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기독교인의 실존과 세례

루터교회는 설교된 말씀의 교회일 뿐만 아니라 성례전의 교회이기도 하다. 세례와 성만찬으로 이루어진 이 성례전은 이미 어거스틴과 중세기 예전신학이 가르쳐주고 있는 바와 같이 말씀에 토대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전적으로 특별한 의미의 말씀이지, 사죄를 의미하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다. 예전의 토대인 말씀을 사죄의 차원에서만 이해하게 되면 결국 불가피하게 예전의 참된 의미가 상대화(Vergleichgültigkeit) 된다. 따라서 예전의 유무에 상관없이 말씀을 통해서 사죄를 약속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예전이 베풀어질 때마다 늘 특별한 약속이 핵심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만찬 시에 이런 약속은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곧 예수와 일치된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으로 인해서 우리는 결국 죽음에 떨어지고 말 우리의 육체와 피에 우리가 연결되는 것보다 훨씬 밀접하게 자신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을 이기신 예수와 연결된다. 성만찬을 통한 약속의 특별한 점은 이 약속이 식사에 참여하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 되게 하며, 교회에서 하나 되게 한다는 점이다. 세례에서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즉 그리스도의 육체적 현실성과의 일치가 핵심이다.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는 예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롬 6:3). 우리가 그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죽을 생명에 연결된 것이다. 그러나 세례에서는 무엇보다도 피세례자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양여된다는 점이 (그리고 이로써 아버지와 성령에 양여된다는 점이) 관건이다. 세례는 개인의 생명 전체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것이다. 즉 죽음으로 끝장나게 될 이런 생명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선취적으로 연결됨으로써 세례 받은 자가 죄의 열매인 자기의 죽음에서 벗어나게 되며, 따라서 죄로부터도 역시 벗어나게 된다(롬 7:4이하). 그러므로 세례 받은 자는 이제 율법 없이 영의 자유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지난 수십 년간 개신교 신앙과 개신교 교회의 예배에서 성만찬이 놀라운 정도로 부흥하는 시기를 맞이했다.* 이 성만찬이 설교 중심의 예배가 드려지던 계몽주의 시대에는 별로 실시되지 않았다. 반면에 아우구스부르크 신조는 개신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보다도 훨씬 “경건하고 진지하게” 미사(Messe)를 드렸다고 자랑했다(Confessio Augustana 24). 분명히 아우구스부르크 신조에 의하면 성만찬에서 관건은 그 무엇보다도 “겁먹은 양심에 기운을 돋군다”는 사실에 있다(위와 같은 곳). 반면에 젊은 루터는 1519년에 행한 자기의 설교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형제애라는 설교에서 기독교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룬다는 사실을 성만찬의 고유한 의미로 부각시켰다. 이로 인해 일어난 후속적 결과는 다음과 같다. 종교개혁 시대의  논쟁이 주로 참회적 예전에 집중됨으로써 성만찬에 대한 루터의 후기 진술은 이런 예전을 완전히 사죄에 대한 약속과 확증과 연결되었다. 우리 시대에 개신교회에서 성만찬 경건이 갱신된다는 것은 이와 달리 만찬의 일치성격에 대한 재발견과 관계된다. 성만찬을 거행함으로써 교회가 무엇인지 아주 명확해졌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이 일치되는 것이며, 공동으로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한 주님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개신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종파적 한계를 가로질러 현재의 모든 기독교에서 새롭게 발견되었다. 여기서 이제 우리 시대의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운동을 보게 될 것이다.

*역주자가 독일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던 1980년대에 간혹 독일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 그 당시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매 주일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람들이 많던 적던 성만찬을 반드시 시행하는 것이었다. 회중들을 강단으로 불러 모아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었다. 그런데 포도주는 큰 잔에 담긴 것을 함께 돌아가며 마시는 방법으로 성만찬이 진행되었다. 그 뒤로 독일 교회의 예배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의 출판이 1986년이니까 독일 교회의 성만찬 부흥기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교회도 성만찬을 너무 형식적으로 실행하지 말고 예배의 중심 요소로 수용해낼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회에서 세례의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면을 갱신해내려는 가시적인 노력들을 찾아보기가 아직은 힘들다. 세례는 개신교 신앙에서 여전히 그림자 같은 현존(Schattendasein)*이다. 이것은 세례에 대한 가치를 높게 평가한 마틴 루터의 입장과 완전히 대립되는 것이다. 루터 교회가 세례를 간과함으로써 개신교 신앙이 전반적으로 소극적인 방향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세례를 통한 신앙적 영향력이 과소평가되고 있다.

