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1

인자가 오리라

대림절 Views 33522 Votes 2 2010.11.28 22:16:26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2010/dawp_1128.mp3 
설교보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101128.wmv 
성경본문 : 마태복음 24:36-44 

인자가 오리라!

(마 24:36-44), 11월28일, 대림절 첫째 주일

 

     오늘 설교 본문에는 특별한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인자’가 그것입니다. 37절은 인자의 임함이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고, 39절은 홍수로 사람들이 모두 멸망당하기까지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는데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다고 했으며, 44절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자(人子)는 헬라어로 ‘호 휘오스 투 안트로푸’라고 하는데, 이는 ‘사람의 아들’(son of men)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면 성경을 철저하게 읽지 않는 증거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 사람의 아들이 아닌데도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이 왜 인자를 자기와 구별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 때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에 당신 자신이 다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남의 이야기하듯이 ‘인자’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군다나 36절의 보도에 따르면 그 날과 그 때를 아들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마지막 때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런 문제들을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무조건 믿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의 고유한 영적 경험과 동시에 고유한 신학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파루시아

     그 중의 하나가 묵시문학입니다. 묵시사상이라고도 합니다. 구약의 많은 내용이 이런 묵시사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약성서에도 한 가지 사상만 들어 있는 게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전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과 거기에 반응하는 방식은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는 학파도 있었고, ‘엘로힘’이라고 부르는 학파도 있었습니다. 예언자 전통도 있고, 제사장 전통도 있습니다. 이런 전통들이 각자 하나님을 말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인식과 경험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묵시사상은 구약의 역사에서 비교적 후기에 나타난 독특한 사상입니다. 그들의 핵심사상은 하나님이 세상을 직접 심판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36절이 말하는 ‘그 날과 그 때’를 가리킵니다. 계 1:10절은 ‘주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날과 그 때에 전권을 쥐고 세상을 심판할 이가 바로 ‘인자’입니다. 인자는 단순히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마지막 때의 ‘심판자’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37절과 39절은 ‘인자의 임함’이 노아 홍수 사건과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임함’은 헬라어 ‘파루시아’의 번역입니다. 파루시아는 coming, arrival, presence라는 뜻입니다. 파루시아는 곧 하나님의 임재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이런 점에서 파루시아는 구원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임재, 구원의 실현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묵시사상은, 그리고 묵시사상에 영향을 받은 여러 성서구절들은 왜 파루시아를 말했을까요? 파루시아를 말하는 것보다는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일에 힘쓰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지금도 많은 정치인, 경제인, 사회운동가들이 세상을 바꿔보려고 애를 씁니다. 교회도 그런 일에 힘을 쏟습니다. 서울 강남을 대표하는 어떤 교회는 ‘정감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정직과 감사 운동이라고 합니다. 파루시아는 그것과 다른 이야기입니다. 경제가 좋아지고, 사람들이 정직해지고, 문화 활동이 풍부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임재 방식입니다. 왜 이런 사상을 말하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묵시사상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 포로와 신구약 중간인 암흑시대의 경험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상이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이 완전히 악의 지배 밑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세상이 총체적으로 부패했습니다. 더구나 자신들에게는 세상을 바꿀 능력도 없었습니다. 완전한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마치 시한부 암 선고를 받은 사람과 비슷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선택은 무엇일까요? 낡은 세상(올드 에온)은 가고 새 세상(뉴 에온)이 와야만 했습니다. 그것을 실행할 이가 바로 인자라는 겁니다. 그 인자의 오심을 ‘파루시아’라고 선포했습니다. 그 파루시아가 이뤄지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무늬가 바뀌는 게 아니라 실체가 바뀝니다. 이런 묵시적인 희망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어졌습니다. 종말에 재림하실 예수님이 바로 인자라는 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런 신앙이 바로 오늘 본문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파루시아 개념을 너무 극단적인 것이라거나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월적인 인자의 파루시아를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보다는 지금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쪽으로 개량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 역사적 투쟁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인자의 파루시아를 기다린다는 명분으로 역사적 책임을 유기하면 곤란합니다. 이 역사에 두 발을 탄탄하게 딛고 사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를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주 명백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총체적인 절망으로 떨어집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늙고 곧 죽습니다. 이걸 늦추거나 막을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늙고 죽지 않으면 생명이 아닙니다. 개인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에 인간이 살지 못하게 될 날이 오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인간 종 자체가 끝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변하든가요? 옛날에 비해서 인간 세상이 더 살만한 세상으로 바뀌었나요? 지금의 제국은 옛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던 로마 제국보다는 더 신사적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인생살이는 비루하고 잔인하고 구질구질하고 이기적이고 전투적입니다. 이 세상을 뿌리째 바꿀 인자의 파루시아를 우리도 고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인자의 힘으로만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마태를 비롯해서 모든 공관복음서 기자들의 신앙이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그 날과 그 때

