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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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
소설 "혀" 공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올라온 김영현의 "문학이여, 나라도 먼저 침을 뱉어 주마" -이것은 '표절 시비'가 아니다 -를
방금 읽었습니다.
오늘 한국문학의 권력 카르텔에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밀고 있네요.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한국의 종교 권력 카르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 앞에 쓴 김곰치의 글과
다른 무명 독자의 글도 재미 있습니다.
왜들 그렇게 글을 잘 쓰는지요.
생각이 유연하고 힘이 있어요.
오늘 글의 키워드는 한 마디로 '작가정신'이더군요.
그게 죽었다는 거지요.
대신 상업주의가 판을 친다고 하네요.
이 글을 놓치면 후회할 겁니다.
좋은 하루.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14133719
소설 "혀" 공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올라온 김영현의 "문학이여, 나라도 먼저 침을 뱉어 주마" -이것은 '표절 시비'가 아니다 -를
방금 읽었습니다.
오늘 한국문학의 권력 카르텔에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밀고 있네요.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한국의 종교 권력 카르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 앞에 쓴 김곰치의 글과
다른 무명 독자의 글도 재미 있습니다.
왜들 그렇게 글을 잘 쓰는지요.
생각이 유연하고 힘이 있어요.
오늘 글의 키워드는 한 마디로 '작가정신'이더군요.
그게 죽었다는 거지요.
대신 상업주의가 판을 친다고 하네요.
이 글을 놓치면 후회할 겁니다.
좋은 하루.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14133719
저도 책임지세욧..
목사님 덕분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그 내용들을 보면서 황우석박사가 오버랩 되더군요.
첫째는, 아시다시피 황박사 랩에서도 데이터의 각색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실험을 하면서 실험 테마의 지향점에서
좀 튀는 데이터는 참 애물단지스럽다는 걸 느끼지요.
그런 데이터는 조금만 다듬으면 되는..
그 어두움의 기운에 맛들이면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조경란작가도 아마츄어들의 작품들을 심사하면서
그 소재를 탐내게 되는 유혹..
그 강렬함을 이기지 못한(?) 듯한 점입니다.
둘째는 중견인 조작가의 작품성이
주작가보다 떨어지지않았다면
그녀는 성공한 것인가?
여성 난자에 대한 반인륜적 태도를 가진 황박사가
실험에 완벽하게 성공하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었나?
혹은 주작가가 누가 보아도 월등한 작품을 써내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안되진 않았을까?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지금과는 틀리지는 않았을까?
등등...말입니다.
목사님 덕분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그 내용들을 보면서 황우석박사가 오버랩 되더군요.
첫째는, 아시다시피 황박사 랩에서도 데이터의 각색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실험을 하면서 실험 테마의 지향점에서
좀 튀는 데이터는 참 애물단지스럽다는 걸 느끼지요.
그런 데이터는 조금만 다듬으면 되는..
그 어두움의 기운에 맛들이면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조경란작가도 아마츄어들의 작품들을 심사하면서
그 소재를 탐내게 되는 유혹..
그 강렬함을 이기지 못한(?) 듯한 점입니다.
둘째는 중견인 조작가의 작품성이
주작가보다 떨어지지않았다면
그녀는 성공한 것인가?
여성 난자에 대한 반인륜적 태도를 가진 황박사가
실험에 완벽하게 성공하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었나?
혹은 주작가가 누가 보아도 월등한 작품을 써내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안되진 않았을까?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지금과는 틀리지는 않았을까?
등등...말입니다.
권력의 메카니즘은 주변이 한통속으로 결합될 때 작동되는 것 같군요.
권력의 생산자가 있으면
거기에 기생하는 사람도 있구요.
거기에 속는 민중들도 있겠지요.
요즘 감리교 감독회장 건이나
통합 총회 건 등이 모두 그런 권력 메카니즘의 생산물들이겠지요.
위 글을 읽으라고 손해 본 시간을 변상해야겠군요.
그림일기 잠시 쉬어도 좋아요.
그런데,
정용섭의 설교비평도 푸코가 말하는 권력담론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던데,
즉 기독교 사상을 중심으로 한 진보신학자들의 권력 투쟁이라는 거지요.
그렇게 보이는 면이 있었나보군요.
재미 있게도요.
권력의 생산자가 있으면
거기에 기생하는 사람도 있구요.
거기에 속는 민중들도 있겠지요.