*판넨베르크가 여기서 Schattendasei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세례가 아직 그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지 못하고 일종의 그림자 정도에서 다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인 것 같다. 독일어 특유의 관용적인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판넨베르크는 교회의 신앙생활에서 세례가 확보하고 있는 적극적인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루터에게서 세례는 기독교적인 삶의 출발을 가리키는 예식일 뿐만 아니라 더구나 전체 가족 축제를 위한 고차원의 성별이었다. 그는 이 세례의 의미를 피세례자를 교회가 받아들인다는 차원에서만 본 게 아니었다. 그가 볼 때 세례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세례가 기독교인의 전체 삶과 연관된다는 사실이었다. 즉 <당신은 단 한번만 세례 예식을 치른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세례는 거듭해서 실행되는 게 틀림없다. 늘 거듭해서 죽고 새로운 삶으로 태어난다.> 루터는 소교리문답에서 세례를 다음과 같은 의미라고 언급했다. <세례는 우리 안에 있는 옛 아담이 매일의 뉘우침과 참회를 통해서 모든 죄와 사악한 욕망이 더불어서 사라지며 죽는 게 틀림없다는 뜻이다. 더구나 여기서 정의와 깨끗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사는 새로운 인간이 나오며 부활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례예식이 늘 새롭게 실행되는 참회에 대한 단순한 신조를 해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참회는 세례 받은 사람이 평생 동안 가져야 할 태도다. 참회는 근원적으로 세례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사죄 사건과 일치하는 세례>에 대해서 고백한다. 이는 곧 죄에 물든 삶이 세례로 인해서 단번에 해결되었다는 의미였다. 마틴 루터도 역시 새로운 삶이 우리에게 자리를 잡게 하는 세례 사건이 유일회적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세례 이후에 다시 참회해야만 한다는 주장이 3세기 이래로 교회에서 제기되었는데, 루터는 교회의 이런 경험을 유일회성과 연결해서 해명했다. 그는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늘 새롭게 획득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교리문답에서 언급된 다음과 같은 내용도 이와 마찬가지의 의미이다. <세례의 능력과 업적>은 <과거의 아담이 죽고 새로운 인간이 부활하는 것과 다른 게 아니다. 이 양자는 우리의 평생에 걸쳐 일어나며, 따라서 기독교인의 삶은 매일 실행되는 세례와 다르지 않다. 즉 한번 시작한 다음에, 늘 그렇게 진행된다. ··· >(Bekenntnisschriften der Ev.-Luth. Kirche 704). <그러므로 세례는 매일 갈아입어야 할 옷과 같은 게 틀림없다.>(707). 따라서 참회는 세례가 우리의 삶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참회하며 살아가려면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 세례는 단지 새로운 삶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새로운 삶을 작동시키며, 야기하며, 추구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바로 과거의 인간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은총, 영, 능력이 주어짐으로써 너를 새롭고 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는 항상 베풀어져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낙심하거나 죄를 짓게 되더라도 옛사람을 다시 억제할 수 있는 길이 제공된다. ··· >(706).
세례는 <여전히 ... 그렇게 실행되고 유지된다.> 세례는 기독교인의 삶과 실존의 연속성에 토대를 놓는다. 루터에 따르면 신자가 믿음을 통해서 자신을 맡긴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서 자기 자신 밖에서(extra se) 산다는 것은 신자가 자기의 고유한 인격적 삶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기 밖에서 그리스도 안에서(extra se in Christo)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개인적으로 구체화된다. 개인들의 독특한 삶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부터 새로운 토대를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죄의 유혹 가운데서도 세례 받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신해야만 한다. 또한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699f.). 루터도 역시 그가 말한 대로 세례를 멸시하는, 즉 극단적인 프로테스탄트들*과 관계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신앙만이 거룩하게 할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루터는 이들을 <눈먼 지도자들>이라고 평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못 보는 사람들이다. 즉 “신앙은 자기 믿고 있는 그 무엇을 갖고 있어야만 하며, 또한 그가 의존하거나 상관하는, 또한 지향하고 있는 그 무엇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696).

