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나님 나라의 현재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다시 갈릴래아로 가셨다. 그러나 나자렛에 머물지 않으시고 즈불룬과 납달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
"즈불룬과 납달리,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예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며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하고 말씀하셨다.
(마4:12-17)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복음서 기자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 사신을 두 문장으로 완벽하게 압축해 놓았습니다. "회개하라"와 "하늘 나라가 다가 왔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두 문장 중에서 보다 결정적인 말씀은 하늘 나라, 혹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훨씬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는 문장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것이 바로 회개의 근거입니다. "돌아서시오. 왜냐하면 하늘 나라가 바로 이곳에 가까이 이르렀기 때문이오." 이것이 바로 원어상의 의미입니다.
매우 보기 드문 형식으로 언급되어있는 이 말씀은, 즉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통치는 정말 코앞에 닥쳤습니까? 하나님은 원래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는 주(主)가 아니던가요? 유일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 모든 사건의 궁극적 근거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기 위해서 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말은 별로 특별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도대체 여기서 무엇이 관건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닐는지요! 하나님이 통치자라는 사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당연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든 것에 작용하는, 알 수 없는, 비밀 가득한 근원으로만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따르기보다는 좋던 나쁘던 간에 다른 인생의 법정에 근거해서 살아갑니다. 다른 법정이 그를 다스리는 것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 밑에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과 계명을 알려주신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긴급한 질문이 됩니다. 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에 근거해서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그렇게도 다른 걸까요? 왜 성공이 악인의 편에서 거듭되는 걸까요? 하나님이 세상의 주(主)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믿는 이들보다 잘되는 일은 왜 벌어지는 걸까요?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배척하는 세력에 의해서 굴복 당하는 일은 왜 벌어지는 걸까요? 이런 질문들은 대혼란의 시기에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개인의 삶이나 시민의 삶이 대파국에 빠지는 때 말입니다. 이런 질문은 기원전 733년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북쪽 지역을 자기들의 제국에 합병시켜버렸을 때에도 대단히 긴급했습니다. 게네사렛 호수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땅이 앗시리아의 관할에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층은 추방당하고 대신에 앗시리아 관리들이 들어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상황을 온 몸으로 생생하게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여호와의 도움은 어디에 머물러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그 땅을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는데 말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문제가 없었는데도 이런 대파국이 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선포했습니다. 마침내 심판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국토가 나뉘었습니다. 스블론과 납달리, 갈릴리와 해안지역으로 말입니다. 이제 여호와는 자기의 약속을 거두어들인 겁니까? 그는 왜 이런 일이 계속되도록 내버려두고 있습니까?
이렇게 혼란스러운 이 세상 속으로 얽혀 들어가는 일이, 그리고 이 세상에서 당하는 괴로움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당하는 괴로움은 이렇게 출구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일이 벌어질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거기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서 막막한 심정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하게 됩니다.
이런 어둠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긴장으로 인해서 피할 수 없습니다. 스블론과 납달리 사람들이 앗시리아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억지로 이루어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려야할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정복해나갈 수 없습니다. "밤을 지나 빛으로" 나아간다는 우리 거인의 길, 즉 베토벤의 교향곡이 가리키고 있는 현대인의 길, 이것은 하나님의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어둠을 밝히실 경우에만 우리는 빛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빛은 우리 너머에서 와서 우리를 완전히 채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기쁨과 찬양을 드릴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거대한 광채의 작용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완전히 잿더미가 된 이스라엘 위에서 빛나는 그 광채를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신다는 사실은 오직 이사야 한 사람에게만 확실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과 회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기쁨 가운데서 발생하는 것이지 그 기쁨이 없다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홀로 통치하신다는 것은 그의 통치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예언자의 예측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통치가 언제, 어떻게 현실적으로 이루어질는지 알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불빛을 좀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곳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겁니다. 기독교의 소종파들이 그랬듯이 우리는 천상의 예루살렘이 임하는 장소로 득달같이 달려갈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이사야의 말대로 다윗 왕국을 다시 일으킬 한 왕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통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인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바로 이렇게 선지자의 예언을 완전히 간접적으로 성취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빛이 어디에서 우리의 삶을 관철하게될는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변방에서 우리를 만나주실 겁니다. 우리가 어둠만 볼 수 있지 빛이라고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곳 말입니다. 어쩌면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가 일년 내도록 혼신을 다해 추구했던 목표보다 훨씬 중요하게 작용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당연하지 않으며, 더구나 하나님의 통치를 전혀 느낄 수 없을 때가 많으며, 또한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이미 이루어진 게 아니라 이루어지는 도중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신앙적 사유를 시작해야만합니다. 우리는 도처에서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그러나 결국에는 그 본색이 드러나게 될 다른 세력들이 군림하는 걸 보아야만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을 뛰어넘어 미래에 계시되리라는 사실만을 희망할 수 있으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미 현재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과 세례 요한의 설교가 다른 유일한 차이점입니다. 예수님과 요한은 모두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선포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그곳에 빛이 임했고, 어둠이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하라고만 외친 게 아니라 사죄를 선포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길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 한다는 사실은 전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요한과는 달리 광야에서 설교하지 않고 갈릴리를 향한다는 사실에서만 그것이 암시됩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서, 이사야가 언급한 빛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내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대로입니다. 낡은 세력이 여전히 득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늘 그렇듯이 우리는 하나님이 매 순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생명을 자신에게만 소용되는 열망과 지배욕과 타성에 묶인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어둠의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빛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지난날 죄와 한 패를 이루고 살던 우리를 예수님은 사죄하심으로써 해방시켰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넘겨받기도 전에 이미 우리 마음대로 처리해버린 그 미래의 날들로부터도 역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경험이 찬란하게 빛나는 광채처럼 우리의 삶을 꿰뚫고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지난날 어둠으로 생각했던 그 한 측면으로부터 돌아서게 된다는 사실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분은 누구십니까? 이런 순간에 이유도 없이 찾아드는 기쁨 가운데서 우리가 모든 한계를 뛰어넘고, 모든 자기 집착에서 꿰뚫고 나와 참된 생명을 향해 다가간다는 사실을 아직 감지하지 못한 분은 누구십니까? 죄의 용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빛이 출현하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빛이 광채를 내도록 불을 붙여주는 이 기쁨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 기쁨은 자기 집착이라는 귀신을 내어쫓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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