     인자의 파루시아는 언제 실행될까요? 본문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심지어 아들도 모르고 하나님만 압니다. 노아홍수 때도 사람들이 홍수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38절) 모든 것이 완전히 멸망당할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파루시아가 얼마나 갑작스러운지, 얼마나 예측할 수 없는지 그 순간까지 사람들이 밭을 매고(40절) 맷돌질을 하게(41절) 될 것이라는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두려워합니다. 자기가 혹시 인자가 데려가지 않는 한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본문은 그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일상이 여전할 것처럼 생각되는 어느 순간에 마치 도둑이 예고 없이 침범하듯이 인자의 파루시아가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 올지 모른다면 오지 않는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말입니다. 또는 이런 표현을 만화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흥미가 있긴 하지만 실제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런 오해에 일리가 있습니다. 지난 2천년동안 예수님의 재림을 외쳤지만 아직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재림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런가요? 우리의 일상은 아무 변함없이 계속되는 걸까요?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2천년이 긴 시간이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지구 전체의 나이를 24시간으로 계산하면 2천년은 몇 초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이런 숫자로 우리의 삶을 희화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경험이 그렇게 절대적인 것에 토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저는 지금 58년 가까이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각각 나름의 세월이 있습니다. 그 세월은 그야말로 한 순간입니다. 각각의 세월이 득달같이 나타났습니다. 모든 순간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죽음의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밭을 갈고 맷돌을 돌리고 있는데 그 순간이 왔습니다. 그 날과 그 때를 모른다는 말은 모든 순간이 그 날이요 그 때라는 뜻입니다. 3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있는 시간이 한 순간이듯이 파루시아가 일어나면 모든 시간이 바로 그것에 융해되어 한 순간이 됩니다.

     위의 설명이 우리의 신앙생활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저걸 모르면 신앙생활이 불가능한가요? 파루시아는 우리 신앙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내용입니다. 마태가 전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깨어 있으라.”(42절)고 하며, “준비하고 있으라.”(44절)고 말합니다. 영적 각성과 준비는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파루시아에 대한 인식 정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여기 사형수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에게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깨어 있음과 죽음에 대한 준비로 충일합니다. 여기 마약과 도박, 또는 주식투자와 부동산 투기에 마음을 빼앗겨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일상은 몽롱한 정신과 돈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깨어 있다는 것과 준비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에 있습니다. 모든 일상을 팽개치고 수도원에 들어가 버리는 것이 대답은 아닙니다. 우리가 실제로 수도원 생활을 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 삶은 세속에서 이뤄집니다. 예수님도 홀로 한적한 곳으로 나가기도 했지만 결국은 사람들이 지지고 볶듯이 살고 있는 시장 바닥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세속에서 살되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면 되는 걸까요? 예, 그게 일단 대답입니다. 교회생활은 개인 신자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교회생활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과는 다르게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기복주의는 한국교회의 영원한 로망입니다. 매일 새벽에 “나는 할 수 있다.”는 구호를 외치듯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신앙생활이 모두 오늘의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것에 집중됩니다. 서울 강남지역의 요지에 2천억 원이 들어가는 교회의 신자들이 인자의 파루시아를 간절히 원할까요? 인자의 파루시아는 이런 모든 것들을 상대화하는 사건입니다. 조금 더 선정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일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아무도 장가가고 시집가지 않을 겁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따지고보면 이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심정으로 살고 싶으신가요? 예, 그건 옳은 생각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사과나무를 심는 일인지를 뒤돌아보면 됩니다. 현대인들은 사과나무가 아니라 돈나무를 심는 데만 열을 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이 어떤 것이라고 딱 집어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제 3자가 판단하기도 어렵습니다. 최소한의 기준만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지금 당장 손 놓아도 아쉬울 게 없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집을 지으면서도 거기에 내가 천년만년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당을 건축할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놓쳐도 아쉬운 게 없어야 합니다. 목사가 큰 교회로 부흥시킨 다음에 언제든지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건 단지 교양이나 인격이 아닙니다. 영성입니다. 표면적인 삶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고 궁극적인 현실에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2천 년 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관심이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인자의 파루시아에 영혼이 민감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속임수가 아닙니다. 민중의 아편이 아닙니다. 이런 영적 각성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늘 팽팽하기 유지되지도 않습니다. 세속의 일들이 우리를 둔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인자가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분은 곧 오십니다.

