확신에 떨어지는 이유를 살피는 게 이 주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그 대답이다. 기독교 신앙을 이용해서 자기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어가겠다는 일종의 실용주의적이고, 도구적인 생각이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사로잡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신앙의 본질로 들어갈 필요는 없으며, 단지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만 추구하게 된다. 예컨대 기독교 신자들은 내면세계의 가장 심층적 사건이라 할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만 관심을 기울인다. 기도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 전반에 대한 이해가 교회 현장에는 결정적으로 부족하다고 보아야 한다. 교회의 단일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며, 창조와 보존 은총에 대한 이해가 없으므로 오늘의 이 소비중심의 문명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서 무오설이나 창조과학회 유의 사고방식도 모두 기독교와 성서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결과들이다. 1958/59년도 겨울학기 쮜리히 대학교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강좌에서 게르하르트 에벨링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순수하고 솔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큰 기대를 하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한 적이 있다.
여하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순수하고 솔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그것에 큰 기대를 걸고 묻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더구나 기독교에 익숙한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기대하기는 더욱 힘든 일이다. 사실 나 자신도 이 강의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기대대로 철저히 캐묻고 겸해서 다른 문제까지 솔직하게 물어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여하간 질문하는 우리는 잘못된 자명성을 한사코 고집하는 세찬 세력의 저항을 경험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따지면서 실제로 우리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면 하는 기대도 세찬 저항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움직이는 그 무엇, 적어도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이해를 우리에게 기대하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떤 섬광 같은 불가항력의 것을 의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이 복잡한 시대에서 기독교 신앙이해에 필요한 새롭고 실제적인 모든 동기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서두에서 이미 우리 물음의 모험적 성격을 말한 바 있지만, 그것은 우리 물음의 필연성을 강조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갖춘 사람이라면, 결코 오늘 긴급하게 등장하고 있는 이해의 문제를 못 본 척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신앙의 본질, 12)
둘째, 기독교 신자들은 다른 주제에서도 그렇지만 ‘신앙’ 문제를 생각할 때도 그것 자체의 담론으로 들어가기보다는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는지만을 기준으로 삼는다. 설교도 역시 비슷한 구조로 진행된다. 그러다 보니 성서 텍스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청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설교 패턴이 반복됨으로써 결국 무엇을 설교해야 할는지 전혀 방향을 잡지 못하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물론 우리의 신학 논의에서 목회적 실효성을 우리가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그것과 상관없이 신학적인 판단을 가능한 정확하게 내린 다음에 목회적 실효성을 생각하는 게 바른 순서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신학적 반성을 통해서 이제 성서 읽기의 깊은 영성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신앙에 관한 예비적 고찰
(이 대목은 주로 푈만의 <교의학>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정리된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믿음
구약성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보다는 순종을 훨씬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이주했던 아브라함의 태도에도 역시 순종이 기초하고 있으며, 사무엘이 사울 왕을 책망할 때 내세운 논리도 역시 순종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이 믿음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크게 보면 순종 역시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행동이다. 구약성서에서의 믿음은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사 7:9)는 이사야의 호소처럼 끈기 있게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믿음은 “야훼의 행동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응답”이다. 그런데 신약성서에는 믿음이 구약에 비해서 훨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신앙은 신뢰이며, 신앙의 내용을 인정하고 확신하고, 동시에 통찰하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의 저자들과 예수에게는 신뢰적 의미의 신앙이 내용적 신앙보다 전면으로 등장하지만, 요한에게서는 신뢰와 함께 ‘인식’도 신앙의 매우 중요한 구성요인이 된다. 신뢰와 인식이 늘 구별되지는 않지만,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서로 강조점의 차이만 보이지만 이 두 요소가 복음서에서 믿음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바울에게서 신앙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갈 2:16, 롬 3:22)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고전 1:9)이다. 물론 바울도 신앙의 내용을 소홀하게 다루는 건 아니다. 신앙은 어떤 것이 어떻다는 사실을 믿는 것, 즉 어떤 사실을 믿는 것이다.(살전 4:14, 롬 10:9). 그뿐만 아니라 바울에게는 이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그가 신앙의 성숙을(갈 4:1,2, 고전 3:1,2, 13:11)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말이다.
