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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큉(Hans Küng)의 「나는 무엇을 믿는가」(WAS ICH GLAUBE, 이종한 역, 분도출판사, 2021년)를 정용섭 목사가 강독한다. 장별 차례는 아래와 같다. 1 삶에 대한 신뢰, 2 삶의 기쁨, 3 삶의 여정, 4 삶의 의미, 5 삶의 바탕, 6 삶의 힘, 7 삶의 모델, 8 삶의 고통, 9 삶의 기술, 10 삶의 비전
지금 우리는 "삶의 의미"라는 제 4장을 강독하고 있습니다. 118쪽, 개인의 의미 문제, 가장 중요한 거죠. 뭐, 주변 세계가 어떻게 됐든지, 자기 삶의 의미를 확보하면서 사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 바로 앞에서는 학문과 경제에서도 의미 문제가 중요하다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수치, GMP가 어떻게 되고, 감가상각이 어떻고, 뭐, 주식에 이게 지금 뭐 상승세고, 하락세고, 뭐, 두루두루 그런 수치 계산이 있잖아요. 경제학자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런 것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좋아진다 나빠진다 아는 그런 방식으로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얘기했고, 왜 그런지도 설명했어요. 경제 대공황이 경제학자들이 논리적으로 따르면 오지 말아야 되거든요, 계속 그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제 개인 삶의 의미를 한스큉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내 삶 역시 조화롭고 순조롭고 갈등 없는 여정이 아니었다. 저렇게 세계적인 신학자이고,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가톨릭 신학자라도 갈등이 많았다 얘기하네요.
많은지 적은지 모르겠지만 갈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시 위기들을 우회하여 나아가는 삶의 여정이란 없다.
위기라는 말, 위기 영어로는 "크라이시스"라고 하잖아요. 독일어로도 비슷하게 발음합니다. "크리지," "크라이시스" 영어로.
독어로 "크지"라는 말은 그리스어 "크리네인"에서 유래했는데, 이거 떼어놓다, 구별한다는 뜻이에요. 어떤 힘겨운 전개 과정에 결정적 기회를 의미한다. 어떤 그 결정적으로 자기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붙들려고 할 때는 위기가 따른다, 그 말이 아니겠습니까? 대충 좋게 좋게 이런 식으로 굴러가게 되면, 뭐 위기는 없는 거죠.
나에게 중요한 다른 핵심 말들, 신뢰, 시민적 용기 등과 마찬가지로 위기라는 낱말 역시 신학, 사정과 논서에서 오랜 세월 시사되어 온 것은 기묘한 일이다. 그니까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이 너무 교리적이고 관념적이다, 그런 뜻인 것 같아요. 이는 사람들이 위기의 누적과 빈발에 관해, 아니, 근본적 위기에 관해 말할 수 있는 바로 우리의 상황과 관련하여 의미가 심하다고 하겠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여정에서 아주 개인적으로도 위기에 빠져들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질병, 이는 위기. 신앙의 위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회의론에 빠지는 거죠.
생명의 위기 등등, 그런 개인적 위기에서 사람은 무슨 위기 관리 본부 없이 스스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도움은 줄 수 있죠. 근데 결국은 자기가 해야 되죠. 사실, 모든 필생의 결은 결단은 위험 부담을 안고 있다.
경제의 전 과정과 마찬가지로, 삶의 전개 과정도 확실히 예측하고 장악할 수가 거의 없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거죠. 물론 계획대로, 로드맵대로 내 인생은 아무 위기 없이 잘 굴러갔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데 그것은 솔직한 게 아니에요. 위기가 왜 없겠어요?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해 못하거나 자기도 모르게 그냥 지나가버리거나, 아니면 적당하게 거기에 타협하면서 살아온 거죠. 여기 결정적 차제 화라고 했잖아요.
그 결정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의지가 없다면, 위기도 없는 거죠. 위험 부담은 안고 있다, 경제의 위기 과정과 마찬가지로 인간 개인 삶도 그렇다. 아무튼 사람은 가능하는 스스로 위험을 예상하고, 최상의 경우와 최악의 경우도 언제나 셈에 넣어야 한다.
한스킹이 교황청으로부터 교수직을 박탈당할 거라는 것을 상상했겠습니까? 그럼 위기가 오는 거죠. 필생의 결단들이 상황에 따라서는 취소될 수 있다. 신학 대신 경제학을 공부할 수도 있고, 또 거꾸로 할 수도 있다.
사람은 전혀 새로운 활동 분야로 갈 수 있다. 이 길을 가다가 다른 길로 또 갈 수 있는 거죠.
그런 게 이제 두렵긴 합니다. 하지만 삶의 결정들 대부분은 돌이킬 수 없다고 하겠다. 그렇죠? 목사로 살겠다고 결정하면 나중에 돌이키기가 여러 힘듭니다.
