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교회의 목사들도 이런 위기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소명의식의 교정과 심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월과 더불어 목회의 자신감이 붙으면서 자신의 업무가 어디에서 연원하며 어떤 힘에 의해서 존속되는지를 까마득하게 잊는다. 소명의식이 소실점 너머로 사라진다. 늘 초심을 유지하는 목사들도 물론 있다. 모든 목사들을 매도하려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흐름이 그렇다는 뜻이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이에 대한 단서를 한 가지만 말하자. 목사들에게는 모임이 많다. 공사(公私)에 걸쳐서 종류도 다양하다. 공적인 모임도 성격이 서로 다르다. 노회나 총회, 그리고 각종 위원회와 부서 모임도 있고, 목회와 설교나 신학 세미나 같은 모임도 있다. 공적이기도 하고 사적이기도 한 친목 모임도 있다. 재미있는 건 이런 모임에서 신학적인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적인 모임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일반 사람들이 저녁에 술집에 모여 잡담하는 수준의 대화와 별로 다를 게 없다. 기껏해야 목회 정보의 공유에 머문다. 심지어는 문제를 일으키는 장로를 처리한 무용담으로 대화가 활기차게 돌아간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정치 장로들도 모여서 그런 말만 할 것이다. 목사 흉보기, 목사 쫓아내기, 이권 챙기기 등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목사의 신앙이나 인격이 특별히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실존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목회 현장에 들어가면 그것이 그에게 현실이 된다. 교회 조직을 활성화하는 데만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소명의식이 질식하거나 경직되거나 과대 포장이 되고 만다. 소명의식이 목회 전체 과정을 통해서 교정되고 심화되지 않으면 목사는 과대망상, 아니면 패배주의에 빠진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소명의식의 교정과 심화를 위해서 책읽기가 최선이다.
목사님 저는 제도에 대해 회의가 들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도 율법이라는 좋은 제도가 있었읍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부정하지 않았읍니다.
거기에 덧붙여 더 좋은 제도를 만들려고 많은 율법(규례)을 만들었읍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회를 고치지 못했읍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이스라엘 민중들에게 멍에가 되었읍니다.
이스라엘에서 희년이라는 제도는 만들졌으나 그것이 실행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읍니다.
목사님을 신격화하는 교회에서 목사를 징벌하는 제도가 실행이 될수 있을까요?
물론 제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르게 실행되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고 그 뜻에 맞게 사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교회에서 중심이 되야하는 것이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봅니다.
저가 보기에는 직업의 특성상 상황이 주어졌을때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목사님들의 필요 조건이라 생각됩니다(적어도 한국 상황에서는 상황이 주어 졌다고 생각됩니다). 기본적인 필요 조건조차 만족되지 않은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찌보면 암담하기만 합니다. 저의 경험에 의하면 목사가 잘못을 할때 교인들의 태도는 그것을 고쳐야 된다는 것보다, "목사님도 사람이데" 라는 말을 더 많이 들아왔습니다
약자에게는 그렇게 엄격한 사회가 강자한테는 너무도 느그러운 한국 사회 상황이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져서 목사님들이 자신들의 소명에 관심이 멀어 지지 않나 봅니다. 그러한 것을 보면 약자를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예수님이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 존재하실까? 하는 의문이 옵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문제지만, 목사님의 변화와 교인들의 변화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