중세기 신학이 말하는 믿음
여기서는 이제 신뢰하는 신앙으로부터 교회의 권위를 믿게 하는 ‘인정’의 신앙으로 그 중심이 옮겼다. 어거스틴도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는 신앙을 주장하였고, 안셀름도 어거스틴을 따라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고대와 중세가 교회의 권위에 따르는 믿음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교회의 권위를 의심하고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아벨라르드)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교회의 권위를 따랐다고 보아야 한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그것을 완성한다.”는 말에 볼 수 있듯이 아퀴나스는 믿음과 이성의 종합을 꾀했으며, 루터는 그것의 대립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루터도 역시 이성이 그 한계를 넘어갈 때만 철학과 이성을 비판했지 무조건적으로 비판한 것은 아니다.
정통주의
이 믿음이 정통주의는 다음과 같은 세 단계의 신앙을 주장했다. 이 내용은 멜랑히톤의 <기독교 개요>(Loci, 1559)에서 정리된 것이다.
ㄱ. notitia(지식) - credere Deum(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
ㄴ. assensus(인정) - credere Deo(하나님을 믿는 것)
ㄷ. fiducia(신뢰) - credere in Deum(하나님을 기대어 신앙하는 것)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지식) 인정할 수는 없으며(인정),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면서(인정) 신뢰할 수는 없다.(신뢰), 이는 곧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것은(신뢰) 그분에게 순종하는 것(인정)을 전제하고, 그분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그분을 경청하는 것(지식)을 전제한다. 이런 점에서 정통주의는 지식의 단계에 비중을 둔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을 교회의 권위에 의지해서 믿는 그러한 몽롱한 ‘함축적 신앙 혹은 맹신’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신뢰(fiducia)라고 하는 세 번째 단계의 신앙으로서, 이 신뢰를 통하여 개개인은 구원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신(新)개신교주의
여기서는 신앙이 특수한 신앙과 주관적 신앙으로 이해되고, 감정과 내면적 영역으로 축소되었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신앙을 지식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헤겔에게는 “종교와 철학은 하나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철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곧 신학이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서 이성과 신앙의 대립은 해체되었다. 쉴라이에르마허에게서 감정의 영역으로 축소되었던 신앙의 문제가 이제는 철학이 시도하고 있는 절대정신의 세계로 지양된 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이성은 일반 이성이고 인간 속에 있는 신적인 것이다. 그리고 정신은 그것이 하나님의 정신인 한에서 별들과 세상 저 너머에 있는 정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정신(Geist)으로서 이 세상의 정신들과 영들 속에 현존하고 있다.” 이 신개신교주의에도 여러 갈래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신앙과 이성이 가능한대로 조화를 이루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는 위에서 신앙의 문제를 교리사적인 차원에서 성서로부터 19세기의 자유주의신학에 이르기까지 개괄적으로 검토하였다. 믿음은 주관적인 결단과 객관적인 판단이 서로 맞물려 있다. 주관적인 결단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객관적인 판단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을만한 대상으로 신뢰할 수 있다. 이 두 요소가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주관적인 쪽으로 기울 수도 있고, 객관적인 영역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다. 이 믿음의 문제에서 또 하나 중요한 관점은 이성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이다. 이미 주관적 결단과 객관적 판단에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지만, 결국 여기서 이성은 우리의 믿음이 어떤 타당성을 얻을 수 있는 토대로 작용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믿음의 토대로 간주되는 신학과 이성의 작용으로 간주되는 철학의 관계를 좀 더 정확하게 검토함으로써 역사의 기독교가 이 믿음 문제를 어떻게 인식해왔는지 살펴보자.
