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6일 바리새인과 헤롯당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12:13)
앞에서 언급된 포도원 농부의 비유와 이제 언급하게 될 가이사이에 세금을 바치는 문제가 직접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서로 독립적 전승이 마가복음 기자에 의해서 하나로 묶여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농부의 비유로 비난당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걸고넘어지기 위해서 사람을 보냈다고 설명한 것이겠지요.
포도원 농부의 비유로 예수님에게서 비난받은 이들은 산헤드린의 핵심 멤버들로서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정탐꾼 역할을 하라고 보낸 이들은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다섯 종류의 세력이 늘 한 통속은 아니었습니다. 악을 도모하는데 의기투합을 한 것이지요.
악한 일에 마음이 쉽게 하나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로 생각됩니다. 하나는 악을 통해서 서로가 이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많이 얻는 사람도 있고 적게 얻는 사람도 있겠지만 악을 통한 이득이라는 점에서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크게 효력을 발휘합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본질 문제인데, 인간이 본래 악에 흥미를 강하게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상대방이 파괴되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심리를 새디즘이라고 합니다. 이런 심리는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대개는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는 않지만, 심한 경우에는 지장을 받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인 교육을 통한 양심이나 법적인 강제력을 통해서 그런 심리를 제어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완전한 구원은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혀 새로운 생명인 부활생명으로 변화되는 때를 기다려야겠지요.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았으니 오늘 우리는 악이 우리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기도해야겠습니다.
창조, 창조자, 인간, 타락....
누가 이런 문제를 속 시원히,
더 정확하게는 우리 수준에 맞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설명을 들으려고 대글을 단 것도 아니지요?
그래도 한 마디만 하면요.
성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질그릇으로 비유합니다.
왜 이런 본성, 한계을 안고 살아가게 만들었냐 하고 따질 자격이
우리에게 없다는 거지요.
그게 참으로 어처구니 없이 들리지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답니다.
이렇게 돌려서 생각해보세요.
지금 인간이 왜 이런 방식으로 진화해 왔냐,
좀더 완전한 존재로 진화해오지 못하고 말이야, 하고
질문할 수 있을까요?
질문할 수는 있지만 따질 수는 없어요.
지금 이게 우리의 현존이거든요.
실존철학자들이 그래서
인간을 피투적 존재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던져진 거라구요.
그 모든 것의 해명은 종말에 완전히 드러나겠지요.
지금 우리는 투쟁하면 살 뿐입니다.
병, 허무, 무의미, 고통, 외로움, 죽음 등과 싸우는 거지요.
그 투쟁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삶의 태도구요.
그런데 이 투쟁이 우리만의 투쟁이 아니라는 게 중요하지요.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이 먼저 싸우셨지요.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방식으로
그런 모든 인간의 저주, 악과 싸운 거지요.
그리고 부활의 생명이 일어났어요.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주도권을 따라갈 뿐입니다.
우리의 안의 파괴적인 세력이
이미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세요.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