 

 

 

 

 

 

 

 

 

 

 

 


profile

pingdol

November 29, 2010
*.227.83.101

인자가 오리라!

 

대림절 첫째 주일의 설교 제목으로 딱이네요.

베토벤 심포니5번 1악장 첫소절을 듣는 느낌입니다.

 

영적 각성과 준비는 파루시아에 대한 인식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씀에 새삼 일어나 허리를 동이게 되는군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당장 놓아도 아쉬울게 없는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 해도 괜찮은가...

연습하고 있긴 한데...쉽지는 않습니다.

목사님의 이런 설교가 연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오늘도 감사.

얼굴을 반듯하게 들고 주를 맞는 그날을 기다리며.

profile

정용섭

November 29, 2010
*.120.170.250

핑돌 님,

고맙습니다.

여전히 난삽한 저의 설교를

빛난 문구로 그럴듯하게 평해주셨네요.

주님의 오심,

그의 파루시아,

세상의 마침과 새로운 세상의 시작,

생명의 질적인 변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로서의 교회,

우리가 대림절에 생각해야 할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마치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와 같습니다.

함께 그 물에 목을 축이며

그날을 기다리십시다.

동지여! 

profile

달팽이

December 02, 2010
*.83.92.39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문을 외우면서

치열한 현실성을 유지하면서 자유와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한치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 간다는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소망이 현실과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한가운데서 더 치열하게 소망이 밝게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자가 오리라!"

자신의 삶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면하는 자에게는 늘 구원의 소망으로 주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길 기도해 봅니다...

 

profile

정용섭

December 02, 2010
*.120.170.250

달팽이 님,

하늘이 잔뜩 찌푸리고 있소.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세요.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근거로

'인자'가 온다는 사실을 믿고 선포했겠소?

2천년 전 그들의 영적 경험을

오늘 21세기 현대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하려면

우리에게 좀더 치열한 영적 수고가 필요한 것 같소이다.

깊은 웅덩이에 빠진 사람의 심정으로

그 사실에 매달려봅시다.

대림절과 성탄절 절기로 채워진 12월,

기쁨과 평화의 기운으로 살아가세요.

 

 

profile

이선영

December 02, 2010
*.164.230.230

유대인들이 '희망을 말 할 수 없는 현실  ' 속에서 인자의 오심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처럼

기독교인은 어설픈 희망을 말하거나 또  거기에 마음을 둘 게 아니라,

절망, 고통같은 것들과 친해져야 하는 게 아닌가,

거기서만 간절한 기다림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교회마저도 사이비 희망이 판을 치는 마당에

목사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서 전 너무 좋아요.

사는 게 구질구질할 때가 있는데 전 오늘이 그런날이었어요.ㅎㅎ

자기자식 잘난 맛에 사는 부모랑 한판했답니다.

목사님은 하루 잘 보내셨어요?

 

profile

정용섭

December 02, 2010
*.120.170.250

이선영 선생,

'사이비 희망'이라는 말을 했나?

그걸 눈치챘다니 대단하군.

인생살이에서 조금이라도 손해볼까봐 조바심을 내면서

40일 특새에 매달리는 모습이 바로 그거 아닐는지.

오늘 한판 했다고? ㅎㅎ

나는 오늘 주보 만들고,

"기독교가 뭐꼬?" 교정 좀 보고,

테니스 운동 좀 하고,

<기독교사상>에 연재할 글 구상을 하고,

그리고 빨래 널고,

큰 딸을 좀 도와 주고(그럴 일이 있어서)

다비아 사이트 좀 돌보고,

밥을 차려 먹고....

그렇게 보냈네.

금년 다 가기 전에

대구샘터교회 예배에 한번 참석하러 오시게.

남자 청년들이 많으면 말 안 해도

자주 올텐데.

마지막 한 달, 굳세게 살게나.

 

profile

오명철

December 04, 2010
*.174.213.48

더 좋은 교회, 더 좋은 환경에서 예배 하고 싶었습니다.

조국을 잠시 떠나 살면서 내 교회 하나 없이 매주마다 백인들 눈치보며 의자를 옮기고, 음향을 셋팅하고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예배할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다비아에 와서 대림절 설교를 보면서

이 세상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려한다는 말씀, 정치인, 교육인, 경제인 사회운동가들이 세상을 바꾸려 하듯이

나 또한 더 좋은 예배와 환경을 생각하고,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바꾸려한 그들과 다를바 없는 무지했던 죄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인자가 오시는것에 촉수를 세우며 살아야 하는데,  이민 생활속에서 나도 모르게 그만 잠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이민생활을 하는 한인들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나라의 이민자들이 오늘 하루를 살기위해

되지도 않는 영어를 구사하며 가족을 살리려고, 힘겹게 살아갑니다. 그들과 함께 잠시 사는 이 세상에서

대림절 희망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초월적인 임재를 기다리는 삶.