*극단적인 프로테스탄트(Hyperprotestant)들은 일종의 ‘신앙 지상주의자’, 또는 ‘신앙 일원론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신자들이 믿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생각보다는 신자들의 심리적 상태를 우선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 교회는 이런 경향이 아주 강하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인간의 신앙만을 강조하게 되면 결국 사이비로 흐를 위험에 노출되기 쉽다.

파울 알트하우스는 루터의 세례교리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칭의론>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정확한 지적이다(Die Theologie Martin Luthers, 1962, 305). 이러한 칭의론의 구체적인 형태가 좀더 명확하게 알려지게만 된다면 그것은 오늘날 루터 교회에서 더 이상 죽은 문자로만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칭의 신앙마저도 역시 그 역동적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추상적 형식으로 남아있는 상태다.
일반적인 개신교 예배에서 세례는 아무런 기능을 못한다. 이 말은 예배를 드릴 때 세례가 아주 예외적으로 베풀어진다는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루터가 말한 대로 기독교인의 삶에 담긴 세례의 의미를 설교로 다루는 일이 아주 드물거나 또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또한 예배 의식에서도 역시 이 세례의 자리는 별로 확실하지 않다. 예전에서 주어진 자리라고 해봐야 예배의 부름에서 사죄와 은총을 간구하는 정도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루터에 따르면 참회는 늘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에게 한번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연합 루터교의 예배의식 Ⅰ에는 이에 맞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예컨대 은총의 말씀이 선포되는 마무리 부분은 다음과 같다. <믿고 세례 받은 사람은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청중들은 이런 선포를 듣는다고 해도 죄의 고백이 세례에 대한 기억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선포는 바로 앞에서 이렇게 진행되었다. <우리가 여기 이렇게 모인 것은 ... 우리가 무가치하며, 따라서 하나님에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그 대목에서 세례가 언급되어야만 했는지 모른다. 즉 다음과 같이 진술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례를 통해서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았으며 그리스도의 새로운 삶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생각과 행동에서 죄에 물들기 쉽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세례 받을 때 얻었던 은총에서 피난처를 구해야합니다.> 죄의 고백과 은총의 권면이 이렇게 진행된다. 이로써 예배 참여자들이 여전히 기독교 공동체를 떠나있거나, 또한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피할 수 있다.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단순히 죄인으로서 다루어지거나, 또는 세례 받는 기독교인으로 다루어지는지 아닌지는 다른 별개의 문제다. 여기서 말하는 세례 받은 기독교인이란 세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체와의 영적인 투쟁에 머물러 있으며, 세례를 통해서 이미 확실하게 극복된 죄와 죽음의 그림자에 거듭해서 사로잡히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은 세례 받은 기독교인으로서 자기의 삶에 군림하는 죄와 죽음의 세력을 물리쳐야만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너무나 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에 의해서 죄와 죽음의 세력이 단번에 요절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러한 정황을 자세하게 언급했다.
기독교의 참회는 항상 세례를 기억하는 형식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기독교인의 새로운 삶은 그 연속성을 상실한다. 이 문제가 종교개혁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더욱 확실히 그렇다. 이러한 새로운 삶은 종교개혁적인 의미에서 볼 때 개인의 영혼이 은총을 통해서 질적으로 변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을 통해서 우리에게 각인된, 그리고 거듭해서 우리를 신앙 가운데로 인도하는 새로운 삶이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삶의 결정과 지속은 종교 개혁적 시각에서 볼 때 세례의 예전에서만 드러난다. 개신교 신자들이 세례를 일상에서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면 자신이 마치 늘 죄의 지배를 받는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신자들에게는 매 주일마다 새롭게 사죄가 선포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세례와 연결되지 않은 채 순간적이고 독단적인 사건으로만 머물고 만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다시 한번 더 죄인으로 확인된다. 그가 자기 전체 삶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결코 결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또한 그 은총이 자기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개신교 경건의 역사에서 이미 17세기에 회심이 실제로 생명 역사의 결정적인 전환으로 이해되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더 이상 세례가 필요 없다고 이해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구원과 새로운 삶이 우리 밖인 그리스도 안에 토대하고 있으며, 또한 신앙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현재 한다는 종교개혁의 중심 진술은 회심을 강조함으로써 초점을 상실하게 된다. 반대로 회심에 대한 경건주의적 사상이 활성화되지 못한 곳에서는 생명에 대한 기독교인의 감정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죄보다는 오히려 죄의 실존을 통해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세례에 대한 기억과 전혀 연관성을 갖지 않은 채 제시된 은총의 권면은 그것이 매주일 새롭게 갱신되고 있지만 생각이 깊은 기독교인들에게 거의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인간이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아무런 변화도 줄 수 없다는 말이다.
