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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메시아인가?"

대림절 조회 수 15899 추천 수 3 2010.12.12 23: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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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태복음 11:2-11 

“당신은 메시아인가?”

(마 11:2-11), 12월12일, 대림절 셋째 주일

 

    세례요한과 예수

     복음서 기자들은 세례요한을 예수님의 운명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제자들도 물론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심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초기 공동체의 지도자들로 활동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오히려 예수님의 선구자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종교의식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세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세례를 언급한 이유는 세례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증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에서 활동한 실존 인물이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예수님의 활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관계가 긴밀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요소들은 많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을 가리켜 당시에 죽은 세례요한의 환생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겠습니까.

     오늘 설교 본문의 내용은 세례요한이 죽기 전 옥에 갇혀 있을 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이렇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당신은 메시아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대망했습니다. 메시아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원래 구원은 하나님의 고유한 행위입니다. 메시아는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동일합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렸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기다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메시아를 대망한 이유는 자신들의 노력으로 구원의 세계를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의 고유한 메시아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역사를 안일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깊이에서 보았습니다. 인간세상은 인간의 노력으로 새로워질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오셔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유대의 메시아 대망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해서 마태는 3:1-12절에서 자세하게 전합니다.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회개의 복음을 외쳤습니다. 청중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혀 불에 던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요한은 유대의 마지막 예언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회개의 설교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헤롯왕의 부도덕한 행위를 비판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런 상황을 견뎌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보다도 변화의 조짐이 전혀 없는 세상 앞에서, 그 어디에도 구원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세상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웬만큼 듣고 알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요한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것은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들어가기 전의 요한은 어떤 점에서 예수님과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을 메시아로 믿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추종자들이 이리 몰렸다가 저리 몰렸다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로 온 이들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예언자 활동을 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세례요한은 감옥에 들어가서 예수님에 관해서 더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메시아인가가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예수인가?’ 그는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냈습니다. 당신이 메시아인지 알고 싶다는 겁니다.

 

    실족하는 자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마 11:4) 당신이 메시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듣고 보는 것’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맹인이 보고, 못 걷는 자가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못 듣는 자가 듣게 되고, 죽음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이사야 35:5절 이하와 거의 일치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오실 때 일어날 일에 대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세상입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똑같이 기대했습니다. 오늘 정치인들도 그런 것을 약속합니다. 과학과 의학도 그런 세계를 약속합니다. 당시 유대의 여러 메시아 운동을 일으켰던 사람들도 모두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소문도 많았습니다. 한국교회의 손 아무개 장로는 그런 일을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모든 난치병과 장애까지 치료될 것처럼 주장합니다. 치료되었다는 소문도 나돕니다. 이런 소문은 어디나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듣고 보는 것’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확실하게 보장해주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한 건가요, 아니면 부정한 건가요, 또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건가요?