요즘 감리교 감독회장 건이나
통합 총회 건 등이 모두 그런 권력 메카니즘의 생산물들이겠지요.
위 글을 읽으라고 손해 본 시간을 변상해야겠군요.
그림일기 잠시 쉬어도 좋아요.
그런데,
정용섭의 설교비평도 푸코가 말하는 권력담론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던데,
즉 기독교 사상을 중심으로 한 진보신학자들의 권력 투쟁이라는 거지요.
그렇게 보이는 면이 있었나보군요.
재미 있게도요.
몇해전 '문학권력'이라는 책을 통해서 자본과 권력과 결탁한 한국문학계의 현실을 보여준
강준만님의 글입니다.
저도 정목사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국문학계의 치부를 과연 기독교계가 편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침묵의 카르텔/ 강준만
“네가 무슨 독립군이냐? 이런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냐? 찍히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튀어서' 문제 해결될 것 없다. 무슨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이는 1997년 문학평론가 이성욱씨가 한 문학자본의 횡포를 비판하는 글을 쓰려고 하자 문단의 선후배나 동료들이 이씨를 말리면서 해준 충고의 주요 내용이다.
<중앙일보>에서 문학을 담당하는 이경철 기자는 지난 98년에 쓴 어느 글에서 문인들이 술집에만 모이면 “이 더러운 상업문단 씹기에 대부분을 할애”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자가 “분개만 하지 말고 그럼 네가 직접 비판의 글을 써봐. 실어줄게”라고 원고 청탁에 들어가면 하나같이 “나만 희생양 되란 말인가”라고 항변하면서 거절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용감한 문인이 공개적인 글로 한국 문단을 지배하는 `그 더러운 상업주의'를 비판하면 개탄을 했던 문인들은 박수를 보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바로 여기에 한국 문단, 아니 한국 사회의 비극이 있다. 어떤 비리와 타락에 대해 사석에선 분노하고 개탄을 하면서도 이미 자신조차 그 비리와 타락에 연루돼 버렸기 때문에 그걸 공개적으로 발설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왕따'를 만들려고 하는 게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이경철 기자는 한국 문단의 그런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술자리에서 그 개탄이 활자로 옮겨진 공식적인 글이 돼 나타나면 정말 그들은 `웬 난데없는 놈이냐' 혹은 `평화로운 문단의 자객' 취급 당하며 그대로 매장돼 문학동네에서는 보따리를 싸야 할 것 같을 정도로 문단이 끼리끼리의 이익집단이 돼버렸다.”
이권 및 패권 지향적인 패거리주의를 타락으로 본다면, 한국 문단은 한국 언론보다 더 타락한 동네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언론계에선 동업자들 상호 비판을 금기시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급속히 해체돼 가고 있다. 그러나 문단에선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비판에 임하는 독립적인 극소수 문인들을 여러 문단 패거리들이 합동으로 공격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단의 그런 문제를 감시하고 지적해야 할 사람은 평론가들이다. 그러나 평론가는 출판자본의 `파출부' 또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전락했다는 말이 문단 내부에서 나올 정도로 평론은 제 기능을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문단의 타락을 정당화하고 수호하는 전위대가 되어 가고 있다.
언론개혁은 언로(言路)개혁이다. 언로의 부패를 방지해야 할 최후의 보루는 문인들이다. 그들이 지금처럼 수구 신문과 유착하거나 이익을 주고 받는 평화공존을 고수하는 한 언론개혁은 기대하기 어렵다.
소설가 이문열씨의 잦은 언어폭력이나 중앙일보사의 `미당 문학상' 제정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한국 문단의 현 `스타 시스템' 체제 아래선 `스타'에 대한 비판은 그 `스타'와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신문 및 문학자본과 그 `스타'의 덕을 본 문인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늘 소수의 목소리로 머물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 개혁의 `뇌관'은 `침묵의 카르텔'이다. 각 집단의 구성원들이 개혁의 주체가 되게끔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거니와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체들이 기존 질서의 포로로 잡혀 있어 침묵할 수밖에 없다면, 그들이 발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만들어 주는 건 시민사회의 몫일 것이다.
문학자본과 문학권력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문인들이 삶과 관련된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끔 돕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문인 사랑'이요 `문학 사랑'이 될 것이다.
강준만/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강준만님의 글입니다.
