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고난 위로 임하는 빛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외치며
"너희 하느님께서 왕권을 잡으셨다"고
시온을 향해 이르는구나.
들어라, 저 소리, 보초의 외치는 소리.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야훼와 눈이 마주쳐
모두 함께 환성을 올리는구나.
예루살렘의 무너진 집터들아,
기쁜 소리로 함께 외쳐라.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도로 찾으신다.
야훼께서 만국 앞에서
그 무서운 팔을 걷어붙이시니,
세상 구석구석이
우리 하느님의 승리를 보리라.
(이사야52:7-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뻐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순절의 한 복판에서 이 말씀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이 걸어간 고난의 길을 기억했습니다. 이런 마당에 기뻐하라는 요청은 별로 적절한 말씀이 아닌 게 아닐까요? 오늘의 이 말씀은 이사야 66장에서 일종의 후렴으로 불려진 찬송처럼 들립니다. "예루살렘아,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아, 기뻐 뛰어라. 예루살렘이 망했다고 통곡하던 자들아, 이제 예루살렘과 함에 기뻐하고 기뻐하여라."(사66:10). 이 말씀에 근거해서 이번 주일은 교회력으로 "래타레"(기뻐하라)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기뻐하라는 이 요청은 예수님이 걸어간 고난의 길을 간과해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와서 예수님의 길을 비추고 있는 비상한 빛을 보아야합니다. 이 빛의 원천인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의 어둠으로 인도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은 인간적인 대파국에서 겪게된 절망의 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계시와 그의 통치가 개시되는 길입니다. 그것은 어둠의 길을 밝힌다는 구약의 약속이 허락해주는 빛입니다. 이 빛에서만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그의 승리로, 그의 계시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구약성서의 말씀이, 즉 이사야가 포로기에 선포한 큰 구원의 예언이 오늘의 설교와 사색의 출발점입니다. 이 말씀의 빛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길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걸어간 고난의 길이 곧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구원의 길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에 대해서 충분하게 고민해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사실 구원과는 정반대입니다. 구원은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장난 게 아니라는 전제에서만 예수님의 길은 구원의 길로서 타당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서 발생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구원이며, 그것이 곧 그리스도가 신뢰한 새로운 현실성입니다. 바로 이 하나의 사실에 기독교의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에게 현실성이 되어버린 새로운 생명에 기독교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죽음의 극복입니다. 바로 이 사건에서만 그 이외의 모든 기독교적 사실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예수님이 걸어간 고난의 길은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집니다. 바로 이 부활절로부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길을 구약성서의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이러한 성취는 예언자가 예상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다릅니다. 제2이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스라엘의 국가적 해방으로 생각했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유대 지도자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킨 페르시아 왕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국을 건설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예언한 구원은 몇 세기가 지나서 이루어졌는데, 국가의 해방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2이사야는 이 사실을 예감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구원을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로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부활은 제2이사야 다음에 등장하는 묵시문학자가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도 역시 이 구원의 길을 고난의 길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제2이사야는 유대백성이 걸어야할 고난의 길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이 예언자는 어두운, 불길한, 유한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미래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포는 분명히 성취되었습니다. 사실상 모든 세계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순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의 부활로 인해서 어느 정도로 신적(神的)인 의미를 부여받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고난과 죽음에서 예수님의 길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임한 고난과 죽음이 곧 생명에 이르는 길이었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고난과 죽음으로 인해서 더 이상 구원으로부터 나뉘어져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삶은 분명히 고난이나 죽음과 상관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 모두의 형편은 대체로 좋습니다. 우리 각각의 사람들은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결국 우리 모두는 좌절하고 죽게될 것입니다. 기술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이 자기의 희망대로 되어가려니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물의 과거를 한 번만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인생의 모든 위대함과 아름다움이란 게 겨우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도 트라클 같은 시인은 오늘 우리에게 놓여있는 완벽한 삶에서 이미 죽음의 향기를 맡곤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임하는 고난과 죽음을 돌파하고 새로운 생명에 이르는 길이 제시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절망적일 것입니다. 이 길은 곧 예수님의 길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뚫고 새로운, 그리고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생명으로 돌입해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부활절에 그에게 현실성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죽음을 극복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죽음이 더 이상 최후의 선언이 되지 못합니다. 죽어야만 한다는 우리의 운명이 가능한 최대한도로 확실하게 예수님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삶에서 그와 연합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생명에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는 없습니다. 현재 그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연결될 수는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부활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됩니다. 세례 받을 때 물 속에 잠긴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성만찬을 통해서도 일어납니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며, 또한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의 피와 연합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결합됨으로써 이제 그의 새로운 생명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실을 희망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맞아야할 파멸과 죽음은 더 이상 절망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의 삶에서 맛보는 거대함과 아름다움도 역시 덧없다는 이유 때문에 공허하거나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이 모든 것은 새로운 빛과 새로운 타당성을 갖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걸어간 고난의 길은 우리가 걸어야할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해주는 이 생명은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모든 인간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왕권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대한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늘 구원을 동경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구원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은 하나님이 왕 노릇 하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오직 그곳에서만 참된 평화가, 혼란스럽지 않은 평화와 안녕이 보장됩니다.  