속담 하나를 여기 인용했는데, 사람은 잠자리에 들 때처럼 그렇게 누워 있게 된다. 잠자리를 들 때 그냥 그대로 간다는 겁니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서, 자기 once 결정을 내린 거를 결정했으면 그대로 가게 되지, 거기서 다시 새롭게 결단하기 힘든 거죠.
사실 어떤 사람은 저 직업이 아니라 이 직업을 위한 교육을 받았다. 그렇다고 직업 선택을 잘못했다고 평생 한탄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나는 화가가 천직이라고 생각했던 페인트공, 사제 소명을 받았다고 여겼던 법률가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지하지 않게 결정을 바꾸거나 바꾸고자 하는 것보다는, 일단 내린 결정을 견지하고 거기에서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는 것이 더 낫다. 지금 한 수위 자기 삶의 방향을 바꿔야 되나요, 계속 나가야 되나요?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어떤 청년과 상담을 하는 것처럼 그럴 수가 있어요. 아주 실질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사람은 누구나 거듭 결단에 면한다. 기독교 신앙을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까 그럴 수 있죠. 아니면 무신론자였다가 다시 기독교 신앙을 가지는 사람도 있죠.
나는 종교와 관계없는 교육을 받고 살았던 사람들을, 다른 한편 바로 그 때문에 종교를 찾아 나섰던 사람들을 알고 있다. 또한 나는 이런저런 종교나 교파에서 성장하여 자기가 어린 시절에 단순한 신앙을 고집하던 사람들을, 또 그와는 반대로 신앙의 계몽을 위해 했었던 사람들을 알고 있다. 나는 자기네 교회와 결별한 많은 가톨릭 신자를 알고 있다.
그러나 교권 제도에는 불만을 느끼지만, 이런저런 공동체에 헌신하고 있는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도 알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신앙 공동체 자체를 바꾼 가톨릭, 개신교 신자들도 알고 있다. 기뻐해야 할 사실은 이것이다. 오늘날의 세속 사회에서는 어떤 하나의 교회 권력이 우리의...
위도 상에서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거의 강요할 수 없다. 누구나 자유를 선택할 수 있고, 신앙의 위기에서는 새롭게 결정하거나 아예 무종교를 결단할 수도 있다. 이걸 왜 기뻐해야 될 사실이냐고 말하면, 뭐 아시겠죠?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유럽에서 말입니다.
어릴 때부터 가톨릭 신자로 살았던 사람이 한 200년 전에 말이에요, 그만둔다 성당을 그만 나간다. 그럼 그 동네에서 버텨낼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이제 얼마든지 새롭게 결정하거나, 심지어는 무신론자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자기가 결정하는 거예요, 선택하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고소해야 할 삶을 떠받쳐 주는 윤리를, 사람은 종교와 관련 없이도 가질 수 있다, 당연하죠. 아무튼 이 윤리가 종교의 바탕을 두었던 아니면 순전히 인본주의였든, 휴머니즘에 나왔든, 종교에서 나왔던 나는 스스로의 삶을 돌이켜보건대, 다음과 같은 사회, 즉 조사 연구의 주장을 확증할 수 있다. 윤리적으로 정향한 인간은 삶의 여정에서 핵심 주제였고, 윤리적으로 결정된 인간은 이른바 삶을 락하는 인간보다 오히려 더 행복하게 삶을 결산한다.
여기서 어쨌든 확실한 사실은 이것이다. 삶의 향락과 삶의 참 의미는 별개다. 삶의 향락과 삶의 참 의미는 별개다.
제기가 원하는 대로 많이 먹고, 좋은 거 먹고, 가고 싶은데, 마음껏 세계 여행 다니고, 다 좋은 거죠. 하여튼 뭐 좋은 거는 다 그렇게 사는 걸 우리는, 그거는 럭셔리한 삶이라고 하는데, 향락이 꼭 나쁜 뜻으로만 하는 이렇게 쓰는 얘기는 아니에요. 삶을 사치스럽게 누리는 거예요.
그러고 그거하고 의미, 삶의 참 의미, 이거는 같이 가는 게 아니다, 별개다. 그렇다면 향락적인 삶을 살면서도 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건가? 별개라고 했으니까 이게 반비례한다고 말한 게 아니라 별개라고 했잖아요. 하여튼 그걸 뭐 접어두고 나중에 좀 더 따라가도록 해 봅시다.
다음 제목은 의미 상실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죠. 121쪽이요. 나는 사람이 특정한 공경에 아이, 모든 것을 문제 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모든 게 도대체 뭐야? 아직 내 삶의 그 어떤 방향이나 의미를 부여하는 게 있을까? 물론 이것은 사람이 어떻게든 살아 나가기 위해 한참 바쁘게 일해야 하는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는 되게 배제되고 밀어내는 일이에요. 누구도 그리고 그 무엇도 어떤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캐 물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는 그 물음에 그냥 눈을 감아 버린다.
