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목사님께!
  엊그제 충주에서 뵈었던 춘천의 허태수 목사입니다.
  긴 글을 읽으실 시간이 짜증스러우실텐데 설교 원고 한 편을 읽어 주십사고 부탁드리는 것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의 강의를 듣지 않았다면 몰라도, 진지하고 슬퍼하며 들은 저로서는 제 설교 한 편에
  대한 목사님의 충고를 듣지 않을 수 없어서 이렇게 올립니다.
  이 설교 원고는 5월 21일에 있을, 전국 감리교 임원과 감독 및 평신도 대표들에게 할 것입니다.
  매우 수고스러운 부탁이며, 무례한 청인줄 압니다.  하지만 원고 마감이 내일인 터라 부랴부랴
  원고를 쓰면서 목사님의 강의 내용이 자꾸 걸렸습니다.
  원고는 이대로 실리더라도 실제 설교는 시간이 있으므로 목사님의 건강한 가르침을 받겠다 싶은
  기대가 앞섰습니다.
  제 이메일(sanhoza@hanmail.net)로 목사님dml 설교 클리틱을 넣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거듭 지난 번 1박2일에 끼쳐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설교 원고는 아래와 같습니다.



나비 같은 삶을!
마 25:31-46


옛날에 흥부와 놀부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놀부는 형으로써 부자로 살았습니다. 흥부는 착해선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흥부는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보고 측은히 여겨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제비가 보은을 하느라고 박씨 하나를 물어다가 흥부네 봉당에 떨어뜨리는 게 아니겠어요?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까짓 박씨’하고 발로 밟아서 가루를 냈거나 했겠지만 흥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박씨를 담장 밑에 심고 잘 가꾸었습니다. 어떻게 되었나요? 가을에 박을 타다가, 그것도 그저 박타는 재미나 볼 요량으로 박을 갈랐는데 거기서 금은보화가 쏟아졌습니다. 이 소식을 놀부가 듣고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놀부는 자기도 그런 복을 받고 싶어서 억지로 흥부가 한 일을 따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서 흥부처럼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교훈을 말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복을 받기 위한 착한 모델이나 공식은 아닙니다. 놀부가 흥부처럼 잘되기 위해서 이른바 착한 일-착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을 했다면 그것은 이미 변질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흥부는 그저 측은한 마음에서 아무런 목적 없이 제비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 일의 결과로 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놀부는 흥부가 받은 복을 목적으로 하여 억지로 흥부가 한 일을 따라서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은 아름답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행위의 목적을 이루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특히 어른들이 자녀에게 ‘흥부처럼 복을 받으려면 착한 일을 하라’고 한다고 합시다. 그 말은 놀부의 ‘마음으로 살아라’하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이것은 마음 착한 흥부의 얘기를 해놓고 끝에 가서 놀부가 되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면, 흥부 놀부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으로 삼은 최후의 심판 이야기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최후의 심판 때에 인자는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갈라서 한 쪽에는 상을 주고 한 쪽에는 벌을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심판 앞에서 선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의외라는 표정입니다. 상을 받게 된 사람들은 자기들이 언제 상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있느냐면서 의아해 하고, 벌을 받게 된 사람들은 자기들이 언제 그렇게 나쁜 짓을 했느냐면서 펄쩍 뜁니다. 그 때 인자는 그들에게,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고 대답합니다. 딱히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한 어떤 행위를 말하려고 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삶’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고 보아집니다.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흥부와 놀부 이야기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에서는 놀부의 악행이 묘사가 되지만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는 어떤 악행도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왕이 심판하는 말을 듣고 나서,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하고 펄쩍 뛰는 장면만이 나올 뿐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자기들 나름대로는 주님을 섬기느라고 했다는 말이겠죠. 그들은 성전에 가서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하고 헌신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전 안에서 칭송받는 높은 지위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난 이들의 문제는 이게 아닙니다. 