저도 정목사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국문학계의 치부를 과연 기독교계가 편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침묵의 카르텔/ 강준만
“네가 무슨 독립군이냐? 이런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냐? 찍히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튀어서' 문제 해결될 것 없다. 무슨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이는 1997년 문학평론가 이성욱씨가 한 문학자본의 횡포를 비판하는 글을 쓰려고 하자 문단의 선후배나 동료들이 이씨를 말리면서 해준 충고의 주요 내용이다.
<중앙일보>에서 문학을 담당하는 이경철 기자는 지난 98년에 쓴 어느 글에서 문인들이 술집에만 모이면 “이 더러운 상업문단 씹기에 대부분을 할애”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자가 “분개만 하지 말고 그럼 네가 직접 비판의 글을 써봐. 실어줄게”라고 원고 청탁에 들어가면 하나같이 “나만 희생양 되란 말인가”라고 항변하면서 거절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용감한 문인이 공개적인 글로 한국 문단을 지배하는 `그 더러운 상업주의'를 비판하면 개탄을 했던 문인들은 박수를 보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바로 여기에 한국 문단, 아니 한국 사회의 비극이 있다. 어떤 비리와 타락에 대해 사석에선 분노하고 개탄을 하면서도 이미 자신조차 그 비리와 타락에 연루돼 버렸기 때문에 그걸 공개적으로 발설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왕따'를 만들려고 하는 게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이경철 기자는 한국 문단의 그런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술자리에서 그 개탄이 활자로 옮겨진 공식적인 글이 돼 나타나면 정말 그들은 `웬 난데없는 놈이냐' 혹은 `평화로운 문단의 자객' 취급 당하며 그대로 매장돼 문학동네에서는 보따리를 싸야 할 것 같을 정도로 문단이 끼리끼리의 이익집단이 돼버렸다.”
이권 및 패권 지향적인 패거리주의를 타락으로 본다면, 한국 문단은 한국 언론보다 더 타락한 동네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언론계에선 동업자들 상호 비판을 금기시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급속히 해체돼 가고 있다. 그러나 문단에선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비판에 임하는 독립적인 극소수 문인들을 여러 문단 패거리들이 합동으로 공격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단의 그런 문제를 감시하고 지적해야 할 사람은 평론가들이다. 그러나 평론가는 출판자본의 `파출부' 또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전락했다는 말이 문단 내부에서 나올 정도로 평론은 제 기능을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문단의 타락을 정당화하고 수호하는 전위대가 되어 가고 있다.
언론개혁은 언로(言路)개혁이다. 언로의 부패를 방지해야 할 최후의 보루는 문인들이다. 그들이 지금처럼 수구 신문과 유착하거나 이익을 주고 받는 평화공존을 고수하는 한 언론개혁은 기대하기 어렵다.
소설가 이문열씨의 잦은 언어폭력이나 중앙일보사의 `미당 문학상' 제정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한국 문단의 현 `스타 시스템' 체제 아래선 `스타'에 대한 비판은 그 `스타'와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신문 및 문학자본과 그 `스타'의 덕을 본 문인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늘 소수의 목소리로 머물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 개혁의 `뇌관'은 `침묵의 카르텔'이다. 각 집단의 구성원들이 개혁의 주체가 되게끔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거니와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체들이 기존 질서의 포로로 잡혀 있어 침묵할 수밖에 없다면, 그들이 발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만들어 주는 건 시민사회의 몫일 것이다.
문학자본과 문학권력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문인들이 삶과 관련된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끔 돕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문인 사랑'이요 `문학 사랑'이 될 것이다.
강준만/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저는 맨날 이과 책만 읽어서인지 문장도 어렵고 단어도 어려워서 읽다가 머리 쪼개지는 줄 알았습니다.^^
원인 제공을 한 목사님께 당당히(?) 두통약 값을 청구할랍니다.(아직은 안 사먹었으니 혹시 사먹으면요)
뭔 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힘센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아이디어를 훔쳐다가 엄청나게 포장을 해서 마치 다른 것인양 꾸며놓고
또다른 힘센 사람들을 총동원해서 눌러버리려고 하는 시도에 일침을 가한 글인 것 같네요.
일침을 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희망이라고 생각됩니다.
교단에도 일침을 가하는 성도들, 집사들, 장로들, 목사들이 있어야 하고..