     6절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듣고 보는 것’에 관해서 말씀하신 뒤에 뜬금없는 것처럼 들리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복이 있다는 표현은 마 5:1-12절에 나오는 팔복의 문구와 똑같습니다. 팔복에서 거론된 복 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등등입니다. 복이 있다는 말은 구원 받는다는 뜻입니다. 실족이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스칸달리조’입니다. 그 단어는 요즘 유럽 언어인 스캔들(scandal)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추문 정도의 뜻이지만 원래 헬라어는 어떤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하거나 믿음을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는 의심하거나 화를 내거나 쇼크를 받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에게 화를 내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나에게서 일어난 일을 보고 나를 믿으라고 하면 간단할 텐데, 왜 다른 말씀을 하신 걸까요? 예수님으로 인해서 실족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메시아 스캔들’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메시아 대망의 관점에 묶여 있는 사람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실족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메시아가 세상을 정의와 평화로 통치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방식은 엘리야가 행한 것과 같은 초자연, 초능력의 기적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사야 35편을 거의 그대로 인용해서 묵시적 차원에서 보도했습니다. 장애와 난치병이 치유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기적적인 사건들이 바로 메시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기자는 그런 것과 다른 현상도 보도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엘리야의 초능력과 관계되기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팔복과 연관됩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은 엘리야를 연상할 수 있는 초자연적 기적만이 아니라 구원의 새로운 차원인 팔복을 연상할 수 있는 가난한 자를 동시에 거론합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 대망이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입니다. 이 사실을 외면한 채 유대인의 메시아 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실족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전통적인 메시아 관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를 향한 그들의 반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한다면 이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니냐? 예수가 오기 전이나 온 후나 세상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마당에 어떻게 예수를 메시아라고 주장할 수 있느냐?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세례요한도 그런 심정으로 예수님에게 질문했을 겁니다. 이들의 주장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내면적으로 그대로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일반적인 기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복이라는 게 팔복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온통 부자 되는 것에만 신경이 가 있습니다. 수능을 위해서 교회가 공개적으로 특별 기도회를 열기도 합니다. G20 회의가 지난 11월 11,12일 양일간에 거쳐서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소위 잘 나가는 20개 국가의 정상들이 모여서 세계 경제 발전을 지속시키는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잘 사는 나라는 좀 낮아지고, 못 사는 나라는 좀 나아지는 길을 찾은 게 아닙니다. 이번 회의에서는 환율정책이 가장 예민한 주제였다고 합니다. 그것도 결국 자기 국가 이익을 최대로 하려는 욕망의 몸짓입니다. 지구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모두가 풍요롭게 살아야겠다는 대전제가 자리하고 있는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니즘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런 생각에 고정되어 있는 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 있는 자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래서 참된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실족하는 사람의 경우와 반대되는 경우를 찾아야 합니다. 엘리야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메시아 비밀’에 영혼을 맡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비밀의 방식으로 메시아입니다. 그 비밀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실패입니다. 그 실패가 구원이라는 사실을 비밀입니다. 부활도 누구나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무로부터의 창조와 마찬가지로 종말이 와야 드러나게 될 생명의 신비입니다. 그 사건이 예수님에게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유대교의 메시아니즘, 이 세상의 사이비 메시아니즘이 말하는 구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구원 경륜을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실제로 복이 있을까요? 이 대답은 이미 실족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의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주어졌습니다. 유대인들과 시대정신이 말하는 초능력, 기적, 경제성장과는 질적으로 다른 복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뒤에 사람들에게 요한을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 요한은 이런 칭찬을 들을만합니다. 자기의 운명을 던지면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정작 하고 싶은 말씀이 뒤로 이어집니다.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이런 말씀을 단순히 덕담정도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 세상에서 운용되는 삶의 형식과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서 운용되는 삶의 형식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질적으로 다른 생명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새로운 삶을 누립니다. 거기서는 모든 이들이 세례요한보다 큰 사람이 됩니다. 기대되지 않습니까?

     오늘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어떤 구원을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병이 낫기를 워하시나요? 부자가 되기 원하시나요? 자식의 출세를 원하시나요? 대한민국의 경제가 더 발전하기를 원하시나요? 그런 것들은 모두 유대인들이 원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구원을 원한다면 결국 예수님을 통해서 실족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러분의 그런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으로 천국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오고 있습니다. 그때를 기다리며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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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주님의평화

December 13, 2010
*.239.149.84

오늘도 좋은 설교에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설교를 만나는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축복이죠.


저희 교회는 성공회다 보니, 오늘 미사시간에 예전에 따라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문득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 라는 대목을 들으며, 세례요한의 이 질문이 

세상 혹은 교인들이 교회에 대해 묻는 질문이기도 할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교회에 정말 구원이 있는겁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곳을 찾거나 기다려야 합니까?"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수 없는 오늘의 본문이고, 설교 말씀이시네요.

좋은 나눔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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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3, 2010
*.120.170.250

주님의평화 님,

성공회 사제 훈련을 받고 계시다구요?

주님의평화를 널리 알리는 사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라는 질문에 마음이 움직이셨군요.

그쪽 문을 통해서 새로운 신앙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겠네요.

재미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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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beginner

December 14, 2010
*.106.156.126

오늘 설교 말씀으로 앞을 가로막고 있던 안개가 걷혔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말씀의 뜻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한구절에 대한 목사님의 말씀이 복에 대한 저의 생각을 확고하게 해 주는군요.