이런 신앙 행위를 하면서 대가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결과를 염두에 두고 행동했다는 점에서 흥부와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장차 틀림없이 큰 상을 받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이나 상을 받기 위해서라면 천 일 기도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주위의 작은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의 죄였습니다(42-43절). 반대로 의인들은,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종교 행사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상적 삶 속에서 이웃과 함께 나누고, 아파하고, 먹이고, 재운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어떤 선행이거나 상을 받을 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마치 흥부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복이었습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는 현세에서 박이 터져서 복을 받기도 하고 벌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현세가 아니라 종말에 받을 상과 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세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제시할 뿐, 무엇을 이루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와 최후 심판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무엇을 이루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세 유형으로 구분했습니다. 거미형, 개미형 그리고 나비형이죠. 거미는 공들여 그물을 치고는 가만히 앉아 그물에 걸려드는 것을 기다리며 걸린 것을 먹고 삽니다. 그것이 그의 ‘영역’입니다. 늙은 세대는 젊은 날에 얻은 지식, 경험, 지위 또는 명성들을 거미줄처럼 쳐놓고 가만히 앉아 그것에 걸리는 것을 먹고 삽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 그물을 이리 치고 저리 옮기는 정도일 뿐, 이미 생산적이거나 창조적 노력은 정지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개미는 그저 부지런히 먹을 것을 수집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현실참여 계층과 같습니다. 기존 가치관, 기존 질서의 요청에 끌려서 분주하며 그 안에 자기 자리를 구축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딸린 가족, 사업체 등을 유지하기 위해 급급할 뿐입니다. 그의 목표는 거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비는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습니다. 그는 꽃에서 꽃으로 전전하며, 쉬지 않습니다. 화분(花粉)으로 살면서도 그것에 연연하여 거기에 보금자리를 꾸미려 하지 않습니다. 마치 ‘내 머물 곳은 여기가 아니라 저 하늘에라도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유형 가운데 크리스천의 삶에 가장 가까운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나비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태복음 성서의 본문을 마음에 새기는 까닭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과연 나비의 삶을 살고 있는 크리스천이 얼마나 될까요? 오히려 거의 다 거미나 개미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고생 끝에 어렵게 한 자리에 오르게 된, 이른바 성취를 한 사람들을 보면, 그의 성취 이전과 이후의 삶이 너무나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십중팔구는 그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겸손하고 노력하고 친절했으나, 그 자리에 오른 다음에는 거만하고 노력하지 않고 쉬지 않고 누군가를 비방하면서 분노에 차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전도사나 개척교회 목사보다는 큰 교회 목사가 그렇고, 사원보다는 사장이 그렇고, 강사보다는 교수가 그렇고, 후보자보다는 당선자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나비의 시절을 잊고 거미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유명하다고 하고 성공했다고 하는 교회들은 거의 다 거미형이거나 개미형이기 십상입니다. 마치 수퍼마켓이나 공장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요즘 목회자들은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목회하는 것은 수퍼마켓 하는 것과 같다’고 공공연하게 말을 하기도 합니다. 요즘 구멍가게는 자꾸 없어지고 대형 할인매장이 생기는데, 교회도 그 풍조를 따라서 이제는 구멍가게에서 벗어나서 수퍼마켓이나 대형할인매장이 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대형할인 매장의 특성은 뻔하죠. 목이 좋은 곳이어야 하고, 주차가 편해야 하고, 사람이 많아야 하고, 물건 값이 싸야 합니다. 교회도 그저 사람 많이 살고, 부자들 많이 사는 곳에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주차를 편하게 하여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부담 없이 와서 듣고 헌금하고 갈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합니다. 이거야말로 거미형 할인매장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요?