예수님과 연합되어 이루어진 이 구원은 하나님의 왕권과 분리되어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모든 사신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사실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완전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과 일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그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사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품은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상황도 역시 오늘날과 진배없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린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은 감각이 마비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내심은 너무나 쉽게 고갈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손에 잡힐 수 있는 삶의 현실들을 선택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가 함께 읽은 설교 본문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감시하는 파수꾼이 필요합니다. 이런 파수꾼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미래를 기억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오늘도 역시 모든 기독교 예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미 왕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멀리 떨어진 바벨론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심부름꾼은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급히 길을 떠났습니다. 예루살렘성의 망루에 서있던 파수꾼은 왕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서 서둘러 달려오는 심부름꾼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발생한 하나님의 통치와 그가 가시적으로 우리에게 오실 그때와의 중간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예언자는 하나님이 일으킬 구원 사건들의 선취를 기대합니다. 아직은 페르시아 제국이 건립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선 예수님의 길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사신에도 역시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죄를 용서함으로써 스스로 그 일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이런 일 때문에 그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왕적 통치의 일들을 확증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왕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통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신약성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상 권세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즐거운 사신을 급히 알려야할 우리 심부름꾼은 서둘러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심부름꾼들은 하나님의 승리를 알리고, 또한 승리자의 비밀스러운 지하운동을 전 세계로 확장시켜야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이 일에 이르는 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지하운동은 그의 십자가로부터 세상으로 돌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지상 세계의 제국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역시 그의 통치가 완전히 드러나기를 기다립니다. 지하운동으로서 말입니다. 이미 교회가 감당하고 있는 바로 그 지하운동으로서 말입니다. 이미 오늘날 많은 파수꾼들이 이 지하운동에 참가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파수꾼들은 우리의 세속적 활동의 한 중심에서 하나님의 미래를 기억하게 하는 이들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 미래를 줄기차게 견지해나가고 있습니다. 이를 선포함으로써 그의 신탁은 절정에 달합니다.
야훼께서 만국 앞에서
그 무서운 팔을 걷어붙이시니,
세상 구석구석이
우리 하느님의 승리를 보리라. (사52:10).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의 신성이 온 세상의 만민들 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 즉 그의 계시에 관한 언급입니다. 이 계시는 틀림없이 예언자가 앞서 언급한 그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과 생각을 사건의 진행을 통해서 증명한다는 전체 구약성서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왕이라는 사실은 그가 자신의 구원을 온 세상의 만민 앞에서 권위적으로 계시한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이 사실에서 성취됩니다. 이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전대미문의 신뢰가 발생합니다. 모든 이들이 각각 그 계시를 보아야하고, 또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열리고, 또한 시작된 하나님의 왕권과 그 구원에 대해서 실제로 이런 확실성을 갖고 선포합니까? 우리는 이런 인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건 아닙니까? 우리는 부활절 사건의 진리를 신뢰해야합니다. 그래야만 기독교 신앙은 세상과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를 확신할 수 있으며, 또한 부활의 기쁨이 우리의 가슴을 충만히 채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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