아울러 뚜렷한 기다림의 설레임을 담게 되기도 합니다.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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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4, 2010
*.120.170.250

이일녀 집사님,

위 설교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전혀 새로운 복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지요?

질적인 변화, 존재론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참된 희망이기도 하구요.

위 대글에서 안개라는 표현은 정확한 겁니다.

우리의 삶에 안개가 끼어 있듯이,

태양이 떠야 안개가 걷히듯이

신앙여정도 비슷합니다.

한꺼번에 안개가 걷히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태양 빛입니다.

빛이 비춰야 하는데요.

그게 은총이기도 하고,

동시에 영적인 우리의 인식이기도 합니다.

은총의 빛은 보려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거든요.

좋은 대림절 셋째 주간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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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December 18, 2010
*.255.183.133

목사님, 대림 절 기간에 참 귀한 말씀입니다.  

몇 일 전에 어느 분이 제게 쪽지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저는 이번 설교에서 다시 한 번 케리그마의 선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온 몸으로 느꼈어요.

누미노제의 거룩한 두려움이랄까요..."

저도 오늘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누미노제의 느낌이 어떤 것일까, 몇 번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니까 누미노제는 어떤 대상 앞에서 내 존재는 없어지는 것 같고(?) 

대신 그 자리에 '그 어떤 무엇'으로 채워지는 충만감을 느끼는 것, 이런 것도 포함될까요?

저는 말씀을 들으면서, "오실 하나님"과 "오신, 혹은 오시는 하나님"을 내내 생각했습니다.

이미 오셨으며, 오시고 계시며, 또 오실 하나님이시라는 것을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

특히 공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우리에게 '거룩한 두려움' 을 주는 것은 너무나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아울러서 모든 목사님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말씀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한 그리스도인으로 먼저 서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탄탄한 토대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삶의 지혜, 교훈, 배움은 하나씩 보태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동안 대림절에 대해 건성으로만 알다가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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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8, 2010
*.120.170.250

라라 님,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잡고 있으시군요.

하나님을 아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할른지요.

그분의 파루시아, 그분의 통치가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배부를 겁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대충 안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에 너무 민감합니다.

나우엔이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가 핵심이라고 말이에요.

그 존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것인데요.

그것이 왜 행위까지 규정하는지는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대림절 넷째 주일을 기쁨으로 맞으세요.

그분이 오십니다.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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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December 19, 2010
*.255.183.133

예, 목사님, 그런 면에서 저도 저의 신앙을 반성하게 됩니다.  

여태껏 제가 알고 있는 하나님, 예수님은 누구였든가,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의 질문 앞에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입니다. 

저는 차라리 이런 고백을 했어야 했습니다.

 "다만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 그것을 조금 알 뿐이다."

그런 고백안에서 제 신앙이 성장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지지부진하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문득문득 하게 됩니다.

안다는 것은 대체 뭘까요? 이 안다는 것 자체도 저는 까마득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이제,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것이라고요.

그리고 알았다 할때 그건 내가 숨긴다고 해서 숨겨 지는 게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삶에 체화되서 나타난다는 것도요. 

(이런 삶이야말로 성령에 이끌린 삶이 아닐런지요!)

그동안 신앙은 말이 아니라 능력이다, 열매다..

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지만, 만일 이런 토대 없이 드러난 열매들이라면, 그건

'자기의'의 열매들이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자기자신에게 많이 속는 것 같습니다.

아, 우리에게 이런 자기최면, 착각에서 탈피할 수있는 은총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저는 오늘 아침, 대림절을 기다리는 저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절실한 기도는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주여,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두 기도문을 떠올렸습니다.

오직 제가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주님의 긍휼만을 간청해야 되는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긍휼을 한 없이

기다리는, 대망의 기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런 마음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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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아델포스

December 20, 2010
*.201.77.210

정목사님 아델포스입니다.

앞의 댓글에서 한가지 여쭤 보려고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가 핵심이다' 라고 인용하셨는데요.

