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시간을 빼앗아서 정말 죄송합니다.
나름대로 대답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확한 대답을 할 자신이 없어 문의 드립니다.
사랑채에서 이야기가 되었던 자유의지, 하나님의 섭리, 또한 지난번에 질문드렸던 외도 문제 등등에 대해 목사님의 답변을 토대로 많은 이야기를 했었는데 메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왔습니다.
질문하신 집사님도 순수한 신앙의 소유자이시고 아주 열심이십니다.
여러번 읽어도 이해 안가는 부분도 있고 해서 감히 목사님의 고견을 여쭙니다.
다음은 제가 받은 메일 내용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세례요한이 헤롯에 의해 허무하게 죽임을 당할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순교의 자리에 섰을 때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명 맞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실제이며, 성경적 사실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에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연관시켜서는 안 되느냐?
다시말해, 영적으로 해석하고 접근할 부분이 아닌 하나님의 공의라는 본질성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을 끌어 들이지 말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냐? 입니다.

창세기 50장에서 야곱이 죽어 장사된 후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요셉이 복수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생전 아버지가 형들을 해하지 말고 용서하라 했다며, 죄를 용서해 달라 동생 요셉에게 간청하지요.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세기 50:20)

형들이 요셉을 해하려 할 때, 그 때 역시 하나님은 분명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50장 20절, 요셉의 고백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지? 이것 역시 요셉의 인간적 해석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간과’라고 이해해도 되는지? 그 간과하심 또한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일부분은 아닌지?

저는 요셉의 고백을 영적인(영적이라는 말이 적절치 않을 수 있겠지만) 해석이라 이해하면 안되는지?
디모데후서 3장 16절(‘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의 말씀에서처럼 성경은 우리의 인생사에 일일이 하나님이 개입하시지는 않지만 그 상황들에 대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써 교육함으로 우리가 구원을 완성해 가는 성화의 길을 걷게 한다고 이해합니다. 이것이 본 논제와 적절한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못하는 무지함속에 물음을 던져 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와 관련이 될 때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응답의 영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관련되지만) 하나님은 개입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었는데, 그렇다면 그 때의 구속사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같은 맥락에서 좀 더 집사님의 이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저의 개인적인 일상을 놓고 보면, 분명 사사건건 하나님을 연관시키거나 의식하지 않고 잘(?),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네요.
그것을 두고서 영적이냐 아니냐를 묻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굳이 힘겨운 문제와 상황에 대해서만큼은 이렇게 영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하는 물음이 우스운 것 아니냐?하면 할 말이 없기도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외도한 남편에 대해서 아내는 어떻게 할 것이냐?
분명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은 하나님과 무관하다. 모두가 동일하게 이해. 맞지요?*^^*
영적으로 해석할 부분이 아니라, 이혼할 것인지? 아니면, 용서하고 살아갈 것인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 이 부분은 집사님의 말씀이셨습니다.*^^*
한 가지, 집사의 이해의 배경에는 어떤 전제는 없었을까? 그래서 혹여 저의 인지 구조상 집사님 말씀의 단편만을 받아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이유로 일련의 사건과 이에 대해 저의 관점을 말씀드리며, 다시금 한 번 더 집사님의 이해를 구했으면 합니다.

외도한 남편은 갈팡질팡합니다. ‘용서해 달라. 돌아가면 받아 줄꺼냐?’ 그랬다가 며칠 지나면, 또 다시 ‘시간을 달라’,
아내는 결혼 이후 남편만을 의지했고 신뢰하며 살아왔습니다. 사업하느라 분주한 남편, 물 한 컵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가져다 먹는 법이 없는 그 남편을 믿고 혼자서 자녀 셋을 양육해 왔습니다.
그래서 남편 없으면 못 살 것 같은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실감이 더 큰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여인은 스스로 냉정해졌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지만 남편이 마음을 돌이킬 것 같으면, 용서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다시 마음이 돌아서 버리면,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려 버리는 그 여인의 모습은 머리는 냉정해 졌는데, 가슴은 불안에 떨고 있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당연한 일일 것 같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서 저 역시 이혼이냐? 용서하고 살거냐?하는 판단과 결정을 여인은 분명히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여인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보다 높아진 우상(남편)을 여인의 삶속에서 제거했으면 하시는 마음은 없는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겠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우상으로 섬겼던 자신의 허물(?)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서 자신을 구원해 주시도록 엎드려야 한다고 그리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의 해석이 아니라 그 여인이 그렇게 해석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거지요. 이것이 그 여인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모습이며, 곧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기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인거죠. 이 때에 여인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지 모르니까요!!

세상은 ‘세살버릇 남 못준다’고, 용서하고 받아 들였더니, 또 다시 외도하는 남자로 인해 여자들만 평생 고생하며 산다고 말합니다.
사소한 우리의 일상사까지 하나님을 끌어 들릴 생각은 저 역시 전혀 없구요. 하나님도 개입하지 않으실거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그 마음 또한 하나님이 바꾸시지 않으실거다. 그 또한 인정하고 싶습니다.

다만 여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분명하게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고 또한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개입이 있으실 수 있다(이것 또한 인간적 해석일 수 있겠지만)라고 해석한다면 억측이 될까?
저는 여인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의를 위해 결단하고 그의 영이 거듭나게 되면, 지금의 문제, 상황은 그 결과가 어떠한 방향으로, 최악의 나쁜 시나리오로 흘러간다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무엇인가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점일까?
오히려 옆에서 조언하는 우리들이 ‘가만히 있어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선포했던 시편 기자의 말처럼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조언(여기에는 사탄의 시험이니 하는 말 또한 불가)하는 대신(무관심이 아니라) 여인이 스스로 문제에 직면할 시간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이 이 문제를 만나게 하신 이유가 뭘까?로 접근해 가는 것이 옳은 길이 아닐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너무 다르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물어야 하지 않겠나?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에 여인이 직면할 때만이 자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미천한 소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