그들은 덩치가 너무 커져서 도저히 나비가 될 수 없습니다. 이 꽃 저 꽃 날아다니면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나비의 역할은 시민단체들에게 다 넘기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이제 생태계 문제는 환경운동연합이나 녹색연합에게, 경제문제는 경제정의실천연합에게, 정의문제는 참여연대에게 다 넘기고, 교회는 그저 건물만 높이 올리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시민단체들이 시청 앞과 광화문 앞에 나와서,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고, 한미 FTA협정을 위해 집회를 하고, 강을 살리자고 집회하면, 교회는 기껏, 그 옆에서 이라크 파병을 찬성하는 집회나 하고, 친미 반공 집회를 열어 통성기도나 하고, 왜 목사, 신부가 불교 의식인 삼보일배를 하느냐고 따지기나 합니다. 세상이 다 썩어도 그래도 성직자들만은 바르고 청렴하다고 믿고 사는 것인데, 오늘날 유명하다는 교회 목사들 가운데는 이런 기대를 저버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목회자들이 돈을 좋아하고 화려한 삶을 살 뿐 아니라, 무슨 부정에 관계되어 세상 법정에 서서 판사로부터 창피한 충고나 듣고 있습니다. 이러니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헌금하느니 차라리 사회단체에 기부하겠다고 자조 섞인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그들에게 지팡이 하나와 신은 신발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 주라고 하셨습니다(막 6:8-13). 그들의 모습 어디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여기는 내 영역이니 침범하지 마라’고 호령하는 거미나 개미의 삶을 볼 수 있습니까? 오히려 자유롭게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며,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살리는 나비의 삶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불안을 없애려고 우리는 너무 많은 것으로 우리자신을 휘감아 버립니다. 겹겹이 감겨진 또는 포개진 그 속에서 우리는 때로 안심하고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겹겹의 플라스틱 속에 꼼짝없이 갇혀 숨도 제대로 못 쉬게 되리라는 불가피한 결과는 걱정하지 않고 삽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신 경우의 한 경우, 마지막 날에 상을 받게 될 삶의 충실성을 갖으려면 아무래도 ‘놀부의 삶’보다는 ‘나비 같은 삶’즉 막6:8-13의 가르침대로 사는 게 마땅할 것입니다.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와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신도 한 켤레면 족하지. 옷이 두 벌이면 입을 대마다 얼마나 곤란할까?”
이 말씀이야말로 꼭 필요한 ‘긴절緊切’ 아닙니까? 품목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꼭 필요한 것 외에는 허락이 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물은 생계수단이고 적어도 어부들에게는 생활의 근거 아닙니까? 이런 구절을 읽거나 배울 때 우리는 하품을 하면서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그래도 모자라는 것 보다는 넉넉한 게 좋다’고 마음에 벼르며 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더 크고 많아야 되는 건가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신뢰하게 하는 시 두 편을 5월의 가슴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또한
이 가비야운 가비야운
생명의 파편이여-
아니 무결한 그 전일이여,
한 점 바람 없음에도 팔랑팔랑 울타리를 넘어
화초밭을 지나 다시
지붕위를 스쳐
마치 이 눈부신 광명을 깁는 듯
하늘하늘 지나가노니,
그지없이 무심하므로 바람에 나부끼는
한 조각 종이쪽과 너의 다름을
나는 무엇으로 추리할 수 있으랴.

그의 거룩한 손길이 닿는 것마다
즐거운 생명을 하나씩 하나씩 눈 뜨임 입는,
그 신이 무료 하므로
하릴없이 든 화필로써 무상(無上)히 아름다운
아름다운 채색의 무늬를
찍어 밀치신 그대로를 누리어 살므로,
내일을 의혹치 않는 지극히 어진자여,
너의 생명의 반짝임을
내 오늘 마음 조이며 지켜보노니 보노니.
                        <유치환의 ‘나비’全文>

저 숨가쁘게도 눈부시게 문명하는 인간이
문명하게 노랄수록
인간자신마저 그 무용과 퇴잔을 엄청나게
적출함에 비길진대
이 적은 미물들은 그 얼마나 아치로운 단조와
긴절만을 갖추고서
미구환 광일 속에 절로들 동락하고 있음이랴!!
                     (유치환 ‘당장’중에서)

이것은 유치환의 시 두 편입니다. 하나는 전문(全文)이고 다른 하나는 부분을 따왔습니다. 시인은 꼭 필요한 긴절만을 갖추고서도 절로 기뻐하며 생을 누리고 있는 나비나 푸새 한 마리에게서, 문명의 첨단을 살고 있다는 현대인보다 더 곡진한 삶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의 감각이 우리에게 쉽게 와 닿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직도 우리는 ‘긴절’만을 갖고는 한 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제는 잃을 만큼 잃었다는 느낌이 피부로 와 닿을 만큼, 그래서 결국은 더 잃을 게 없다는 신념이 무의식의 차원까지 축축하게 스며있게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진리를 통한 자유를, 하늘이 내려주는 평안을 누릴 있지 않을까요? 그게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웨슬리의 영성적 삶과 목회가 아닐까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