정목사님께서 열심히 교단에 침을 놔주고 있는데
침을 맞은 사람들이 도통 치료가 되질 않으니
아마 헬쓰를 엄청나게 해서 마음이 아주 단단한 근육으로 둘러싸여
침이 들어가기도 전에 부러져버리는 것 아닌가 싶어
이제 어쩔 수 없이 많은 일반 성도들이 달려들어 간지럼을 태워
근육에 힘이 빠지는 순간에
장침을 한대 꽂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희한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이고 머리야~~~~
원인 제공을 한 목사님께 당당히(?) 두통약 값을 청구할랍니다.(아직은 안 사먹었으니 혹시 사먹으면요)
뭔 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힘센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아이디어를 훔쳐다가 엄청나게 포장을 해서 마치 다른 것인양 꾸며놓고
또다른 힘센 사람들을 총동원해서 눌러버리려고 하는 시도에 일침을 가한 글인 것 같네요.
일침을 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희망이라고 생각됩니다.
교단에도 일침을 가하는 성도들, 집사들, 장로들, 목사들이 있어야 하고..
정목사님께서 열심히 교단에 침을 놔주고 있는데
침을 맞은 사람들이 도통 치료가 되질 않으니
아마 헬쓰를 엄청나게 해서 마음이 아주 단단한 근육으로 둘러싸여
침이 들어가기도 전에 부러져버리는 것 아닌가 싶어
이제 어쩔 수 없이 많은 일반 성도들이 달려들어 간지럼을 태워
근육에 힘이 빠지는 순간에
장침을 한대 꽂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희한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이고 머리야~~~~
ㅎㅎㅎㅎ
눈사람님도 침 놓는 처방을 하시는 것을 보니 한의사이신가 보네요.
...산다는 것은 죄짓는다는 것이다....순간순간 무수의 가능성이 자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다음 순간에 일어날 가능성 앞에 떨고 있는 전율인 것이다. 이 전율을 잠자코 있는 세계에서는 자유라고 한다. 그래도 잠자코 있을 것인가? 깨어날 것인가? ...장용학의 요한시집을 읽으며,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리는..... 박인환의 시를 암송하며,
풀이 눕는다....풀이 울고, 웃고,...날이 흐리면 다시 눕는.....바람부는 날, 김수영의 시를 읊조리며,
하여, 작가정신 속에 담겨있는 실존과 절망과 생명력을 언어를 통하여 숨을
느껴보던 그 시절의 날들이 쉬이 지나갔나 싶었는데
웬 혓바닥 이야기로 옛날의 독서를 널름거리게 하네요.
그래도 그때는 소박한 절규가 있었고 시대정신이 묻어 있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어디서나 돈과 결탁되어있는 상업정신이 재밌는 기사거리를
장식하게 만드는군요.
목사님 덕분에 오늘은 문학공부까지 하여 한판 추임새
곁들여봅니다. 얼쑤, 좋다!
눈사람님도 침 놓는 처방을 하시는 것을 보니 한의사이신가 보네요.
...산다는 것은 죄짓는다는 것이다....순간순간 무수의 가능성이 자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다음 순간에 일어날 가능성 앞에 떨고 있는 전율인 것이다. 이 전율을 잠자코 있는 세계에서는 자유라고 한다. 그래도 잠자코 있을 것인가? 깨어날 것인가? ...장용학의 요한시집을 읽으며,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리는..... 박인환의 시를 암송하며,
풀이 눕는다....풀이 울고, 웃고,...날이 흐리면 다시 눕는.....바람부는 날, 김수영의 시를 읊조리며,
하여, 작가정신 속에 담겨있는 실존과 절망과 생명력을 언어를 통하여 숨을
느껴보던 그 시절의 날들이 쉬이 지나갔나 싶었는데
웬 혓바닥 이야기로 옛날의 독서를 널름거리게 하네요.
그래도 그때는 소박한 절규가 있었고 시대정신이 묻어 있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어디서나 돈과 결탁되어있는 상업정신이 재밌는 기사거리를
장식하게 만드는군요.
목사님 덕분에 오늘은 문학공부까지 하여 한판 추임새
곁들여봅니다. 얼쑤, 좋다!
우리 나라 학계를 비롯한 어디나 "모범 답안" 이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그 모범 답안이라는 것이 싱싱하게 살아서 꿈틀 거리며 물살을 역으로 타고 올라가는 거친 연어가 아닌, 그냥 수족관에 쌓여서 횟감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그렇다고 광어도 아닌, 모양만 그럴 듯한 도다리 수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모범 답안" 을 넘어선 뛰어난 누군가가 나타나면 모범 답안자들은 자신들의 계(시스템)에 끼지도 못하게 하면서, 그냥 "이단아" 라는 낙인을 찍고 "따"를 하게 되는 거죠... 그들은 오로지 그 "계" 의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요...
