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서간(14)

조회 수 3721 추천 수 2 2010.05.29 23:10:46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우리는 성실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것을 신 앞에서 인식한다. 신 자신이 우리를 강요하여 이런 인식을 하게 한다. 이렇게 성인이 된 세상은 우리로 신 앞에 있는 우리의 상태를 바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신은 우리들이 신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신은 우리를 버리는 신이다.(막 15:34) 신이라는 작업가설 없이 우리를 이 세계에 살게 하는 신은 우리가 항상 그 앞에 서 있는 신이다. 우리는 신 앞에서 신과 함께, 신 없이 산다. 신은 자기를 이 세상에서부터 십자가로 추방한다. 신은 이 세계에서 무기력하고 약하다. 신은 바로 그렇게 해서,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를 돕는다. 그리스도가 그의 전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약하심과 고난에 의해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은 마 8:17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본회퍼, 옥중서간, 223 쪽, 1944년 7월16일)

 

     그대는 오늘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본회퍼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오. 자칫하면 영적 혼란에 빠질 수 있으니 말이오. 본회퍼 신학의 키워드는 ‘비종교화’라는 사실은 앞에서 몇 번 언급했소. 비종교화가 요청되는 이유는 성인이 된 세상에서는 더 이상 종교적인 욕구가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오.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는 않소. 한국과 값싼 복음주의에 빠진 미국교회가 그렇소. 이런 문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이야기 하고 오늘은 그만두기로 하겠소. 성인이 된 세상은 이제 하나님이라는 보호자 없이 살아갈 수 있어야 하오. 아이들이 자라면 부모 곁을 떠나야 하듯이 하나님 없이 살아야 하오. 본회퍼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상황을 우리가 인식하도록 하나님이 이끄신다는 거요. 그것이 또한 하나님 앞에 서는 거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거요.

     왜 하나님 없이 살아야 한다는 건지 그대는 잘 알고 있을 거요.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어린아이를 돌보듯이 사람을 돌보는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거요. 쉽게 말하리라. 옛날에는 아프면 무조건 신의 도움을 받아서 치료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병원에 간다오.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이 옛날에는 신부나 목사에게 안수 기도를 받았지만 지금은 신경 정신과에 가는 거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것이 이제는 아무 필요가 없게 된 거요. 당연히 하나님 없이 살아야 하는 거요.

그렇다면 옛날에 믿었던 하나님과 지금 믿는 하나님은 다른 분이라는 말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소. 아니오. 지금은 옛날에 몰랐던 것을 조금 더 알게 된 것뿐이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옛날에도 다 알고 있었지만 신앙생활의 현장에서 오해되어 있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한 것뿐이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만 매달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능력에 관심이 없었던 거요. 성서는 이미 하나님의 무능력을 말하고 있소. 본회퍼가 짚은 대로 십자가는 바로 그것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소.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오.

     그대는 두렵지 않소? 하나님이 ‘없는’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하나님은 무능력으로 능력을 보인다는 사실이 말이오. 어린아이들이 젖을 뗄 때 큰 충격을 받소. 어머니가 더 이상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낄 거요. 어머니가 매정하게 젖을 뗀다고 해서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지 않소. 젖을 더 이상 얻지 못한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마시오.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소. 그분의 권능도 변함이 없소. 그러니 하나님에게 우리의 종교적 욕망을 투사시키지 마시오. 그대는 전혀 새롭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거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2010년 5월29일)


[레벨:28]첫날처럼

2010.05.29 23:21:15

너무도 깊은 본회퍼의 통찰에 전율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무능과 약함...

 

힘과 능력으로만 선포되는 하나님이 대세인 한국 교회에서 전혀 씨도 안먹힐 이야기입니다만...

 

정말 깊은 영적인 울림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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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2010.05.29 23:23:43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이 말이 드디어 이해가 갑니다..

 

저도 전율을 느끼며.....

 

역시 천재 본회퍼입니다..

 

 

[레벨:18]눈꽃

2010.05.30 02:13:35

정성훈님! 첫날처럼님!

이하 동문이요~~

제가 하고 싶었던 말 고대로 하셨습니다

[레벨:20]미들타운

2010.05.31 11:10:05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말장난이 아니었네요

지적유희도 아니었고...

가슴속은 차오르는데 할말은 없습니다

얼마나 이해하며 따라가는지는 모르나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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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10.05.31 23:47: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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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2010.06.01 03:28:05

 저도 방금 검색해 보았습니다

요즘말로 참 없어 보이는 모습이네요

제목이 없었다면 절대 누군지 몰랐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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