산을 옮기는 믿음
위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에 나타난 믿음이 단순히 인간의 ‘믿는다’라는 주관적 사실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믿고 있는 그 대상에 대한 이해와 긴밀히 연결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현실에서는 여전히 신앙의 이해 부분이 거의 무시되고 있다. 아마 여기에는 간질병 소년을 고치신 예수가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오늘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간주되기 때문일 것이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 17:20). 오늘 우리는 이 구절을 주석할 생각은 없다. 이 구절을 거의 문자의 차원에서만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그런 신앙적 태도가 과연 성서적으로 옳은가 아닌가 하는 점은 좀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만약 이 구절이 오늘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듯이 일종의 신앙 만능주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지 않았을 것이다.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고전 13:2). 아마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라는 표현은 그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어떤 사태를 강조하기 위해서 관례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수는 이런 관용어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갖고 있어야 할 삶의 태도를 가르치신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그 믿음을 상대화하는 바울의 진술도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이 세상의 이치를 정직하게 들여다본다면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예수에 대한 신앙 여부에 상관없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믿음을 통해서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이런 신앙*이 한국교회 안에 자리하게 된 이유는 근본적으로는 성서와 신학에 대한 이해가 매우 취약하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강일상 목사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라는 구절이 한국교회 안에서 크게 곡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통탄한 적이 있다. “아마 한국교회 교인 중에서 이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기억할 때마다 한국교회에서 이른바 성공적인 목회를 했다고 하는 일부 목사들을 떠올리며, 나도 그렇게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YES, I CAN!’이라는 스티커를 자동차 유리창에 붙이고 성공 가도를 질주하는 사람들도 허다할 것이다. 과연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신 이 말씀이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식으로 설교 되어도 좋은 것일까? <중략> 성서 자체의 해석도 중요하지만, 그 해석을 통해서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는 일도 신학 하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등한히 여겨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기상, 2005년 10월, 146)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런 신앙적 정서를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아마 ‘반(反)지성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에도 이런 반지성주의는 수도 없이 많았다.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은 이에 대한 아주 두드러진 사건들이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타종교를 말살하려고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마 그들에게도 모슬렘들에게 빼앗긴 기독교 성지를 되찾자는 명분이 있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명분에는 단지 종교적인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인 것이 훨씬 강하게 작용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도 현대판 십자군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벌어졌던 종교재판도 형식적으로는 신학적인 것 같지만 결국은 반지성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세계 기독교 역사에는 진리에 관한 탐구와 순전한 선교적 열정에 못지않게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박해의 흔적도 많다. 수많은 물리학자, 천문학자, 인문학자, 신학자, 또는 집시들이 종교재판을 받고, 때에 따라서는 화형에 처했다.
이런 반(反)지성주의는 우리의 일상적 신앙생활에서도 역시 교묘하게 작용함으로써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믿음은 무조건적이라는 주장이 전가의 보도처럼 행사된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사태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이해의 관계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옳으니 그르니 너무 따지지 말고 믿어야 돼!” 이런 말을 우리는 귀가 따갑도록 듣는다. 교회의 주류가 그런 쪽에 있으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이해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믿음이 중요하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 물론 믿음은 아주 독특한 삶의 결단이고 체험이며, 모든 사물이나 이론들은 결국 믿음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원칙적인 점에서 이 말은 옳다. 그러나 문제는 믿음 일방주의가 우리의 지성적 활동을 불신앙적인 것으로 몰아간다는 데에 있다. 큰 병에 걸린 사람을 병원에 데리고 갈 생각은 않고, 안수 기도로 치료하겠다고 하면 이게 어디 정상적인 신앙이겠는가. 경기도 포천에 있는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정통교회에서도 이런 일에 관심이 많다는 걸 보면 한국교회의 반지성적이고, 신앙 만능주의적인 성격을 알 수 있다.
