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승천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골3: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대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이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가끔 신과 하나가 된다고 말입니다. 헤라클레스 설화에 그렇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황제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콘서바토리 궁(宮)에 양각(陽刻)되어 있듯이 황제들은 죽은 다음에 일정한 수순의 약품 처리를 통해서 하늘의 세계로 올라간다고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마리아의 승천을 믿는 것과 아주 흡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은 이런 이야기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기적을 통해서 이룬 개인적인 우월성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그가 하나님의 우편으로 들림 받았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우편"은 무슨 말입니까? 고대 오리엔트 사람들의 생각에 따르면 왕의 우편은 그 나라에서 서열 두 번 째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왕의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역시 하늘 나라의 왕인 야웨가 시온의 왕을 지상의 대리자로, 신적 권능을 집행할 자로 임명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승천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를 행사하도록 임명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면 하나님의 통치를 행사하도록 위임받은 이가 누구인지 생각해보아야만 합니다. 그는 바로 우리와 연합하시고, 또한 우리를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신 분, 즉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분입니다. 이처럼 그의 높아짐은 우리의 높아짐이며, 그의 영광은 우리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의 신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이 승천에서 온전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에게 속한 능력의 세계로 들림 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를 완전하게, 실제적으로, 유일하게 신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능력들과 권세를 향해서 돌아설지도 모르며, 그들에게 충성하게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에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찬양해야할 이유와 동기가 항상 충분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이야기를 기독교 공동체 안이 아니라 밖에서 하게된다면 대개의 세상 사람들은 믿기 힘들다는 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댈 것입니다. 도대체 그리스도가 오늘도 통치한다는 흔적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주변을 돌아봅시다. 그곳에는 완전히 다른 세력들이 군림합니다.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초국가적 세력들, 자신의 입장만 관철시키려는 경제 세력들, 직업과 성공과 출세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찬 개인들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세계는 이런 일들이 점점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만 점점 막강한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의 통치"는 어떻습니까? 만약 그가 명실상부한 주(主)라면 다른 모든 세력들이 우리의 삶에서 활개치는 걸 저지해야만 했던 게 아닐까요? 교회 안에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발견됩니까? 오늘날 우리는 교회가 분리되고 교회의 활동이 위축되는 현실을 봅니다. 또는 동구권에서 보는 것처럼 교회의 활동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독일 사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명실상부한 주라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걸까요?
이런 모든 현상들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다스리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다스린다는 의미로 보아야합니다. 그의 생명과 그의 통치는 우리의 자연적 생명과 그 생명이 촉진되는 데서만이 아니라 그 위기와 죽음 가운데서도 증명됩니다. 우리의 생명에 관계된 그리스도의 생명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 생명을 이해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통치도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통치를 주로 우리의 지상적 삶이 촉진되는 일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이에 반해서 성서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시오."(골3:2). 우리가 과연 이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자기의 목표에, 그런 세계관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을 벗어나서 "위에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어야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더 이상 바꿔치기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우리에게서 일어났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죽음으로 빠져들어 갔다는 말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죽음이 선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낯설게 경험하는 것처럼 세상의 사물로부터 분리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사물과 우리 자신의 생명으로부터 이렇게 거리를 둠으로써 우리는 그 무언가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의 통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오늘의 설교를 끝내도 괜찮을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성서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도록 강요합니다. 그것은 곧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교회를 통찰하도록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와 그 생명이 아직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가 우리 믿는 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이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의 승천 보도가 아닐까요? 그리스도는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부활한 분이 이제는 그들에게서 멀리 떠나버린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까지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은폐의 방식으로 존재하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곧 승천기사가 가리키고 있는 두 번 째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인위적인 방식으로 현재화함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폐에 대한 경험을 피해보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례전의 내용과 형식을 의도적으로 강화시킴으로써, 혹은 세상과 그 세상의 질문에 대해서 말문을 막아버리는 기독교 전통으로 퇴각함으로써 피해보려는 것입니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 교회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행사하고 있는 그런 흡인력이 이런 시도들과 상관되어 있는 건 아닐까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과업은 기독교의 내적 영역 속으로 숨어들어 가는 시도, 즉 우리의 이 시대 앞에도 여전히 분명한 하나님의 은폐와 그리스도의 은폐에 대한 경험을 피해보려는 시도와 분연히 맞서는 데 있습니다. 승천과 재림 사이의 이 중간 시대에 놓여 있는 이 은폐는 지속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으로 사는 것이지 보이는 것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신앙 가운데서 우리는 무언가 세상과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은폐된 통치를, 부활의 능력을 감지하게 됩니다. 세상의 사물에 대한 이런 거리는 우리가 참된 생명의 힘에 깊숙이 휩싸일수록 더욱 분명하게 감지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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