이렇게 그냥 가는 거죠, 자동적으로 그냥 앞으로 시간이 가는 거죠. 아무튼 내가 매우 존경하는 교육학 교수 하르트무트 폰 팬티히는 자신은 자기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며, 또 그것이 없다고 전혀 아쉬워하지도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런 사람들 많죠.
나의 삶 자체가 삶의 목적이다, 사는 거 자체가 목적이다. 표현했다, 특별히 의미를 찾는 게 아니라 그 사는 거다. 아주 쿨한 거죠.
그를 매우 종아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너무 피상적인 대답이 아닐까, 좀처럼 극복할 수 없는 의미 위기에 빠져 있고, 또 삶에 절망한 될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당신들은 삶 자체에서 삶의 목적을 인식해야 한다고 내가 대답해야 한다는 말인가. 성취도 좌절도 많았던 교수로서의 오랜 삶을 돌아보면, 어쨌든 그래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물론 그런 말을 그런 대로 쉽게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런대로 자기 이제 교수로서 잘 살아왔으니까요. 사실 나 역시 자신에 관해 어떤 측면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하겠다.
내 삶 자체가 삶의 의미지, 뭐 그런 대로 괜찮게 살았으니까 말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세상의 어떤 권력도 그 의미를 규정하거나 시정할 수 없음도 물론이다. 현대인들은 기독교적으로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그게 삶의 의미라고 받아들이지 않아요.
냉소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만족스러운 삶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감과, 또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삶이 목적인데, 그러면 정말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나 거죠.
또는 사람이 폰티처럼 자신의 다양한 과제들 안에서, 목적으로서의 삶보다는 수단으로서의 삶을 볼 수 있다면 더 깊이 숙고할 가닥도 없지 않은가. 아니, 사는 일은 이렇게 살기만 하면 돼, 그게 목적이야. 수단으로 생각하는 거죠.
그 뭐 이거 저것도 생각할 필요가 하나도 없는 거죠. 주로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전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의미 위기의 시대, 존경하지만 동의하지 못하는 이 학자처럼 생각하는 게 의미 위기인데, 뭐 의미 찾을 거 없어 건데요.
이런 시대의 깊은 의미, 삶의 의미를 모색한다. 슬프게도 나는 자주 경험했다. 학교 모임, 파티, 그룹, 신문, 잡지에서는 그런 언음을 즐겨 조롱하고,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얘기하는 곧 다나가 들어 나오는 쿨하게 거리를 두고 빈정대는 태도를 보인다.
냉소적인 거죠. 의미는 무의미 의미야. 인간 삶이 이렇게 재밌게 그냥 살면 되지.
그러 나는 이것도 경험했다. 어떤 사람에게 그런 의미에 대한 물음이 맞대놓고 제기되거나, 사람이 극한 상황에 내몰리면 그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극히 감정적으로 될 수 있다. 정로, 그래서 모든 게 도대체 뭔데, 의미가 뭔데 이제 따지고 드는 거죠.
뭐 때문에 이 모든 게, 뭘 위한 건데, 나는 그런 거 몰라. 물론 오늘날 젊은이들 가운데서도 경솔하고 성급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냉소주의자들이 있다. 아무튼 정치, 경제, 사회가 죄다 썩었고, 망가졌고, 미쳤어.
그럴 때 나는 종종 되묻고 싶다. 정말로 정말 모든 것이 그렇게 썩었어? 현실이 너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너 자신이 그렇게 보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사랑의 관계나 사업상 관계를, 그 관계가 잘 진행될 때와위기를 겪을 때, 각각이 달리 보지 않는가? 그리고 사람들은 예를 들어, 기업 도산이나 간통 사건을 자신의 당사자인 경우와 황색지에서 그 흥미거리 기사를 읽는 경우에 전혀 달리 느끼지 않는가?
그렇죠, 남의 이야기니까 진지하게 와닿지 않는 거죠. 어쨌든, 삶의 올바른 방향 설정을 위해 권장할 만하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전체의 의미에 관한 물음, 전체의 의의미, 지구 전체, 인류 전체,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 보편적으로 규정하자면, 우리 인간 삶의 정신적 맥락에 관한 물음을 제시하는 일이다. 조금 어려운 표현이죠.
