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브라함의 믿음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라. 아브람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 주며,
매우 큰상을 너에게 내리리라."
그러자 아브람이 말씀드렸다. "야훼 나의 주여, 나는 자식이 없는 몸입니다.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다마스커스 사람 엘리에젤밖에 없는데, 나에게 무엇을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나를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식 하나도 점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내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내 집의 이 종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아브람이 이렇게 여쭙자,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를 이을 사람은 그가 아니다. 장차 네 몸에서 날 네 친아들이 네 대를 이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그가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는 이 땅을 너에게 죽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야훼다." 아브람이 "내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묻자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한 마리씩 나에게 바쳐라." 그는 이 모든 것을 잡아다가 반으로 쪼개고 그 쪼갠 것을 짝을 맞추어 마주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만은 쪼개지 않았다. 솔개들이 그 잡아 놓은 짐승들 위에 날아오면, 아브람은 이를 쫓고 있었다. 해질 무렵, 아브람이 신비경에 빠져들어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데, 야훼게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똑똑히 알아두어라. 네 자손이 남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종이 되어 얹혀 살며 사백 년 동안 압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네 자손을 부리던 민족을 나는 심판하리라. 그런 다음, 네 자손에게 많은 재물을 들려 거기에서 나오게 하리라. 그러나 너는 네 명대로 살다가 고이 세상을 떠나 안장될 것이다. 네 자손은 아모리족의 죄가 찰 만큼 찬 다음, 사 대만에야 돌아오게 될 것이다."
해가 져서 캄캄해지자, 연기 뿜는 가마가 나타나고 활활 타는 횃불이 조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 날 야훼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말씀하셨다. "하는 이집트 개울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는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준다. 이 곳은 켄족, 크니즈족, 카드몬족, 헷족, 브리즈족, 르마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기르갓족, 여부스족이 살고 있는 땅이다."
(창15:1-21)

  
오늘 성서 본문의 첫 단락은 믿음에 대한 성서의 여러 언급 중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야웨를 믿었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원형으로 제시했습니다. 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태도와 연관되어 있는 상황은 인간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거나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규정됩니다. 이 문제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거나 기대하는 것과 다르게 제시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안티테제(반명제)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믿음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와 관련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바빌로니아의 우르 땅을 떠났다는 사실을 믿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역시 믿음은 결코 예수님의 과거 역사일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역사 안에 들어있는 그리스도 사건을 그 내용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이 과거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한 전제이지 믿음의 내용 그 자체는 아닙니다. 신학은 물론 믿음의 이 전제를 지향해야만 합니다. 믿음이 이런 전제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한 그 기초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믿음의 기초가 말하려는 내용들을 단순히 "믿음"의 차원으로만 밀어놓음으로써, 또는 믿음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설명함으로써 이러한 노력을 등한히 하면 안됩니다. 믿음은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그것에 포함되어 나타난 미래를 향한 약속의 기초와 부단히 연관됩니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이 약속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우리에게 이 약속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역사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가 아니라 부활에 참여한 자로서 새로운 생명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와 거의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역시 아브라함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었던 기초로서의 그 신앙이 전제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이것은 가나안 땅과 후손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약속이 그리스도 사건 가운데서 주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두 번 째 단락은 고대의 희생 표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앞의 내용에 대한 일종의 해설로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와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대답입니다. 이 계약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 믿음은 하나님의 행위에 아무 것도 부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홀로 우리와 자신의 계약을 맺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희생 제물을 받고 그의 꿈속에서 약속의 땅을 지시하려고 오셨을 때 아브라함은 깊은 잠 속에 빠져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희생 제물의 자리는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길입니다. 그 희생 제물의 쪼개진 틈 사이에서 하나님은 삼키는 불로 이러 저리 임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 믿음의 기초라 할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와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분의 고통스러운 죽음은 일종의 불길처럼 불가시적인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두려움과 암흑" 가운데서만 지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흡사 아브라함이 느꼈던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두려움과 암흑 가운데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의 약속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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