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서간(15)

조회 수 2877 추천 수 2 2010.06.01 23:22:09

 

따라서 인간은 사실 신을 상실한 세계 안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세계의 무신성(無神性)을 종교적으로 숨기거나 신성화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세속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며, 바로 거기서 신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세속적으로’ 살아도 된다. 즉 잘못된 종교적 억압이나 구속에서 해방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일정한 형식에서 종교적이거나 종교적으로 자기를 규정하는 것을, 즉 죄인이라든가 회개한 자라든가 성도라는 식으로 자기를 규정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런 종교적 유형의 인간형이 되게 하지 않고 인간이 되게 한다. 종교적 행위가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삶에서 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을 만든다.(본회퍼, 옥중서간, 226 쪽, 1944년 7월18일)

 

     그대는 본회퍼의 글을 읽으면서 좀 꺼림칙할지 모르겠소. 그리스도인의 특성이나 기독교의 특성이 모두 허물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테니 말이오. 이런 오해를 조금 풀어주기 위해서 단어 하나를 설명해야겠소. 내게 원서가 없어서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본회퍼가 ‘세속적으로’라고 쓴 단어는 아마 ‘weltlich’(벨트리히)일 거요. 독일어 Welt는 영어 World요. lich는 명사를 부사나 형용사로 바꿔주는 어미요. 세속적이라는 우리말은 좀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오. weltlich는 훨씬 적극적인 의미요. 세속이 성속 이원론적 의미가 강하다면 세상은 그걸 하나로 보는 의미가 강하오.

     본회퍼는 종교적인 영역에 안주하는 삶의 태도를 비판한 거요. 종교적인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것에 대한 부정이오. 인간의 불안, 두려움, 죄책감을 종교적으로 해소해주는 역할에 만족하는 기독교의 자폐적 태도를 거부한 것이오. 그의 이런 주장은 창조론이나 구원론이나 종말론의 관점에서 정당하오. 하나님의 창조는 이 세상 전체요, 하나님의 구원도 세상 전체에 해당되고, 종말에 이 세상 전체가 변형될 것이오.

     오해는 마시구려. 종교적인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오. 우리는 여전히 기도해야 하오. 본회퍼가 얼마나 진지하게 영적 훈련을 수행했는지 알고 계실 거요. 그는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젊은이들과 공동체 생활도 했소. 우리의 예배와 찬송과 말씀읽기와 기도와 성만찬은 본회퍼가 말하는 세속적인 삶과 분리되는 게 아니라오. 이렇게 정의를 내리면 될 것 같소. 경건의 종교성이 아니라 ‘경건의 세상성’이라고 말이다. 혹은 거룩한 세상성이오. 내일은 지방 선거와 교육감 선거가 있는 날이오. 거룩한 세상성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역사의식을 갖고 투표에 임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하오.(2010년 6월1일, 화요일, 맑음, 차가운 밤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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