지성을 넘어서
물론 근대주의의 그 지성이 세계사를 질곡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그런 지성을 경계해야 할 필요도 있다. “아는 것은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경구는 이미 그 천박한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낸 바 있다. 그런 지성의 축적으로 이룩한 현대의 삶이 비록 외양으로는 풍요를 구가하지만 그 질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궁핍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성은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어떤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성의 양면을 보아야 한다. 한 면은 말 그대로 우리에게 어떤 사실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일종의 계몽 역할이, 신앙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역할이 기대된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사람보다는 대학을 나온 사람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좀 더 많이 알 수 있다. 교회에서도 보면 지성을 갖춘 사람과는 최소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 면은 지식 자체만으로는 궁극적인 가치를 생산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참으로 까다로운 문제인 것 같다. 이렇게 설명해보자. 인간은 지성을 통해서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수학의 함수관계나 기업의 메커니즘이나 법의 운용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머리가 좋은 사람은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고, 사법고시에 합격할 수도 있다. 이런 능력은 지성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지적인 수준이 높을 수 있다면 나쁠 건 없지만, 그 지성은 그것만으로 끝이지 좀 더 가치 있는 차원으로 올라가지는 못한다. 예컨대 우리의 현대사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유신헌법’을 만든 사람은 그 당시에 가장 지성적인 집단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법의 원리만 알았지 그것이 어떻게 인간을 위한 것으로 사용되어야 하는지는 눈을 감았다. 또는 알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유신헌법을 만들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지성이 늘 이렇게 불의하게 사용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무엇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 답은 이성이다. 지성과 이성을 이렇게 구분해보자. 지성은 단순한 정보에 불과하지만, 이성은 그 정보를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판단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성은 단순한 앎이라고 한다면 이성은 그것의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는 앎이다. 이런 점에서 이성이 훨씬 근원적인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의학 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지성이지만 그 의술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변호사나 판사는 법에 대한 앎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반드시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의술과 법이 나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성은 있는데 이성은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성적인 사람은 비록 지성적이지 않더라도 지성적이면서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바람직하고 의미 있게 살아간다.
성서는 인간의 이성을 기독교 신앙의 실체라 할 영성과 대립시키지 않는다. 예컨대 로마서 12장1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영적인 예배라는 단어를 공동번역은 진정한 예배라고 표현하고, 루터는 ‘vernünftiger Gottesdienst’(이성적인 예배)라고 번역했다. 헬라어 성경에는 ‘로기켄 라트레이안’인데, 로기켄의 원형인 로기코스(이 형용사는 로고스라는 명사에서 왔음)라는 헬라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rational, 다른 하나는 spiritual이다. 개역성경은 로기코스를 영적인 것으로, 루터는 이성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진정한’이라는 뜻으로 번역한 공동번역은 그 중간의 입장이다. 아마 바울이 살던 그 시대에는 이성과 영성을 같은 것으로 본 것 같다. 오늘 우리의 눈에는 이성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당연히 달라야 하는데 헬라 사람들은, 그리고 그런 헬라 사람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바울 같은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이 두 개념을 하나로 보았다는 것이다.
오늘의 논쟁
지난 2천 년 역사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은 주관적인 부분과 객관적인 부분을 양 날개로 삼아왔다. 경우에 따라서 주관적인 신앙이 강조될 때도 있거나, 반대로 객관적인 신앙이 강조될 때도 있긴 했지만 그 밑자락에는 늘 양측 면이 변증법적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의거할 근거(Halt)이면서 동시에 내용(Inhalt)이며, 신뢰(Zuversicht)이면서 동시에 통찰(Einsicht)이고, 당신에 대한 신앙(Duglaube)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신앙(Daßglaube)”라는 푈만의 지적은 옳다.(교의학, 104)
변증법 신학에서 초기 바르트는 주로 주관적 신앙에 무게를 두었다면 후기 바르트는 신앙을 ‘앎’, ‘인지적 사건’으로 이해했다. 불트만은 권위에 의존하는 정통주의 신앙뿐만 아니라 증명에 의한 신앙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면서 주관적 신앙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에게 신앙은 늘 ‘이해’이면서도 동시에 실존적 ‘결단’이기도 하다. 그에게 신앙은 “오직 실존하는 중에서만 현실적이며, 교리를 무조건 모두 옳다고 여기는 게 아니다.” 그가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주관적 차원을 언급하지만 바르트처럼 객관적인 하나님과 그 말씀을 전제하는 게 아니라 그것과의 실존적인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와 구별된다.