이제 루터는 세례 받는 기독교인도 역시 자기의 경험적 현존에서 실제로 죄인으로 머물러 있다는 점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 죄는 그리스도와 연결됨으로써 효력을 끼치지 못한다. Peccato in re, iustus in spe (실제로는 죄인이지만, 희망 안에서는 의인). 바로 여기에 세례의 작용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견해와 루터교의 견해에 차이가 있다.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언어학적 차이를 살펴보면 이 차이점이 명확하다. 로마 가톨릭은 세례 받은 사람들도 역시 욕정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이러한 욕정이 여전히 실제적으로 죄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한다. 죄는 세례를 통해서 실제로 분쇄되었다는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와 달리 세례 받은 자에게 여전히 현존적인 욕정을 어거스틴의 언어사용과 같은 의미에서 이 단어의 엄격한 의미에 담긴 죄로 여겼다. 루터의 시각에서 보면 세례가 인간 실존의 원칙적이고 확실한 토대를 새롭게 자리매김 한다는 점이 훨씬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안에서(in nobis)가 아니라 우리  밖에서 그리스도  안에서(extra nos in Christo) 자리매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실존이 새롭게 자리매김 됨으로써 이러한 상태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새로운 존재의 지속적 인  리얼리티로서 구체화된다. 이런 점이 더 이상 명확하게 진술되지 않는다면 종교개혁의 세례 작용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비판은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 비판은 이렇다. 루터의 입장에 따르면 세례를 받는다고 해도 인간에게는 원칙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기껏해야 죄가 더 이상 가산되지 않는다는 사실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 비판은 곧 우리가 루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개인적인 세례를 모든 개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야 할 구체적이고 영속적인 새로운 삶의 형태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해당된다. 이러한 새로운 삶은 엑스트라 노스(extra nos)에 있지만, 일종의 확실한 전환을, 즉 지속적이고 새로운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 새로운 정체성은 기독교인의 전체 삶을 견인하는 것이다.
개신교회가 루터의 세례론에 대한 인식을 상실함으로써 결국 로마 가톨릭의 비판이 사실상 정당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과는 무언가 다른 현상이 나타난다. 개신교 예배에서 사적인 영역이 고해(Beichte)를 통한 공동의 사죄 선언과 분리되었다. 이 경우에 죄의 고백과 더불어서 은총의 약속은, 즉 사죄의 선언은 아주 간단히 공허한 형식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제 더 이상 구체적인 죄와 그 책임을 고백하지 않고 오히려 일반론적인 차원에서 죄인임을 고백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사죄 선언도 역시 일반론으로 떨어진다. 고해 행위가 개인의 세례와 아주 확실하게 연결되었다면 이런 점에서 최소한 공식적 고해와 사죄가 구체적 삶에서 드러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배에 참여해서 드리는 고해와 사죄는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와 또한 은혜라는 내용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에서는 공적 고해 행위가 세례와 분리됨으로써 아주 간단히 위선적 겸손에 떨어져버리거나 구체적인 잘못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막연한 죄책감에 빠지게 할뿐이다. 개신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인정하는 게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더 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최소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렇다. 비록 그가 완전히 일반적인 차원에서 죄인으로 고백하는 데 길들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마 구체적인 잘못이 통찰되는 구체적인 경우에 일어나는 자기의(義)의 경향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서 훨씬 강화될 것이다. 즉 개신교 신자들이 모든 것의 일반적 필요성에 내재해있는 죄성을 자기의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고백한다는 사실 말이다. 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죄의식을 일반론적 관점에서, 그리고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견지하고 있다는 데에는 또 다른 동기가 있다. 즉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고 여기고 있다. 따라서 죄의식을 일반론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그런 차원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종교개혁자들이 업적의라고 비판했던 중세기 로마 가톨릭의 신앙과 똑같은 기능으로 작동한다. 물론 우리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그 어떤 선한 업적을 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죄인으로 설정할 뿐이다. 우리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비유를 언급할 때 우리를 세리와 동일시함으로써 우리가 옳은 자의 편에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세리와 동일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데 합당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업적의(義)보다 훨씬 나쁘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칭의신앙을 왜곡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신앙은 일종의 신경증적 형식*으로 발전해나간다.

