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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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우리를 손짓해 부를 때
민영진 목사님, 저는 교회학교 교사입니다. 제가 맡고 있는 중고등부 학생들이 자살의 유혹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는 생각에 움찔 움찔 놀라곤 합니다. 세상을 비관하여 자살한다는 것은 그나마 조금 이해가 됩니다만 공부를 아주 잘 하여 1등을 한 학생이 성적이 떨어질까 봐 자살하는 경우도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고 자살하는 학생도 있어서, 학생들을 자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서로 친분도 없던 이들이 인터넷에서 만나 자살 파티를 열고 집단 자살을 하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자살을 무슨 유행처럼 취미처럼 하고 있어서 어떻게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안타깝기도 합니다. 지금 이 메일을 쓰고 있는데, 전직 대통령 한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긴급속보를 들으며 더욱 허탈한 심정입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 목사님과 함께 성경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하도답답 올림
하도답 선생님께,
저도 선생님과 같은 심정입니다. 스스로 세상을 버린 우리사회 저명인사들도 평소에는 삶에 대한 외경(畏敬)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다른 이들이 범하는 분별없는 자살을 질책했거나 말렸을 분들입니다. 그런데 극한 상황에서 죽음이 손짓해 부를 때 죽음의 손에 자신들을 기꺼이 맡겨버리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의 안타까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 아니, 노인자살도 걱정스럽게 증가하고 있는 지금, 노년들에게, 그들이 평소에 받은 생명존중의 교육이 아무런 기능을 행사할 수 없는 어떤 극한상황에 처할 때 우리가 무슨 말로 그들의 행위를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최근의 통계를 보니까 우리나라 국민 중에서 한 해에 1만 3천여 명이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하루 35명이 자살을 하는 셈입니다. 노인 자살 통계를 보니까, 1년에 4천 4백여 명입니다. 하루에 12명이 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러한 자살에 사전에 방지할 사회적 안전망이 없다면 그것은 산 자들의 잘못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이들을 볼 때마다 살아있는 산 자들이 죄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 각자가 우리 자신을 우리가 구성하고 있는 사회의 일원이라고 본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집단자아를 형성하고 있다고 인식한다면, 그들의 자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살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자살한 사람도 교회가 “성도”라고 부르며 장례를 치러줄 수 있느냐? 이렇게 묻는 것 역시 집단적 자아에게서 심한 소외감을 느끼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을 두고 물을 수 있는 적절한 질문은 아닙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가 있지요? 참 애절한 찬송입니다. 작사자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자가 생기고 그들이 삶을 포기하는 데에서 어떤 구원과 해방을 느끼고 죽음의 초청에 응한다면, 그들보다는 그들을 그런 사지(死地)로 내모는 우리 산 자들의 사회가 병든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은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 뿐일세”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1만 3천여 곳에서 그만한 수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우리의 찬송은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하도다” 라고 하지만 그들의 실망은 자살이라는 결단으로 발전했습니다.
저는 이 찬송 안에 어떻게 자살을 막을 수 있는 지 그 해답이 주어져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자살을 막을 수 있는 “사랑”이 사회안전망이라는 그물로 짜여지지 못하고 관념적인 언어로만 남을 때는 아무런 힘이 없다고 봅니다. 사랑과 이해가 없는 무한 경쟁 속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좌절과 수치를 스스로 극복하라고 요청하기에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울 것입니다.
간통 현장에서 사람들이 끌고 온 그 여인을 우리의 예수님마저 정죄하셨더라면 그녀는 살 용기를 잃었을 겁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간통죄에 연루되어 그 사회에서 축출되거나 돌에 맞아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남성들의 집단적인 기만성(欺瞞性)을 공격하심으로써 그 여성을 살리셨습니다. 범죄 피의자를 다루는 검찰이 그 피의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피의자 자신이 자신의 생명을 지킬 힘까지 무력하게 해서는 안 되지요. 이것은 검찰 조사를 받고 난 이들 중에 자살자가 적지 않다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반성입니다.
허기를 느끼는 죽음의 신이 우리에게 미소를 보낼 때 그 유혹에 빠지지 않기란 연약한 인간으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에게 빠지지 않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라”고 권면하신 거라고 생각됩니다.
