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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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목사가 미국성서학회 역사적 예수분과 위원장을 역임한 크로산을 신약학계의 아웃사이더로 간주하며 또한 평생을 바친 그의 예수 연구를 마치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한 기이한 해석이며 계산된 도발인 것처럼 폄하한 것을 읽으니 새삼 눈물이 난다.
2. 지난 10여 년 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를 소개하느라 나로서는 진이 빠질 만큼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결국 한국교회의 몰상식과 폭력성의 온상인 성경문자주의와 반지성주의와 교회주의는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예수의 타는 목마름과 하나님나라운동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더군다나 4대강과 핵발전소 문제만이 아니라 눈앞에 닥쳐온 기후재앙의 현실 앞에서 특히 우리 세대가 저지르고 정치적 저항을 통해 막아내지 못한 재앙에 대해 하나님의 뜻으로 돌림으로써 그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는 무책임한 교회가 철저하게 버림받을 것을 생각하니, 불의한 세상을 수리하는 일에 믿을 자들은 너희들뿐이라고 그 일을 맡기신 분의 심정을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3. 많은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상당수 신학생들조차 신학을 평가하는 가장 큰 기준은 자신의 신앙체험과 기독교 전통을 가장 설득력있게 해명하는 것인가, 혹은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의 역사 속에 나타난 풍성한 생명을 오늘날 가장 적절한 운동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닌 듯 하다. 오히려 어느 신학이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는 신학인가 하는 것이 평가의 기준이다. 20년 전에 종교재판으로 신학자 두 사람을 생매장할 때도 상당수 목회자들은 강건너 불구경하듯 했었다. 종교다원주의신학과 포스트모던신학이 자신들의 목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종교재판에 신학적으로 동의한 목회자들은 종교재판의 공모자들인 셈이며 이런 교회주의와 성장주의 목회자들은 오늘도 무수하게 많을 것이다.
4. 이런 점에서 언제나 목회자들에게 신학의 핵심적인 문제는 교회론일 것이다. 교회와 목회를 일차적으로 돌봄(pastoral care)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의 창조적인 계승으로 볼 것인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읽을 마땅한 신학 책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목회를 일차적으로 돌봄으로 볼 경우 신학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되지 않기 마련이다.
5.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전체제의 관점에서 정의되어,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이거나 신앙공동체로 정의되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간에서 연결하는 브로커체제이며 세상 속에서 게토에 불과하다. 교회에 대한 이런 전통적인 정의는 실제로는 기존종교체제, 즉 성전체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의이며,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제들이 자리잡고 있다.
6. 예수는 성전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 즉 안식일, 예배, 제사장, 성전, 정결법, 교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그 성전체제의 핵심적 요소들을 비판하고 무시하고 뒤엎은 것 때문에 예루살렘성전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이 예수를 죽이는 데 앞장섰다.
7. 그 이유는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과 하나님나라 중심의 신학이 성전체제의 종교비지니스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를 죽인 것은 성전체제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굳게 믿었던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이었으며, 그 밑에 깔린 계산은 돈이었다.
8.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교회비지니스에 도움이 되는가? 많은 목회자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솔직히 예수처럼 살고 싶지도 않고 예수처럼 살라고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싶지도 않다고 고백하는 목회자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를 강조하는 것이 교회비지니스에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1990년대 이후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진보적인 작은교회 운동(Hal Taussig, A New Spiritual Home: Progressive Christianity at the Grass Roots, 2006)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직한 예수에 목말라하고 있으며, 교회비지니스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날 많은 평신도들도 크로산, 로버트 펑크, 마커스 보그, 존 쉘비 스퐁, 월터 윙크, 고든 카우프만의 책들을 읽고 신학적인 회심과 해방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9. 더욱 중요한 것은 목회자들 자신의 당당한 정체성이다. 크로산과 같은 학자들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정직하게 예수를 믿고 따르는 목회자들은 교회가 아무리 작아도, 생계가 아무리 힘겨워도, 세상을 짓밟는 악한 권세들에 맞서서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을 계승한다는 우주적인 사명감과 자부심과 당당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10. 교회를 하나님나라운동으로 정의할 경우, 예수가 이 땅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던 영적인 권세들(그 핵심은 제국과 결탁한 지배체제)과 맞서 싸우고 그분이 나누려했던 "풍성한 생명"운동을 오늘의 현실에서 창조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나아가는 생명정의평화운동이며 나 개인적으로는 기후문제와 식량문제가 가장 시급하다고 본다.
11. 지질학적으로 생태대를 향해 출애굽하는 과제를 위해 나아갈 때 지금 우리 앞에 버티고 있는 반생명적 반민중적 사탄의 세력은 모세나 예수나 바울이 맞서 싸웠던 세력보다 수십 배 수백 배 훨씬 더 막강한 세력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부름받았다고 믿는 사람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지혜와 힘을 뫃아도 모자랄 판국에 사소한 문제로 에너지를 낭비할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아쉽게도 위글에 전적인 동의를 할수가 없군요... 제 수준이 낮아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이 달라서 그럴수도 있겠지요.. 어찌보면 흰구름님이 진이 빠질정도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신것은 혹시 혼자만의 세계에 있기 때문은 아닌지요.. 물론 이렇게 말씀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난 여러날 흰구름님의 글을 봐왔지만, 항상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홍보의 형태였던것 같습니다. 좋은 봄날입니다. 이런날은 가끔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것을 잊고 꽃을 즐기는것도 삶의 한형태인 것 같습니다. 너무 역사적인 예수께서 행하신 저항에 촛점이 맞으면 삶이 고단할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행복해지도록, 또는 자유를 얻도록 자신이 저항하신것이지, 우리가 자신과 같이 저항하라고 저항하신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흰구름님의 주장이 다 틀렸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