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기독교인다운 삶의 스타일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여러분도 힘껏 달려서 상을 받도록 하십시오. 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쓰지만 우리는 불멸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을 하되 목표 없이 달리지 않고 권투를 하되 허공을 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 언제나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은 내가 남들에게는 이기자고 외쳐놓고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24-27)

인생에서 어떤 중요한 내용을 발견한 사람들은, 즉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런 일상의 과정 가운데서 본질적인 것들과 비본질적인 것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비본질적인 것들도 의미심장한 삶에 내포되어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런 의미심장한 본질들을 걷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한 목표를 정해놓는다면 여기서부터 그 어떤 목표 지향적인 윤곽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 이외의 것들이 사소해지는 반면에 이 윤곽들은 오히려 더 또렷이 부각됩니다. 이런 현상은 실제로 공부에 매달리고 있는 학생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목표가 모든 것을 생명으로 집중시키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그 목표로 통전되며, 더 이상 잡다한 일로 분산되지 않습니다. 삶이 스타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스타일은 어떤 체계가 없는 산만한 상태로부터 구체적인 일관성이 생성되는 곳에서 늘 발생하는데, 이 일관성은 전체와 상호간에 조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바른 금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금욕은 절제를 위한 절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잔뜩 욕심이 생기는 일이지만 억지로 절치부심하면서 그 대상을 멀리한다고 해서 순수하고 올바른 금욕이 달성되는 게 아닙니다. 이런 금욕은 오히려 잘못된, 늘 그렇듯이 위선적인 태도에 불과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금욕 생활을 하던 내 친구는 결국 이런 말을 하게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고로 늘 절제해야 하는데, 죽을 때까지 그래야 한다구!"
잘못된 금욕은 무척 수고가 많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사실은 별로 큰 성과도 없습니다. 이와 달리 참된 금욕은 수월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금욕은 사실상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제는 어떤 분명한 목표, 즉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과업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당연한 귀결입니다. 인간은 놀랍게도 자신을 위해서나 자신에 관계된 일을 할 때 전혀 지루하게 생각하지 않는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운동 선수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역시 아주 적절한 예입니다. 운동을 잘 하기 위한 훈련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때에 따라서 술이나 담배를 금해야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진정한 운동 선수들에게는 이런 것들을 포기하는 일이 그렇게 결정적으로 힘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절제하는 고통이 그가 열심을 쏟고있는 운동에 의해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실제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마스커스 회심 사건 이후로 소위 완전한 헌신의 세계로 들어섰습니다. 그가 실천한 참된 초인간적 수고 뒤에 놓여있는 이 무조건성은 경탄할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서 수수방관하는 구경꾼으로 남아있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위대한 바울의 이 업적을 놀라워하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저 바라보기만 해서는 안되고, 우리 스스로 달려가야 합니다. 바울은 오직 한 사람만 상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계적인 육상 선수였던 짜토펙이나 헤리 같은 사람들과 함께 스타트 라인에 서있기나 한 것처럼 결과는 뻔하니까 뛰어볼 필요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바울이 사용한 이 비유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용기를 잃거나, 그런 일을 시작하는 걸 몹시 두려워하게 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가 승리의 월계관을 얻을 수 있는 한 사람처럼, 또한 우리 모두 각자가 어떤 일이 있어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처럼 달려야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달려야합니다.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도대체 우리가 어디를 향해서 달려야합니까? 이것은 현대의 모든 기독교 윤리 앞에 놓인 큰 난제입니다. 또한 오직 그럴듯하게 충고해주는 것으로 당장 눈앞에 놓인 목표에 대한 매혹과 그 자극을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불확실한 목표를 향해 뛰어가는 사람은 정확하게 달려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삶에서 그 어떤 전형적인 힘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어떤 각인된 스타일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듭니다. 이것은 일종의 결핍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결핍의 근거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삶에서 스타일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관계된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방향 없이 달리는 사람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자기 삶의 그 모든 것이 될 그 목표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명명백백한 스타일을 허락했습니까? 바울은 자신으로 하여금 달려가게 한 썩지 않을 월계관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명백합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생명이며, 죽음으로부터 부활에 이르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다른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는 그 어떤 하나의 목표가 아닙니다. 