신학자에 따라선 존재에 혹 행위에 중심을 다르게 두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칼 바르트와 불트만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본 회퍼의 경우엔

존재와 행위의 일치를 말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행위가 아니라 존재가 핵심'이라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지

조금 더 설명을 붙여 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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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0, 2010
*.120.170.250

아델포스 님,

안녕하세요?

뭐 하시는 분이신지 궁금하군요.

기독교 신앙, 신학, 철학, 과학에 이르기까지

쫙 뚫고 계시잖아요.

닉네임에서 벌씨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행위와 존재에 대해서 신학자들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다고 하셨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존재론적인 입장을 보인답니다.

신약성서에서 바울과 야고보가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야고보는 행위 없는 믿음을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실제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 자체가 은총의 우선권을 전제하잖아요.

그것이 존재론적인 겁니다.

하나님이 먼저 행위하시잖아요.

그게 존재론적인 거랍니다.

단지 행위가 있냐 없냐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 주도권을 놓느냐 아니냐의 차이라고 보면 됩니다.

바르트와 불트만이 존재와 행위 문제에서 서로 격돌했다는 말은 제가 처음 듣습니다.

불트만이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아서 존재를 강조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불트만의 실존과 하이데거의 존재는 다른 개념이 아닐까요?

나도 지금 정확하게 짚어서 말할 입장이 아니라서요.

바르트는 철저하게 하나님 은총의 우선권을 주장한 학자이구요.

다시,

신학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전제한답니다.

사실은 헤겔의 역사철학도 이런 계시론에 근거한 거지만요.

어쨌든지 하나님의 계시를 전제한다면

기독교 신학은 존재론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답니다.

존재라는 단어를 어떤 관점에서,

어떤 범주에서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런 짧은 대글로는 전달에 한계가 있겠네요.

본회퍼의 <행위와 존재>(Akt und Sein)도 읽으셨어요?

와, 대단하시네요.

보회퍼는 신학을 완성하기도 전에 일찍 죽는 바람에

신학의 중심에서 약간 비껴 있는 분이에요.

어쨌든지 그가 잘 알려진 "값싼 은총"이라는 개념을 말했기 때문에

존재와 행위를 일치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긴 합니다.

내가 사용한 존재라는 말을 설명해달라고 했지요?

위에서 말한 그대로에요.

하나님의 행위에 주도권을 주는 관점인 거에요.

계시론적이고, 은총론적인 관점이요.

노장의 道에 가까울지 모르겠군요.

행위는 爲구요.

일종의 무위사상에 가까운 거지요.

이 무위사상이 대림절 영성과 비슷하지 않아요? ㅎㅎ

하나님의 행위, 계시, 은총에 기대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개혁, 혁명, 전복의 가능성을 담고 있답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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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낙타

December 27, 2010
*.21.7.81

세례요한의 실족에 관한 설교는 참 많이 들었습니다.

정서적?으로 공감할정도의 자기 현실(사형수)에서 메시아에 대한 실망...

부와 명예를 얻기 원한 세례요한은 아니였다고 봅니다. 그러면 메뚜기와 석청으로 고생하며 살지는 않았겠지요.

결정적으로 비참한 자기 현실에 대한 외침이 아니였을까요?

저도 부자가 되거나 건강하기 위해 예수님을 믿지는 않습니다....만 정말 몸이 아프고 미래가 너무 불안하면 "핼프미"를 외치곤합니다.

 

세례요한이 외쳤던 말중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란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명동에서 자주 보는 "회개하라 종말이 가까이 왔다" 란 말과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장차오실 메시아는 그분 자체가 천국이다는 외침이 아니였을까요? 

삭개오에게 "너희집에 천국이 이르렀다"란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실체요 그분을 모시고 사는 삶이 천국에서 사는 삶이다. (제 묵상책에 적어놨습니다.ㅎㅎ)

 

예언자로써의 역할을 잘 이행하면서도 본인스스로 메시아에 대한 상을 깨뜨리지 못한 세례요한의 모습속에 저의 모습이

비춰보입니다.

 

어렵네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면서 현실에서 사는삶이...

또 예수님도 세례요한 만큼 비참하게 죽으셨으니 할말도 없습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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