민영진 드림
존엄사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민영진 목사님, 금년 5월에 우리나라 대법원에서는 존엄사(尊嚴死)를 합법화 하는 판결을 내린 바가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우리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존엄사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존엄생(尊嚴生) 올림
존엄생 님,
존엄생 선생님께서는, 모든 사회적 이슈를 성서에다 물으면 성서가 다 대답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계시리라고는 제가 생각하고 싶진 않습니다. 혹시 성서가 이런 사회적 문제에 대한 어떤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면 기독교인으로서 윤리적 결단을 하는 데 참고가 되도록 성서적 견해를 말해 달라는 요청쯤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처음에 저는 “존엄사”란 말이 인권과 생명을 존중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도 그 말이 그렇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만,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가 그 개념을 아무리 존엄하게 정의한다 해도 제 생각에는 존엄사란 타살이거나 자살 둘 중에 하나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사울 왕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고통 속에서 자기 부하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한 것은 자살입니까, 타살입니까, 아니면 존엄사입니까? 기원후 72년 로마 군대에게 포위당했던 마사다 요새의 유대인들은 더 이상 항전할 수 없음을 깨닫고 967명이 집단자살을 하였습니다. 남편들이 먼저 제각기 자기들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자기들의 칼로 죽였지요. 가족들을 죽인 남편들은 제비를 뽑아 열 사람을 선정하여 나머지 남편들을 죽여주게 하였지요. 그 열 사람은 자기들의 사명을 완수한 다음 다시 한 사람을 제비 뽑아 나머지 아홉을 죽이게 하였지요. 그 한사람도 나머지 아홉을 죽인 다음, 식량 외의 모든 물건과 건물을 불태우고 자결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확히 967명이 죽어 갔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살입니까 타살입니까 존엄사입니까? 명예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존엄과 존경을 불러일으킵니다.
우선, 선생님께서도 아시다 시피, “존엄사(尊嚴死)”(dying with dignity, euthanasia with dignity)라는 말 자체가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말이지만, 성서에도 그런 말뿐 아니라 그런 개념조차 없는 말입니다. 이왕 물으셨으니, 십자가에 달리셨던 우리 주님의 경우 외에 성경에 나오는 품위 있는 죽음의 한 예를 말씀드리는 것으로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구약은 죽음을 철저히 비신화화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거룩한 영역이라거나 신적인 영역으로 보지 않습니다. 구약은 전반적으로 죽음을 흉(兇)한 것으로 봅니다. 죽음에는 어떠한 후광(後光)도 둘려 있지 않습니다. 무덤과 마찬가지로 죽음 그 자체도 어떠한 거룩하게 구별되거나 신성한 것으로 봉헌(奉獻)되는 예가 없습니다. 죽은 자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는 예도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었다 해도 죽은 다음에는 일체의 화려한 추모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죽은 자의 세계로 간다는 것은 이 세상 생명의 종말을 의미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죽은 자 숭배도 없습니다. 시체에 닿는 것은 부정 타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은 물 세척으로 깨끗해지지 않고, 정결 예식을 베풂으로써 깨끗해집니다(민 19장). 이런 예식은 죽음의 비신화화(非神話化)나 탈신성화(脫神聖化)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는 죽음에 대한 어떤 신성화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에 임박하여, 인간이 그의 한계점에 이르러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하는 유언에 대한 중요성은 돋보입니다. 야곱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창 48장)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임종(臨終)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맏아들 므낫세와 작은아들 에브라임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을 방문합니다. 요셉은 이제 곧 죽을 자기의 아버지가 그의 손자들을 축복해 주기를 기대하고서 자기의 두 아들을 아버지의 임종의 자리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아들의 마지막 방문을 받은 아버지 야곱이 침대에서 일어나 앉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서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 아버지가 손자들을 축복할 때 오른 손은 맏손자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고 왼손은 막내 손자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도록 그렇게 아이들을 야곱 앞에 세웠는데, 웬 일인지, 야곱은 그의 팔을 “엇갈리게” 내밀어 손자들을 축복합니다. 이것을 보다 못한 요셉이 “아닙니다, 아버지! 이 아이가 맏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오른손을 큰 아이의 머리에 얹으셔야 합니다”(창 48:18) 하고 말합니다마는 그의 아버지 야곱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창 48:19) 하고 말하면서, 가족 모두에게 놀라운 비전을 말합니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너희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창 48:21)
저는 여기에서 두 가지 점에 착안합니다. 하나는, 요셉이, 힘없이 죽어 가는 아버지를 허약한 병자로 보거나 이제는 쓸모없는 인생으로 보지 않고 복을 빌어 줄 능력의 소유자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허약하게 죽어 가는 자가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한 민족의 미래의 변화를 예견하고, 유한한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개인의 한계를 체험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약속을 증언하는 증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죽어 가는 야곱은 맏아들이 작은아들보다 우선권이 있다는 사회적 통념과 같은 상식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맏아들의 기득권을 전도(顚倒)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죽어 가는 사람 야곱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변화할 미래를 기다리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자신이 적극적으로 통제(統制)해야 한다는 것, 죽음의 드라마에서 주연은 죽어 가는 바로 그 사람 자신이라는 데켄 박사의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죽음에서 주연(主演)으로서의 임무를 완벽하게 해 낸 모범적인 예를 바로 야곱의 죽음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 가는 자가 단순히 주인공(主人公)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사회적 통념을 바꾸어 버리는 능력을 발휘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품위 있는 죽음이고, 존엄을 갖춘 죽음입니까!
민영진 드림
콰미씨 유월 말쯤에는 다비아에 올리셔도 됩니다.
ps유월말이 되기가 무섭게 올리네요 ~ 자살에 대해서 기독교적 시각으로 해석해 보는 시간들을 가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자상하신 성품이 답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네요.
정말 목사님의 따스함은 언제나 한결 같으시네요.
늘 건강하시길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