이 목표가 없다면 모든 것은 아무 쓸 데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이 오직 이 땅의 삶뿐이라면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훨씬 불쌍한 사람입니다."(고전15:19). 그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과 구원의 미래가 없다면 기독교의 신앙은 공허합니다. 기독교인의 신뢰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기껏해야 다만 무덤까지 이르는 미래를 희망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는지요. 다만 무덤까지 이르는 것이라면 현재의 삶을 즐기라는 오직 이 한 가지의 지혜만 타당할 것입니다. 바울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하면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고전15:32). 바로 이 사실, 먹고 마시자는 이 사실이 현대인들의 비밀스러운 종교가 되었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달음박질함으로써 재촉해갔던 이 목표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면 삶을 요령 있게 즐기라는 지혜 이외에는 남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지혜라는 것을 좀더 정확히 주시하기만 하면 매우 시시한 것에 불과한데도 말입니다. 완전히 억압된 체념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려고 온갖 수고를 다하게 될 뿐입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없는 한 기독교 윤리는 그 동기를 상실합니다. 왜냐하면 사랑도 역시 부활의 희망에서 솟아나는 그 능력이 없는 한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저런 방식으로 그의 고통을 줄여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국 직면해야할 미래에 대한 불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만 합니까? 감옥에 갇히거나 박해를 당함으로써 겪게되는 괴로움, 혹은 우울증에 빠져버린 이들의 경우에 어떤 도움을 주어야만합니까? 이 모든 상황이 다시 좋아질 수 있다고 말해주면 됩니까? 그것보다는 확실한 도움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행위가 중요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울 것이냐, 아니면 그 말씀 없이 도울 것이냐에 달려있습니다. 이런 돕는 일은 인간의 삶에서 필요 불가결합니다. 그런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결정적으로 도와줄 수 있으려면 무언가 다른, 거대하고 최종적인 것과 관계되어 있어야만합니다. 이는 흡사 예수님의 구원 행위가 거대하고 최종적인 하나님의 통치에서 일어나는 구원과 그 영원한 생명을 암시하고, 또한 그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희망이 없이는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 목표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세운 목표가 무의미해짐으로써 생기게되는 일종의 불안한 인간애는 죽음에 의해서 만사가 끝나게될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붙잡게되는 가장 극단적인 요소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적인 인간애의 근본은 역시 바울에 의해 영적인 힘으로 충만해진 부활에 대한 희망에 달려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불확실한 것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지 모든 것을 좋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만을 막연하게 믿은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분명히 바울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분의 부활을 향한 시각은, 그 부활이야말로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게되는 근거인데, 그 이외에서는 생명의 의미가 의문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모든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고 확실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길이 예수님의 고난을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우리에게 더 선명해지는 사실은 우리가 그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극복하는 승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죽음 이후의 미래를 인정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곧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입니다. 경건한 요설로서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이 몸소 가신 길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이 입게될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완전히 충만해져야합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 개인만을 위한 희망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며, 그의 우주적인 생명 세계에 대한 희망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을 위한 희망입니다. 이 희망의 표식에는 이웃에 대한 모든 봉사도 포함됩니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사랑의 행위는 그 행위를 동기화할 수 있는 목표를 바라볼 수 있게됩니다. 우리가 이 목표에 완전히 충만해진다면 우리의 살아가는 태도에서 이 목표의 윤곽이 또렷이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들과 구별됩니다. 우리 삶의 태도도 역시 스타일과 전형을 갖추게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세상 속에 빠져들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에 무조건 "동참하면"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소유했다고 해서 우리도 그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이 목표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바울의 태도를 견지하게 될 것입니다. "전혀 소유하지 않은 듯하게 소유하는" 태도를 말입니다. 세상의 일이나 사물에 대해서 이렇게 간격을 두는 것은 종말론적인 희망 안에서만 타당한 말입니다. 이런 종말론적인 희망이 없다면 이런 간격은 허무한 일입니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우리의 생명은 명료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심으로 구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얻게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필요로 하고, 우리가 실행해야할 그런 모든 것을 얻게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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