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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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상 1월호에    09년 가을  청파동 감리교회에서  발표한 민영진 박사님의 나의 설교를 말한다라는 글이 실렸습니

 

다. 그 포럼회에 정목사님과   김기석 목사님도 함께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하네요.   그날   참석은 했지만  몸이 좋지 않아서

 

질문을 못드렸는데 기회가 된다면  박사님께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약속한대로  다비아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못이라는 시와 박사님의 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술에 마약을 풀어
어둠으로 흘리지 마라.
아픔을 눈감기지 말고
피를 잠재우지 마라.
살을 찢고 뼈를 부수어
너희가 낸 길을 너희가 가라.
맨발로 가라.
숨 끊이는 내 숨소리
너희가 들었으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마 사박다니
시편의 남은 귀절은 너희가 잇고,
술에 마약을 풀어
아픔을 어둠으로 흘리지 마라.
살을 찢고 뼈를 부수어
너희가 낸 길을 너희가 가라.
맨발로 가라. 찔리며 가라

-김춘수

저는 고난주간 설교를 하거나 사순절 개인적 명상을 하면서도 그 끔찍한 십자가의 고통을 쉽게 관념화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죄수들이 고통을 잊기 위해 마취제를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니면 종교를 아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신학화시키고 관념화시켜 버리는 것은 마치 마취제를 마시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저에게 십자가는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관념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아무런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시적 화자의 입을 빌어, 내가 시편 22편 1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읊었으니 나머지 구절은 너희가 이어보라고 합니다. 1절은 우리 주님께서, 2절은 내가, 3절은 다시 주님께서, 4절은 내가, 5절은 주님께서, 6절은 내가 읊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숨을 거두시면 나머지는 21절까지는 내가 다 이어서 읊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 생애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飜譯)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34). 제 설교 인생 40년은 여기 “번역하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역사적 금요일 오후에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시편 22편 1-21절을 교독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구름 위 땅 위에/ 하나님의 말씀/ 이제는 피도 낯설고 모래가 되어/ 한줌 한줌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소개한 두 편의 시를 쓴 시인 김춘수는 교인이 아닙니다. 교회 밖에서 라이나 마리아 릴케를 읽으면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서 창녀 소냐와 같은 사람의 삶과 살인자 라스꼴리니코프 같은 등장인물들을 관찰하면서, 또 조르주 앙르 루오가 그린 여러 예수의 여러 그림들을 보면서 예수를 만났던 인물입니다.5) 저는 그의 시와 수필을 감상하면서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그의 예수 시 목록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관심을 40년 동안의 나의 설교에서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에 대한 친밀성이 그 시인에 비해 저의 경우가 너무나도 빈약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고, 목사요, 신학자요, 설교자요, 성경번역인 너에게서는 내가 일찍이 김춘수 시인에게서 보는 이런 믿음을 못 보았다”
동역자 여러분, 우리의 설교에서 “구름 위 땅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는 피도 낯설고 모래가 되어/ 한줌 한줌 무너지고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못다 읊으신 시편은 우리가 함께 잇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앞에서 비기독교인들의 믿음을 가리키시면서 너희 목사들에게서는 이런 믿음을 못 보았다고 하시는 질책이 우리를 각성시켰으면 좋겠습니다.

 

 

못이라는 시에서  서정적 자아는  예수의 고통을  타자화 대상화 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고통당하는  예수가 바로 자

 

신인 것입니다.   김춘수  특유의 관계와 존재가 잘 녹아들어간 작품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학성이 곧  신학은 아닐 것

 

입니다.   그것은  서정적 자아가  영적 자아가 아니라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하겠지요.왜 박사님께서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서정성을 찾는 것인지   솔직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근본주의 교회에서  이미 많이 하고 있습니다. 

 

열린 예배에 참석해 보면 (특히 사순절 기간 즈음에)  예수의 십자가에 관련된 복음성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십자가 사건이  감상적으로 

 

다가 오는 것을  경계할 뿐입니다. 

 

  박사님께서는  십자가를 관념화, 신학화 시키는 것이 문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문제겠군요.   사도 바

 

울은  십자가를 관념화 신학화 시키신 분이라고 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십자가를 이야기 하면서 십자가의 고통을  주제

 

로 삼지는 안았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부끄러운 것이었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

 

다. 아마 바울에게 십자가는  예수의 실패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박사님!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예수가 십

 

자가형을 두고 고민한 것이 자신에게 다가올  육체적 고통을 예상하고 그것이 무섭고 두려워서였을까요?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이미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고  나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동료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분들이 많이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들 보다 못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습니다.  

 

몇년 전 개봉한  패션오브 크라이스트 영화를  보았습니다.  '  저는 그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를 죽였어.

 

예수의 고통은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이야' 라는  자책과  죄책감을 끊임없이 확대시키고  재생산해내려는 의도 밖

 

에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박사님!   김춘수 시인의 못을 읽고 난  후   박사님은   예수님의  고통이 더 직접적으로 다가

 

옵니까? 아니면 여전히 피상적으로 다가 옵니까?   그도 아니면 여전히 피상적이지만  예전 보다는 덜 피상적으로 다가옵니

 

까?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개량적 기대 밖에 할 수 없을텐데  그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십자가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할까요?  저는 먼저   하나님의 실패를 말하고 싶습니다.    권력으로, 무력으로  통치하

 

시는 하나님이 아닌    굴욕으로서 실패로서  세상과 맞서는  하나님의 무능력함   그것이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살렸습니

 

다.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의 고통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케리그마가 감춰진다면 그야 말로 주객전도가 아닐까요?   오

 

늘 날 한국기독교는 신학무용론에 빠져있습니다.   죄송한 말인지 몰라도 한국기독교는   십자가를 이야기 하면서 십자가가

 

뭔지도 모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도 많습니다.   마치 십대 소녀들이   맹목적으로   연애인을 쫓듯이  예수를 쫓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또한 감상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서 머무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하는데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학적 퇴행이 언제까지 계속 될지 모르겠습니다.

 

 

 


 


profile

도도아빠

2011.01.29 20:11:35
*.121.215.165

민 선생님의 전체 글을 읽지 못했기에 맥락을 잘 모르겠네요. 다만 콰미님의 글에 궁금증이 있습니다. 문학이 곧 신학은 당연히 아니고, '문학성'이 '신학'은 아니지요. 그러나 때로는 '문학성'을 통해 '신학'적 내용이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요? '신학'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저 멀리 멀리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신학이라면, 저는 반갑지 않을 것 같습니다. 또 '서정적 자아'와 '영적 자아'도 딱부러지게 나눠지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두 가지 특성이라고 흔히 말하는 초월성과 내재성을 생각해봐도, 문학(성) 속에 신학이 녹아들어갈 수 있고, 영적 자아가 서정적 자아를 통해 나타나고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위에 인용한 민 선생님의 글만 놓고 볼 때, 대략 이해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관습적인, 그래서 퇴행적인 기독교의 신앙, 믿음을, 교회 밖의 작가를 통해 살펴보시는 것 아닐까요? 우리의 믿음은 늘 새롭고 또 새로워야 한다는 것 아닐까요? 이른바 믿는 자들에게는 그 어떤 사람도, 무신론자라고 해도, 살펴보고 대화하고 받아들이며 신앙을 견실하게 해야 한다는 뜻 아닐까요? 몇 자 끄적여 봤습니다.     -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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