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축복선언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누가복음6:20-22)

사랑하는 신학생 여러분,
오늘 이 아침 기도회 시간에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 말씀에서 예수님의 축복선언이 제시하고 있는 강력한 힘은 정말 순수한 약속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요구되지 않는 순수한 약속이라고 말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은 아무런 부가적 행위가 없이도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도 이 약속은 유효한 걸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 거론된 사람들처럼 정말 가난합니까? 굶주리거나 울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미움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당합니까? 우리는 오늘 예언자들이 당하는 운명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저는 우리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솔직하게 생각해본다면 결국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축복을 선언한 그런 이들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까?
이 축복선언은 기독교의 희망이 선포되는 곳에서만이 아니라 가난, 굶주림, 그리고 박해가 있는 곳에서도 항상 가장 강력한 빛으로 증거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복음 사신은 어둠의 시절을 관통해야만 가장 믿을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 어둠이 짙은 곳에서 교회의 선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가장 분명하게 일치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런 어둠의 시절에 살고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축복선언은 삶의 한계상황을 예비하는 비상식량이며, 몹시 예외적인 경우를 위한 위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는 일종의 불안이 엄습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좋은 조건에 자족해서 살아가는 우리의 상황이 예수님이 축복한 이들과 결코 같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축복한 이들의 태도에는 과연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이 화를 선포한 이들의 태도에는 과연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 축복말씀은 이 세상에 처한 자신의 자리를 고향으로 여길 수 없는 이들에게 유효하며, 또한 돈벌이나 쾌락, 출세와 오락을 좇아 다니는 데서 비켜나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대망하는 이들에게 적용됩니다. 또한 반대로 예수님이 화를 선언한 말씀은 이 세상에서 이미 자신의 부만 있으며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이미 자기의 것으로 배부른 이들, 그리고 약한 사람들을 조소하는 이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화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라는 듯한 태도로 살아가는 시도가 오늘날 너무나 강렬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오늘날 자신의 지상적 삶에서 가능한 최대한으로 생명을 채워보려고 노력합니다. 현대의 기술과 경제는 배부름과 오락의 수단을 풍부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이런 상품을 통해서 만족할 수 있으려니 상상하게 만듭니다. 이런 점에서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야할 기독교인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이 제공해주는 것으로 인해서 길을 잃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뛰어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지향해 나아가지 못하면, 즉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우리의 인간 실존은 상실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이것은 오늘날 이처럼 풍요로운 시절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환경 가운데서 명백해져야합니다. 즉 우리의 행복이 흡사 그것에 달려있기라도 한 것처럼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것들 속으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축복말씀은 사실상 종말의 불빛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비추는 빛은 바로 종말의 불빛을 가리킵니다. 이 빛은 현현절에 많이 언급되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미래에 돌입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가 더 이상 현실성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세상 안에서 구원을 모색합니다. 이로 인해서 인간 실존의 개방성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질식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자, 우는 자, 박해받는 자들이 복을 받게되리라는 이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틀림없이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축복말씀은 가난한 이들이 그 가난을 극복해나가도록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거나 도와주기보다는 그저 그들을 말로만 위로해주는 매우 무책임한 태도이며, 어쩌면 오히려 그들을 우롱하는 처사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하나님 통치의 미래를 확고하게 견지해야만 하며, 우리의 모든 행위에서 그 미래를 고려해야만 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가는 그 길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게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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