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구원(2)
‘구원받았나?’ 하는 질문은 순서가 잘못된 거다. 구원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먼저다. 구원에 대한 개념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구원받았나 하는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것이 자기 합리화나 남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여기서 구원론(soteriology)을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런 문제들을 다 전제한 채 나의 구원 경험, 또는 그런 희망에 대해서 직접 말하는 게 좋겠다.
나는 구원받았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희망한다. 이런 믿음과 희망이 없다면 기독교인라고 할 수 없다. 기독교인으로서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체면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나는 구원받았다고, 더 정확하게는 구원받을 거라고 믿고 희망한다. 이런 말에 반론이나 오해가 많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일일이 내가 대답할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구원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하는 게 나을 것이다.
나는 지금의 삶이 연장되는 어떤 세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죽으면 그것으로 지금의 삶은 끝이다. 그건 다행한 일이다. 지금의 삶이 다시 연장된다면 지루해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불교는 다시 연장되는 삶을 윤회로 설명하고, 거기서 벗어나는 걸 해탈, 즉 열반이라고 한다. 그건 옳은 말이다. 기독교 역시 기본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 그것은 불교식으로 말해서 해탈과 같다.
지금의 삶을 보라. 그 무엇으로도 만족이 불가능하다. 이런 삶이 영원히 연장된다면 그것은 구원의 아니라 저주다. 지금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먹어야만 산다. 이런 먹이사슬이 반복되는 세상이 연장된다면 그건 구원이 아니라 저주다. 그래서 나는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그리고 그런 경험이 완전히 단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모든 것들이, 거기에는 자신의 조건과 가족관계와 종교문제까지 다 포함되는데, 죽음으로 끝난다면 죽음 자체가 일단 나에게 구원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면 지금 왜 사냐, 빨리 죽는 게 더 낫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는 다른 주제니까 내가 여기서 굳이 보충해서 설명하지 않겠다.
무언가를 계속해서 갈망하게 하면서 사는 삶. 그게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영원히 무언가를 갈망하면서 살기만 하면 결국 영원한 만족은 없기 때문에 그것의 계속은 저주라는것에 동의합니다. 언제까지 무엇에 만족을 할수 있을까요? 마지막 구절에 죽음이라는 것이 결국 삶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게 해 줄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주 말씀하셨었죠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앞에서 내가 지금까지 갈구하고 추구해온 모든 것들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들인지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잊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사회가 그것일 잊게 만들고 또 생각하지 않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저도 그러한 사실을 망각하면서 살고 있다는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안되는데도 계속 그러는건 왜 그럴까요? 저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해서 그리고 삶의 중심에 대해서 좀 더 고민해 봐야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