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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의 지옥과 천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 부활에 대한 부정은 아니다. 나는 사도신경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이 문장은 죽음 이후의 천국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이 자리에서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길게 하지 않겠다. 그것이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천국 개념과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점만 확인하려고 한다. 나는 죽은 다음에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부활이라고 믿는다. 그 부활이 영생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생명은 세상을 무에서 창조하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기에 피조물인 우리에게서 최선은 그 생명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기독교의 재림신앙이 이를 가리킨다. 재림신앙은 생명완성을 향한 기독교의 고유한 관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재림신앙을 일종의 역사 허무주의로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교회의 역사에는 그런 흔적이 종종 나타났다. 이 세상은 부패하고 심판받아 없어질 것이니 예수의 재림만을 사모해야한다는 주장이 그런 것들이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1992년 10월에 예수가 재림한다고 주장한 다미선교회 사건이다. 대한민국의 정통교회는 그들의 주장을 시한부 종말론으로 단죄했지만, 정통교회 안에도 다미선교회와 비슷한 관점으로 재림신앙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많다. 그들은 종말의 시점만 못 박지 않을 뿐이지 예수 재림 순간에 자신들이 공중으로 들림 받는다고 생각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절을 전거로 삼는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고대 유대인들의 묵시적 표상이 차용된 구절이다. 이를 문자적으로 믿는 그들에게 역사적 책임감은 실종될 수밖에 없다. 세상 개혁과 역사 발전에 관심이 없다. 자신들은 선하고 세상은 심판받아야 할 악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 본 마르크스의 주장은 일단 옳다.
자신의 필요에따라 세상을 악하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안주하며 세상 개혁과 역사 발전에 신앙의 양심을 저버린 비겁한 분들을 보며 더욱더 주님의 삶을 닮아가려고 다짐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