무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바꾸는 그날! 두발을 이 땅에 딛고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를 희망하며

오늘도 인자가 오시는 그 날을 향해 다시 일어나기쁜 소식 전해주며 달려가렵니다.

profile

정용섭

December 04, 2010
*.120.170.250

오명철 님은 외국에 거주하시는군요.

미국이겠지요?

인자가 오시어 바꿀 세상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허무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희망이 자칫하면

사변에 치우칠 수도 있긴 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사변적인 것으로 이해되듯이 말입니다.

종말의 세상, 인자의 통치는

우리의 능력을 완전히 초월해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삶에,

그리고 역사 전체에

실질적인 생명의 능력으로 자리해야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느끼고,

실천하고 살아가는지 늘 영적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겠지요.

좋은 대림절 둘째 주일을 맞으세요.

List of Articles
No. Subject Date Views
Notice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Feb 16, 2007 183710
491 성령강림절 악령으로부터의 해방 (눅 8:26-39) [15] Jun 24, 2013 22105
490 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17] Jun 16, 2013 21620
489 성령강림절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왕상 17:8-24) [7] Jun 09, 2013 24767
488 성령강림절 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 1:1-10) [9] Jun 02, 2013 23150
487 성령강림절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롬 5:1-5) [8] May 26, 2013 23100
486 성령강림절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요 14:8-17) [4] May 20, 2013 24228
485 부활절 상호내주의 비밀 (요 17:20-26) [5] May 12, 2013 21095
484 부활절 환상을 보는 사람들 (행 16:6-15) [12] May 06, 2013 24035
483 부활절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6) [10] Apr 28, 2013 25765
482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요 10:22-30) [8] Apr 22, 2013 22517
481 부활절 나를 따르라 (요 21:15-19) [10] Apr 14, 2013 35082
480 부활절 죽임과 살림 (행 5:27-32) [14] Apr 07, 2013 20301
479 부활절 생명과 죽음 (눅 24:1-12) [8] [1] Mar 31, 2013 25151
478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10] Mar 24, 2013 31831
477 사순절 의식하지 못한 은총 (요 12:1-8) [10] [2] Mar 18, 2013 23777
476 사순절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12] [1] Mar 10, 2013 26510
475 사순절 여호와를 찾으라, 부르라! (사 55:1-9) [17] [3] Mar 03, 2013 39502
474 사순절 예수와 헤롯 (눅 13:31-35) [8] [1] Feb 24, 2013 23859
473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7] Feb 18, 2013 21194
472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눅 9:37-43) [8] [2] Feb 10, 2013 21294
471 주현절 예레미야의 하나님 경험 (렘 1:4-10) [12] Feb 03, 2013 25412
470 주현절 이사야 예언의 성취 (눅 4:14-21) [7] [1] Jan 27, 2013 32437
469 주현절 은사와 성령 (고전 12:1-11) [6] Jan 21, 2013 37256
468 주현절 두려워 말라! (사 43:1-7) [11] [1] Jan 13, 2013 34831
467 주현절 예수가 왕이다 (마 2:1-12) [3] Jan 07, 2013 30332
466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골 3:12-17) [9] Dec 30, 2012 36310
465 대림절 우리를 구원하실 이 (미 5:2-6) [4] [2] Dec 24, 2012 31982
464 대림절 관용과 주의 재림 (빌 4:4-7) [7] [3] Dec 17, 2012 35865
463 대림절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11] Dec 09, 2012 39288
462 대림절 그 날이 오리라! (렘 33:14-18) [16] [1] Dec 02, 2012 35132
461 창조절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 8:11-18) [16] Nov 21, 2011 31051
460 창조절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 25:31-46) [15] Nov 13, 2011 36303
459 창조절 예수 재림과 영적 각성 (살전 4:13-18) [11] Nov 06, 2011 32810
458 창조절 위선에서 낮춤으로! (마 23:1-13) [11] Oct 30, 2011 25479
457 창조절 하나님께 마음을 두라! (살전 2:1-8) [6] Oct 23, 2011 36176
456 창조절 하나님과 금송아지 상 (출 32:25-35) [7] Oct 17, 2011 33129
455 창조절 신앙의 위기 앞에서 (빌 4:1-9) [6] Oct 09, 2011 25408
454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마 21:33-46) [8] Oct 02, 2011 23217
453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Sep 26, 2011 19829