누구나 25살 정도를 전후로 해서 노화가 시작됩니다.
40살 무렵부터 노안 증상을 느끼게 되는데 이럴때 무작정 돋보기를 쓰면 안됩니다.
증상에 대한 말씀이 없으셔서 노안인줄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일단 노안이라 가정하고 말씀드리자면
먼저는 보는 거리를 좀 멀리 해서 보시고
책이나 컴퓨터등 근거리 작업을 하다가 가끔은 먼곳을 봐줘야 눈이 운동을 하고 풀어져서
눈이 덜 피로하며 근거리 작업을 지속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책을 들고 손을 쭈욱 다 뻗어야 보인다면 돋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이때 돋보기는 안과에서 처방 받아서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닉네임 앞에 그림에 안경이 씌워져 있는데
만약 안경을 쓰시고 계시고 근시가 있으시다면
근시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근시가 그리 많지 않으시다는 가정하에 말씀드리면
근거리 작업시엔 안경을 벗고 하십시오.
만약 안경을 벗었을때 눈앞에 바짝대야 보인다면 이것은 근시가 많으신 경우로
나중에는 지금 쓰시고 계신 안경보다 더 낮은 도수가 근시 안경을 써야 가까운 것을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해 두루뭉실하게 썼습니다. ^^
40살 무렵부터 노안 증상을 느끼게 되는데 이럴때 무작정 돋보기를 쓰면 안됩니다.
증상에 대한 말씀이 없으셔서 노안인줄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일단 노안이라 가정하고 말씀드리자면
먼저는 보는 거리를 좀 멀리 해서 보시고
책이나 컴퓨터등 근거리 작업을 하다가 가끔은 먼곳을 봐줘야 눈이 운동을 하고 풀어져서
눈이 덜 피로하며 근거리 작업을 지속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책을 들고 손을 쭈욱 다 뻗어야 보인다면 돋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이때 돋보기는 안과에서 처방 받아서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닉네임 앞에 그림에 안경이 씌워져 있는데
만약 안경을 쓰시고 계시고 근시가 있으시다면
근시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근시가 그리 많지 않으시다는 가정하에 말씀드리면
근거리 작업시엔 안경을 벗고 하십시오.
만약 안경을 벗었을때 눈앞에 바짝대야 보인다면 이것은 근시가 많으신 경우로
나중에는 지금 쓰시고 계신 안경보다 더 낮은 도수가 근시 안경을 써야 가까운 것을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해 두루뭉실하게 썼습니다. ^^
세미나 준비하러 논문들고 책상에 앉았다가 목사님 땜에 프레시안에서 두시간을 헤멨어요!
그런데 정작 제 눈을 사로잡은 것은 표절공방보다 기사들의 글발이네요.
어찌나 글들을 맛깔나고 똑부러지게들 쓰시는지, 글쓰는 분들이 다시 보이는 군요.
제가 공돌이라 그런지 아무리 다듬어 글을 써보려해도 밋밋하니 맹숭맹숭 한심할 지경인데
툭툭 내던지는 글귀 한구절 한구절이 재미있으면서도 힘과 예리함이 느껴지는군요.
여기 한 아파트에 사시는 분 중에 저랑 비슷한 연배의 연극영화과 교수님 한분이 계시는데요.
가까이 있어 자주 만나게 되는데 이런저런 자리에 편하게 초청을 해도 잘 안오시더라구요.
웬만하면 얼굴을 봐서 억지로라도 오실텐데 성격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글을 읽다보니
이리저리 안 재고, 노(No)하고 싶을 때 노 할수 있어야 자기 소리를 내는 작품을 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해가 좀 될 것 같네요... (근데 이건 얘기가 좀 안드로메다로 가는 듯 ^^;;;)
전 사실 소설은 별로 읽은 기억이 없는데(-_-;) 40년 독서했다는 분의 글을 읽다보니
이거이거 이제 소설의 세계에 빠져야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어쨌든 목사님 덕분에 좋은 글 읽고 많이 배웠습니다. 잠 못자서 큰일이네요(#.#)
(컴쟁이라 글솜씨는 안되고 이모티콘으로 때웁니당~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