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에 대해
목사들의 설교가 공허하게 다가오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바탕에 리얼리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데에 있다. 리얼리티(reality)를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 현실, 현실성, 실질, 실제 등등이다. 신학에서는 영어 리얼리티보다 독일어 Wirklichkeit가 더 중요하다. 독일어 비르크리히카이트라는 단어를 영역으로 리얼리티로 하긴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리얼리티에 해당되는 독일어는 Realität(레알리테트)다. 이 단어는 좀 단순하다. 정말 실제하는 것, 정말 현실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독일어 비르크리히카이트는 지금 여기서 실제하는 것, 현실적인 것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미래에도 참된 것을 가리킨다. 리얼리티보다는 비르크리히카이트가 변증법적인 역동성이 훨씬 강한 개념이다. 그래서 독일 신학계에서는 리얼리티보다는 비르크리히카이트를 쓴다. 우리는 이런 언어의 차이를 무시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리얼리티로 통일하겠다.
리얼리티가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는다면 그는 신학을 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며, 더 나가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다. 흔한 경구를 제시하겠다. 화이트헤드는 <process and relity>에서 ‘Reality is process.’라는 경구를 남겼다. 그에게는 과정이 리얼리티다. 그의 과정 개념을 따라가려면 많은 공부가 필요할 텐데, 어쨌든지 그가 어떤 실체를 리얼리티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화이트헤드를 비롯해서 모든 철학자들은 결국 리얼리티를 탐색한 사람들이다. 그 탐색의 여정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런 여정은 우리가 하나님을 탐색하는,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계시를 파악해가는 것과 같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즉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라는 뜻이다. 저 현실성은 위에서 말했듯이 영어의 리얼리티다. 그렇다면 리얼리티가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 된다. 상황이 이렇다면 리얼리티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고 하나님을 언급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제 여기에 여러가지 질문을 했다가 지웠습니다.
스스로 찾아보려는 노력도 없이 너무 쉽게 답을 찾는 것 같아서요~ㅎㅎ
사실은 판넨베르크가 말한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에서
만물은 어디까지이고, 규정한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민을 하다가 '판넨베르크 아카이브'까지 찾아가게 되었고
판넨베르크의 설교를 한 편 읽었습니다.
두세 번은 읽어야 정리가 되는 스타일이라
아직은 뭐라 말씀을 드리기 어려우나... 왠지 제 닉네임처럼
또 다른 세계로 저를 초대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더 커다란 세계랄까요...
물론 더 큰 영적 내공의 필요성도 절감했구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