452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Sep 19, 2011 19760
451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Sep 11, 2011 19713
450 창조절 심판의 하나님 (출 12:1-14) [12] Sep 05, 2011 19890
449 성령강림절 종말과 생명 완성 (마 16:21-28) [16] Aug 29, 2011 21578
448 성령강림절 건지시는 하나님 (출 2:1-10) [14] [1] Aug 22, 2011 23118
447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에 관한 이야기 [10] Aug 15, 2011 23072
446 성령강림절 구원의 차별성과 보편성 [20] Aug 07, 2011 20430
445 성령강림절 다리 저는 야곱 [10] Jul 31, 2011 21375
444 성령강림절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18] Jul 24, 2011 23521
443 성령강림절 악을 대하는 태도 [20] Jul 18, 2011 20668
442 성령강림절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14] Jul 10, 2011 20182
44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8] Jul 04, 2011 23109
440 성령강림절 아들을 바쳐라! [17] Jun 26, 2011 21547
439 기타 세례를 베풀라 [8] [2] Jun 20, 2011 20353
438 성령강림절 성령을 받으라! (요 20:19-23) [13] Jun 12, 2011 36351
437 부활절 하나님의 영광이 답이다 (벧전 5:6-11) [15] Jun 07, 2011 21595
436 부활절 부활은 심판이다 [12] May 29, 2011 20910
435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12] May 22, 2011 30602
434 부활절 예수의 기이한 빛 (베드로전서 2:1-10) [16] May 16, 2011 31543
433 부활절 눈이 밝아진 그들 [11] May 08, 2011 22733
432 부활절 부활의 증인 공동체 [17] May 01, 2011 33815
431 부활절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의 주 [17] Apr 24, 2011 31259
430 사순절 “나는 아니지요?” [23] Apr 18, 2011 26217
429 사순절 여호와를 알리라! [16] Apr 11, 2011 23953
428 사순절 빛의 자녀, 빛의 열매 [25] Apr 03, 2011 34588
427 사순절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18] Mar 27, 2011 31771
426 사순절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13] Mar 21, 2011 30369
425 사순절 생명의 왕국 [5] Mar 13, 2011 22503
424 주현절 메시아는 비밀이다 (마 17:1-9) [17] Mar 07, 2011 23069
423 주현절 영적 자유의 토대 [24] Feb 27, 2011 23789
422 주현절 원수사랑, 가능한가? [16] Feb 22, 2011 30444
421 주현절 하나님이 생명이다 [10] Feb 15, 2011 24240
420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23] Feb 06, 2011 24336
419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다 [3] Jan 30, 2011 32241
418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7] Jan 23, 2011 23811
417 주현절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10] Jan 17, 2011 29773
416 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24] Jan 09, 2011 30238
415 성탄절 그리스도 찬양 [11] Jan 02, 2011 23493
414 성탄절 은총의 깊이로! [14] Dec 26, 2010 35997
413 성탄절 영광과 평화의 노래 Dec 26, 2010 34063
412 대림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file [8] Dec 20, 2010 34770
411 대림절 "당신은 메시아인가?" file [10] Dec 12, 2010 25304
410 대림절 소망의 하나님, 우리의 소망 file [5] Dec 06, 2010 36903
» 대림절 인자가 오리라 file [8] Nov 28, 2010 33522
408 성령강림절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file [12] Nov 22, 2010 33477
407 성령강림절 새로운 창조의 하나님 file [9] Nov 14, 2010 20142
406 성령강림절 죽음, 삶, 하나님 file [13] Nov 07, 2010 20540
405 성령강림절 믿음과 구원 file [4] Oct 31, 2010 32661
404 성령강림절 영과 구원 file [9] Oct 24, 2010 20166
403 성령강림절 기도와 믿음 file [20] Oct 19, 2010 33854
402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file [6] Oct 10, 2010 23477
401 성령강림절 믿음과 종됨의 관계 file [18] Oct 04, 2010 30592
400 성령강림절 하나님은 누구인가? file [8] Sep 26, 2010 30415
399 성령강림절 우리의 주인은 한 분이다! file [5] Sep 20, 2010 21556
398 성령강림절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 [20] Sep 12, 2010 23231
397 성령강림절 토기장이 하나님 [11] Sep 06, 2010 38495
396 성령강림절 안식일과 해방 [10] Aug 22, 2010 23677
395 성령강림절 주는 우리의 평화! [19] [1] Aug 16, 2010 22551
394 성령강림절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8] Aug 09, 2010 30971
393 성령강림절 생명과 소유 [8] Aug 02, 2010 22061
392 성령강림절 음란한 여자와 결혼한 호세아 [21] [1] Jul 25, 2010 46179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