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가 뭐꼬?

조회 수 2910 추천 수 1 2010.06.17 23:10:57

 

     내 컴퓨터 책상 뒤쪽의 책장에 몇 장의 씨디가 눈에 띄오. 씨디 재킷에 먼지가 뽀얗게 앉았소. 아마 몇 개월은 손도 대지 않은 것 같소. 거기만이 아니오. 그대가 깔끔한 성격이라면 내 서재를 보고 기절을 할지 모르겠구려. 곳곳이 먼지요. 서재 청소는 대개 책상 위의 물건을 정리하고 진공청소기로 방바닥 먼지를 처리하는 것으로 끝이오. 두 주에 한번은 물걸레로 책상과 컴퓨터, 그리고 복사기 등을 닦소. 책장은 거의 손을 못 대오. 그러니 구석구석의 먼지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소. 평소에 내 눈에는 먼지가 눈에 잘 안 들어오고, 보여도 그런가보다 할 뿐이지 불편한 게 하나도 없소. 아마 천성이 게으른 탓인지 모르겠소.

     언젠가 티브이에서 시각장애인 부부의 사는 모습이 방영된 적이 있소. 그런 장애를 안고 있어도 그들은 밥 잘해 먹고, 아이를 잘 키우고 있었소. 어느 날 어머님이 집에 놀러왔소. 아들과 며느리 몰래 물걸레로 화장대 등등, 구석진 곳의 먼지를 닦아내고 있었소. 시각장애인 부부에게는 하나도 문제가 안 되던 먼지가 어머니의 눈에는 크게 문제가 되었단 말이오. 그 장면에서 나는 먼지를 그냥 안고 사는 것도 괜찮구나 하는 평소의 생각을 굳혔소. 그까짓 먼지를 안 보고 살면 되지 않겠소?

     먼지가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을 거요. 침대 매트리스 먼지는 진드기가 번식하는데 최적의 환경이라는 말도 있긴 하오. 그 외에도 먼지는 호흡기 질환의 원인이기도 하오. 가능한 집안에서 먼지를 없애는 게 건강하게 사는 첫 걸음일지도 모르겠소. 나도 먼지 구덩이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소. 내 말은 지나친 청결보다는 어느 정도 먼지를 안고 사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는 거요. 현대의 청결한 환경이 오히려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소.

     다른 말이 길었소. 씨디 재킷에 묻어 있는 저 먼지가 도대체 뭐요? 그게 어디서 왔소? 먼지의 정체가 각 가지이니 내가 그걸 일일이 밝혀내기는 힘드오. 어떤 물건에서 잘린 미세한 조각이라고 말하면 될 거요. 책에서 잘린 조각일 수도 있고, 휴지 조각이거나 낡은 옷의 조각일 수도 있고, 흙이 바람에 날려 온 것일 수도 있소. 봄의 불청객인 황사는 멀리 중국의 한 사막에서 계절풍을 타고 우리나라까지 날아온다지 않소. 지저분해 보이긴 하겠지만 먼지를 이상한 눈으로 볼 건 하나도 없소. 그것이 다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라오.

     그대는 잊지 마시구려.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서 먼지를 우습게보고 있는 우리도 결국 먼지가 되고 만다오. 흙으로 돌아간다는 성서의 말을 객관적 사실로 생각해야만 되오. 씨디 위에 깔려 있는 저 먼지가 바로 나의 미래요. 더 근본적인 또 하나의 사실도 기억하시구려. 지구는 우주의 차원에서 볼 때 먼지에 불과하다오. 지구라는 먼지 안에 놀라운 생명 현상이 일어나고 있소. 보기에 따라서 대단하기도 하고, 별 것 아니기도 하오. 우리가 먼지로 돌아갈 날이 속히 오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당황하지 말시구려. 그게 온 우주요. (2010년 6월17일, 목요일, 한국 축구팀이 아르헨티나에 1:4로 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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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10.06.18 09:18:55

휴가 다녀왔더니 집안 곳곳에 먼지가 소복쌓였습니다.

깔끔한 성격의 아내는 기겁을 하고 이틀을 쓸고 닦더군요.

발바닥에 뽀송뽀송한 기분이 들지 않으면 못 견디지요.

 

그 많은 먼지가 정말 어디서 왔던지.

합정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다 읽은 시한편 찍은 것 있어서 올립니다.today.jpg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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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10.06.18 22:5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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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10.06.19 08:28:29

먼지의 추억.

무화의 진행중에서 마지막 단계.

오늘이 바로 바위가 티끌로 되는 그날인 것을 알고

그렇게 먼지처럼 우리의 존재를 가볍게 하면

바람에 날리는민들레 홀씨처럼

자유롭게 세상을 훨훨 날아가며 살아갈 수 있겠지요.

 

오늘이 바로 그날인 것을 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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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0.06.18 23:18:53

바로 오늘이

그날

 

저 시인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저 시구만 보면

종말론적 사유가 풍부한 분이네요.

시,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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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10.06.19 08:39:15

네. 목사님.

바로 그 구절에 카메라든 손이 올라갔습니다.

 

역으로 들어오는 열차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타고 사라지는 그 역에서

이 땅에서의 사람이 가지는 삶의 무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눈에 들어온 싯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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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프시케

2010.06.18 11:09:18

목사님의 묵상과 시인의 시가

절묘하게 어울리네요

겸손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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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2010.06.18 12:34:41

하, 오늘은 비가 와서 먼지가 나지 않겠죠.

물론 실내에는 여전히 있겠지만...

먼지를 통해 느껴지는 의미의 크기를 생각하니

모든 만물 어느것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네요....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나무를 통해 그들의 겸손과

넉넉함과 생명의 힘을 느끼는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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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10.06.19 08:41:31

제가 인도에서 느끼는 생명의 힘을

달팽이님도 한국에서 느끼고 계시군요.

지리산 산자락을 감도는 비내려 서늘한 바람이

이곳 따땃한 델리의 하늘에도 불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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