정신적 맥락, 인간 삶의 정신적 맥락, 맥락, 컨텍스트, 맥락에 관한 말에서 질문하는 것, 우리 삶의 정신적 맥락, 음, 생명 충만감을 느낀다거나 빈곤함을 느낀다거나 희열, 깊은 희열, 절망, 이런 것들이 정순정 맥락이 아아, 이런 거, 이런 걸 이제 질문하는 거죠. 이 물음은 실존적 충격을 받기 전에, 인간 실존이 언제까지나 모면하기는 어려운 이런저런 운명적 시련을 겪기 전에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의미 상실을 저지하지 않으면, 우울증, 공격적 태도 또는 병적 중독으로 귀결될 수 있다.
예, 그렇죠, 병적으로 많이 나타납니다. 나는 수많은 사람의 의미 상실을 목도하고 있다. 의미 상실은 고상하게 나타나기도 하는 거예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뭐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지 않고, 나는 쿨하게 내 인생을 이렇게 즐기며 사는 게, 그게 의미야 하는 거죠. 그들에게는 종교적 또는 정치적 의미 체계 전체가 그들의 세계관이 이런저런 이유로 붕괴해버렸다. 이 세계 정의와 평화를 세우려고 하는 노력, 아, 이건 뭐, 아무 생각이 없는 거죠.
나는 오랜 세월 근무하던 회사나 은행에서 조치의 일자리를 잃고, 이제 자신은 전혀 쓸모 없다고 여기는 사람의 의미 상실을 유념하고 있다. 존경받는 기업인으로서 9년간 일구었던 회사를 세계 경제 위기 와중에 포기해야만 했던 사람들, 기업이 도산되는 거죠. 또는 미국에서 자주 발생했었던 자기 집을 넘겨주어야만 했던 주택 보유자들, 기억하고 있다.
성취 가능한 것은 모두 성취했습니다. 이상적인 직업, 연봉, 배우자 같은 성취는 불가능한 많은 것은 성취하지 못한 채, 인생의 중반을 보내는 사람들의 의미 상실을 생각하고 있다.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평생의 반려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잃은 남자나 여자의 의미 상실을 생각하고 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거죠. 또는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었거나, 마음에 걸린 사람들의 의미 상실을 생각하고 있다. 감각과 신체 기관들이 눈에 뜨게 쇠약해져 가고, 노인성 치매에 걸릴까 두려워하는 수많은 노인들의 의미 물음을 생각하고 있다.
인생이 너무 소중하게 지나왔고, 육체는 점점 시들어가고, 어떤 삶의 생기가 쑥쑥 빠져나가는 단 느낌이 절실할 때, 이게 사는 게 뭐지, 의미 상실에 떨어질 수 있죠. 또한 오늘날 위기 시대에 제기.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며, 세 가지 해석과 의미 해석, 세계가 뭐야, 그리고 그것의 의미가 뭐야, 그 안에서 인간이 산다는 게 뭐야, 나와 저 사람의 관계가 맺는 의미가 뭐야, 야 뭐 등등, 그래서 붙들고 씨름하는 젊은이들을 생각하고 있다.
그렇죠,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은 많을 겁니다. 많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다 해결한 건 아니에요. 그게 감춰져 있는 거죠.
그들은 무조건 하나님께 기도해서 해결해 달라고 매달리기도 하죠. 그래서 해결되면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했다고 말을 하고, 해결되지 않으면, 아, 내 기도가 약했나? 뭐 그렇게 생각하죠. 그건 이제 건강한 상태는 아닙니다.
아주 실질적으로 삶의 의미를 붙들지 못하는 이들에게 교회는 어떤 대답을 할 있을까요? 그거야말로 문제 의식과 같이 연결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되겠죠. 기도하고 하면 다 돼, 전도하면 돼, 교회 키면 돼, 하나님께서 뭐 자녀 손들 잘하게 해줄 거야, 뭐 이런 식으로는 좀 곤란한 거잖아요. 그 실질적으로 그 사람의 의미 상실을 어떻게 기독교적으로 방향을 이정표로 제시해 줄 건가, 그 고민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 뭐 저도 그런 것에 대한 명확한 이정표 제시를 잘하고 있지 못합니다.
뭐 제가 일반 목회를 하는 게 아니라서 그런 데까지 나가기 힘들긴 해요. 순전히 예배 공동체에 특징을 지닌 교회만 했기에 교회에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없는 거죠.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예배, 그 설교를 통해서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또 나름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제가 그거까지는 다 모르겠습니다. 이제 나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길을 꺾어버리는 부정적인 경우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산더미처럼 많으니까, 오히려 인위적 과장 없이 아주 침착하게, 오늘날 개인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새로이 부여하기 위해 활용하는 다양한 원칙적 가능성들에 관해 구하고 싶다.
아, 굉장히 구체적으로 이 사람은 어떤 사안에 접근하고 있군요. 일경, 여기서 우리 삶에 더 깊은 맥락이 명료히 드러날 것인데, 이 맥락 위에는 아마도 많은 행동과 열정과 일과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을 것이다. 자, 오늘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