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를 사실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는 말이 아니다. 성서를 읽을 때는 사실(fact)과 사건(event)을 구분해야 한다. 사실은 신문기자가 취재해서 보도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사건은 역사학자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하는 이야기이다. 물론 성서는 사실이라기보다 사건이다. 사실과 대비된다는 점에서 사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게 정확한 건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영어 event는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행위 같은 것들을 가리킨다. 성서의 심층을 그 단어가 충분하게 알려주지 못한다. 독일어 Ereignis(에어아이그니스)가 더 낫다. 에어아이그니스는 사건으로 번역되긴 하나 생기(生起)라는 뜻이 강한 단어다. 역동적인 힘이 실린 사건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의 소명 이야기는 시와 같다. 시어는 사실을 넘어서 훨씬 근원적인 사건을 가리킨다. 시를 사실의 차원에서만 읽는 사람은 시를 모르는 사람이다.
예컨대 여기 서정주 시인의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는 시구가 있다 하자. 여기서 바람을 물리 현상인 그 바람이라고 읽는다면 그는 이 시의 근본 의미를 놓치는 거다. 서정주의 바람은 자기를 자기 되게 한 어떤 근원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언어일 수도 있고, 존재일 수도 있고, (이건 억측인데) 바람기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고, 시작(詩作)일 수도 있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이지만, 나는 서정주의 이 말이 기독교 신앙에도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를 나 되게 한 건 대부분이 루아흐다.’ 루아흐는 바람, 영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다. 그건 생명의 힘이다. 루아흐가 있으면 생명이 있는 거고, 없으면 생명이 없는 거다. 루아흐가 떠나면 사람은 죽는다. 죽을 때 숨이 멎는 현상과 같다. 서정주 시인이 이런 성서의 의미를 알고 저런 말을 했는지, 천국에 가서 그를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모세의 떨기나무 소명 장면을 시처럼 읽어보라. 모세는 어떤 절대적인 힘을 경험했다. 지난 사십년 동안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의 데릴사위로 살면서 그의 영혼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이집트에서 고통당하는 동족 이스라엘이었다. 미디안 광야를 오가는 낙타 행상들을 통해서 그쪽 소식을 전해들을 때마다 그의 영혼은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는 양을 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모세에게 양을 치는 일은 수행이었을 것이다. 사실 준비만 되면 인간의 모든 행위가 수행이긴 하다.)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자신의 운명을 던져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분명해지던 어느 날 그는 호렙 산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 서게 되었다. 이상한 현상 앞에서, 사실은 그게 자연현상이지만, 그는 민족 구원에 대한 사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경험했다.
이런 말을 듣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모세의 호렙 산 경험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이 아니라 단지 모세의 결단에 불과한 거냐 하고 말이다. 그게 아니다. 하나님 표상은 인간의 심리적 투사가 아니다. 하나님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대상도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분이기에 우리의 생각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지 <만들어진 신>이 아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과 그의 계시 자체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그분과 그분의 계시에 대한 증언인 성서의 소명 이야기를 설명하는 중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우리는 그 이야기를 사실 언어(fact language)가 아니라 사건 언어(event language)로 읽어야 한다.
지금의 한국에서 모세와 같은 소명을 받았다고 했을때, 모세와 같은 역할이 가능할까?
후기 이스라엘에도 소명을 받은 선지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개혁시킨 선지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예수님 조차도 세상기준으로는 실패하였다.
이런 면에서 보면, 세상에서 말하는(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목회자로서의 성공은 소명과 무관하다.
현실적으로 보면 소명 받은 대로 살면(소명을 받았다고 했을때), 세상에서 말하는 이룬것도 없이 어려움으로 시작해서 어려움으로 생을 마칠 확률이 굉장히 높은것 같다.
지금 성공했다는 목회자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요구 조건보다 세상 사람들의 요구 조건을 만족 시키는 역량을 가지신 분들이 거의 대부분인 것같다. 예수님의 조건과 반대인 조건을 추구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한다.
제가 보기에는 목사의 길보다 힘들고 어려운 길도 보기 어려운데 그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시려는 분들이 그 어려움을 알고 가려는 것인지 혹은 거짓 목사의 길을 가려는 것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