*신앙의 신경증적 형식(eine neurotische Form der Frömmigkeit)은 한국 신자들처럼 감상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에게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사실은 명분에 불과하고, 그런 명분으로 실제로는 의로운 사람으로 자처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부흥회에 참석해서 울고 불며 회개한 다음에 집에 들어가서 믿지 않는 며느리를 구박하는 시어머니 상에서 우리는 이런 단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이런 기독교인의 이중구조는 우리 개신교 신자들에게서 세례 사건이 바르게 작동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산된 신경증적 현상이다.
  
프리드리히 니이체와, 여러 면에서 그와 의견을 같이 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기독교 비판가들은 기독교 내지 종교 일반을 가리켜 죄책감을 생산함으로써 신경증적 현상으로 빠져들었다고 비판했다. 니체는 자기의 도덕계보학(Genealogie der Moral, 1887)에서 양심을 가리켜 인간의 동물적 본성이 병든 것이라고 묘사했다. 양심은 사회적 평화를 그 값으로 받는다. 대개는 밖으로 작용하는 모든 공격적 성향은 양심을 통해서 인간 자신의 내부로 작용한다. 종교는, 특히 기독교는 죄의식의 자기공격을 인준하고 극단화시켰다. 즉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제 “죄의식의 최고수”를 의미한다는 것이다(Ⅱ, 20).
니체의 무신론은 극단화된 죄책감의 파괴적 작용에 대한 비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의 핵심은 인간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무신론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라우레트가 가리키고 있듯이(Lauret, Moralkritik und Atheismus bei Nietzsche und Freud, 1978) 니체와 거의 비슷한 입장을 견지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종교는 (실제적인, 또는 환상으로 시작된) 원부(原父) 살해로 인해서 갖게 된 죄책감에서 출현했다. 따라서 그는 종교를 신경증이라고 보았으며, 이런 점에서 그는 니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기독교는 오늘날까지 니체의 도덕 비판에 대해서, 그리고 죄책감을 배양함으로써 신경증에 이르게 되었다는 비난에 대해서 별로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비난에 분명히 관심을 보여야하며, 여기에 포함된 진리의 알맹이를 자기 비판적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물론 기독교의 하나님은 니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극단화된 죄책감을 대리하는 분이 아니다. 즉 인간의 이런 죄책감에 값을 치르기 위해서 자기의 능력을 극대화시킨 분이 아니다. 그런데 니체는 어린 시절 경험했던 경건주의를 통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도덕 비판과 무신론 사상은 각성신앙을 통해서 각인된 기독교와의 논쟁으로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의 비판은 기독교의 왜곡된 신앙심에서, 특히 프로테스탄트의 왜곡된 신앙심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기독교 신앙에서 세례의 의미와 적용이 손실됨으로써 이런 비판이 훨씬 강력히 기능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례는 죄의 세력과 그것에 연관된 일반론적 죄책감이 기독교인들에게서 극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죄책감이 극단적으로 강요되고 배양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신앙에서 세례의 의미와 내용이 밀려났다는 사실만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발전의 뿌리는 이미 중세기 때 지나치게 강조된 고해와 참회 신앙에 있다. 그렇지만 프로테스탄트 영역에서는 세례의 기능이 신앙생활에서 상실되었다는 사실이 아마도 니체가 비판한대로 신앙이 왜곡 발전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심에서 죄책감이 일방적으로 장려된다면, 즉 죄인이라는 고백이 구원을 얻는 조건으로서 간주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잘못은 간과한 채 오히려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죄성의 감정만 갖게 된다면 기독교적인 삶의 특징이라 할 새로운 생명의 즐거움은 아주 간단히 배경으로 물러나게 된다. 세례가 기독교 사상에서 그에 합당한 자리를 잡게 되는 경우에 기독교 신앙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의 기쁨에 참여하도록 강조된다. 왜냐하면 죄와 죽음은 세례를 통해서 원칙적으로 물러갔기 때문이다. 죄와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의 지상적 삶에 여전히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바울이 말고 있듯이 이런 삶이 육체와 영의 싸움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인은 죄와 죽음의 세력이 전체 인류를 고려해볼 때 단지 객관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례를 통해서 기독교인의 개인적인 삶에서도 역시 파괴되었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세례가 우리의 죽음을 이미 선취하였으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에 몰아넣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삶에는 부활절의 기쁨이 자리잡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아직 오직 않은 죽음을 선취했다(vorwegnehmen)는 이 말은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가장 정확하게 해명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문제가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죽음을 미리 당했다는 말은 곧 이 세상의 모든 문제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기독교인은 죽음 이후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막연하고 일반론적인 죄의식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다시 용서받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의 기쁨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이 죄를 죽음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로마서(5:12)에 따르면 죄의 보편성도 죽음을 보편적으로 확대시키는 데서 추론된다. 이를 통해서 바울은 도덕주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도덕주의는 죄와 죄의 고백이라는 주제와 아주 간단히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죽음을 통해서만 죄의 세력은 끝장난다. 인간의 죽음보다 훨씬 더 비탄에 찬 사건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기독교인에게는 죽음이 극복되었으며, 따라서 죄도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이 담지하고 있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통해서 극복되었다.
