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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압축되는 예수의 운명이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경험하고 선포하는 목사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게 현실성(reality)으로 다가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신학을 비롯하여 인문학을 공부하고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공부가 바탕이 되지 못하면 구원의 능력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학식이 높아야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 앞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의 중심을 진지하게 들여다볼 줄 아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학식이 낮은 사람들 중에서 그런 태도를 갖춘 이가 있는 반면에 학식이 높은 사람들 중에도 그런 태도와 거리가 먼 이들은 많다.
죄 문제만 해도 그렇다. 죄를 사람들은 도덕과 윤리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많다. 율법주의가 바로 이런 관점이다. 이런 데에 머물러 있는 한 성경이 말하는 죄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거기로부터의 해방도 경험할 수 없다. 도덕과 윤리 문제는 세상의 교사들이 다룬다. 법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도 그런 일을 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죄는 표면적으로 나타는 도덕과 윤리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세력이다. 죄를 야기하는 존재를 성경은 마귀, 또는 사탄이라고 이름 붙인다. 마귀가 예수를 찾아와서 매혹적으로 제시한 것들은 모두 죄의 작용이다.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사뿐히 땅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초능력, 세상의 모든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사람들이 생명 완성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성경은 마귀의 유혹이라고 본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빵을 만들라는 요구만 보자. 먹고 사는 문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적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국민들이 기대하는 것도 밥과 돈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면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최고의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예수는 그걸 거부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이것도, 그리고 저것도’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빵이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부와 그것의 확대를 절대화하는 오늘의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죄다. 나는 성경이 옳게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와 그것의 확대는 결국 우리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욕망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끝은 역설적으로 생명 파괴다.
어떤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물질적인 측면이나 가시적인 측면으로 너무 과하게 치중하는 교회 & 신앙이 축복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그럴때마다 저는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원하고 계실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