에벨링은 불트만과 마찬가지로 맹목적인 신앙과 투쟁했다. “신앙은 곧장 솔직하고 학문적인 이성의 사용과 현실에 대해 열린 눈을 요구한다. 신앙은 미신과 환상의 가장 예리한 적이다.”(Das Wesen des Glaubens, 91).
판넨베르크는 실존주의 신앙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고 나선 신학자이다. 그에게 계시는 ‘간접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있는 이성의 눈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 이 말은 곧 기독교 계시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기 위해서 미리 신앙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이 사건을 편견 없이 인지함으로써 진정한 믿음이 일어난다. 따라서 그에게 기독교 신앙은 초자연적 어떤 사건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거나, 아니면 인간의 실존적 경험에 타당한 것만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보편사적인 지평에서 옳은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신앙은 근거가 있는 모험이다. “완전히 맹목적으로 믿는 자”가 가장 잘 믿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부여받은 이성 앞에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 변명하는 자가 가장 잘 믿는 자이다. 그래서 신앙의 실존적 차원인 주관적 신앙과 항상 대립적인 객관적 신앙이야말로 인간을 위한 실존적 의미를 지닌다.
결국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참된 신뢰는 신뢰하는 사람이 자신의 그 신뢰를 어디에 토대할 것인가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즉 판넨베르크에게는 하나님이 믿을만하다는 판단이 전제되어야만 거기서 참된 신앙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기독교인들에게 믿으라는 말을 반복할 게 아니라 그들이 믿어야 할 하나님에 대해서 해명하는 일에 천착해야만 한다. 예컨대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승천 사건처럼 계몽주의 이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성서의 보도를 무조건 믿으라는 말로 해결할 수는 없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진리론과 직결된다. 하나님이 실제로 참이지 않는 한 기독교 신앙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는 기독교 신앙과 참에 대한 인식이 세 차원에서 연결된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현존 세계 안에 있는 가시적인 근거가 하나의 차원이다. 인간의 신뢰는 바로 그 근거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사도신경의 두 번째 항목이 거론하고 있는 예수의 역사적 사건, 그리고 첫 항목과 연관되어 있는 창조의 세계이다.
2) 신뢰는 이러한 근거에서 신뢰가 실제로 관계된 불가시적 현실성을 기대한다. 이 불가시적 현실성은 각각의 근거에서 인식되는데, 사도신경에서는 이 문제가 바로 하나님의 현실성이며, 신적인 존엄의 정당성을 위해서 고양된 하나님 아들의 현실성이고, 교회의 삶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비밀이 가득한 심층에서 활동하는 성령의 현실성이다.
3) 신뢰는 의지할 만한 것에 대한 확신을 기대하는 것과 연관된다. 사도신경에서 이것은 죄의 용서,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영생에 해당된다.(정용섭 역, 사도신경해설, 18쪽 이하)
판넨베르크가 볼 때 이러한 세 차원에서 신뢰는 진리, 즉 의지할 만한 것에 대한 확신을 전제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다. 신뢰는 그 기초적 근거에 진리성이 없으면 존속할 수 없다는 말이다. 결국 판넨베르크에게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이 어떤 진리론적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가와 직결된 문제이다. 과연 판넨베르크가 주장하고 있는 진리론적 근거를 신학이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그 근거가 어느 정도의 보편적 설득력이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기독교 신앙이 단지 학문적 유희로 떨어질 개연성은 없는지에 관한 문제는 앞으로 더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문제가 훨씬 중요한 주제로 부각될 조짐을 보이는 21세기에 기독교 신학과 신앙이 자신의 진리론적 토대를 심화, 확대해야 한다는 요청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