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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일
삶의 추상화
어제 묵상은 재앙과 죽음의 타자화가 재앙과 죄를 연결해서 생각하는 고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 현대인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난다는 이야기였다. 설교에서 나는 이런 타자화가 삶을 추상에 빠지게 한다고 지적했다. 무슨 말인가?
재앙과 죽음을 자신의 삶에서 분리해내는 방식의 삶은 결국 사람이 행복한 조건에만 몰두하게 만든다. 건강, 고액 연봉, 사회적 지위, 여가 활동, 노후 설계 등등에 쏠린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만 자신의 삶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약화되면 그의 삶도 약화된다. 이런 조건들은 두 가지 본질적 속성이 있다. 하나는 그게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면 이것은 곧 삶이 추상으로 떨어지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말이 된다.
좀더 자극적인 예를 들자. 여기 노름꾼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 노름으로 자기 삶을 확인한다. 판돈을 잃었을 때 크게 실망하고, 땄을 때 한껏 고조된다. 판돈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삶이다. 이런 것도 하나의 삶이라면 삶이겠지만 삶의 본질인 자유와 평화에 이르지는 못하고 오히려 거꾸로 간다는 점에서 그것이 아무리 절절하다해도 추상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거꾸로 재앙과 죽음에 직면하는 것이 삶의 추상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이라는 말인가? 실제 삶에서 그것이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