세례가 새로운 삶의 기쁨을 우리에게 새롭게 제공한다는 사실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그 세례가 유일회적이라는 점이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한 구원사건이 전체 인류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인 것과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삶에서 단 한번의 결정적인 사건이다. 세례는 우리의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묶어줌으로써 인간의 전체 삶을 선취한다. 따라서 루터가 거듭해서 강조한 것처럼 우리의 전체 삶은 세례에서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을 추가적으로 실행해 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참회도, 즉 일상적인 참회도 기독교인의 삶에서 자리를 획득한다. 그러나 이 참회는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주어진 새로운 삶의 현실성을 명백하게 인식하는 데서 발생한다. 세례 받은 자의 삶이 바로 세례를 추가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라는 바로 이런 시각에서 신앙과 세례의 밀접한 관계가 형성된다. 세례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명확하게 추가적으로 실행되어야 하며 그것이 명백하게 기억되어야 한다. 따라서 세례는 늘 새롭게 획득되어야 한다.
세례와 신앙의 관계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신교에서 세례신학의 큰 문제로 남아있다. 루터는 이미 신앙이 세례보다 우선해야만 한다는 요청과 논쟁을 벌여야만 했다. 이 요청은 뒷날 유아세례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거듭해서 제기되었는데, 지난 20세기에는 칼 바르트에 의해서 특별히 강조된 바 있다. 루터는 이런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신앙을 세례의 조건이라기보다는 그 작용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그는 세례와 신앙이 서로 공속(共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문제를 삼지 않았다. 이런 공속은 1982년 에큐메니칼 리마(Lima) 문서에서도 역시 분명하게 강조된 바 있다. 즉 모든 교회는 신앙과 세례가 공속적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비록 그 공속이 성인세례의 경우에는 유아세례와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화되지만 말이다. 유아세례의 경우에는 신앙이 세례보다 시간적으로 후기에 일어난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생각해보면 유아세례만 특별한 건 결코 아니다. 세례는 모든 기독교인의 삶에서 신앙을 통해서 늘 새롭게 획득되어야만 한다.
여기서부터 이제 설교의 과업이, 또한 예배의 예전적 형태를 담아내야 할 과업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기독교인의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세례에 대한 기억이 설교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서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공동체의 지체들은 참회와 세례가 공속적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인식해야만 하는가? 매번 마다 참회, 고해, 사죄가 선언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것은 세례가 공동체 예배에서 반드시 실행되어야 하는 이유인데, 이 이유들은 공동체의 모든 지체들에게 고유한 세례의 의미를 직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더구나 기독교인은 자기 혼자 세례를 받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세례는 우리를 교회 안에서 이루는 친교의 지체가 되게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친교는 이제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행위를 통해서 모든 개개 기독교인에게 성취된다. 이렇게 기독교인의 개인적인 삶도 역시 세례를 통해서 공동체로 자리매김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했다는 복음으로부터,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하나님 찬양으로부터, 또한 성만찬적 일치로부터 이제 세례의 작용이 기독교인의 삶 안에서 늘 반복적으로 갱신된다. 기독교인이 죽음에 직면해서 결정적으로 새로운 생명의 영원한 기쁨에 참여할 때까지 말이다. 이 죽음은 그가 세례 받은 순간에 이미 선취된 것이다.


1)  Semel es baptizatus sacramentaliter, sed semper baptizandus, semper moriendum semperque vivendum (Weimarer Ausgabe 6, 535, 10).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