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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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몇 년 전까지는 찬양시간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유행가를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대학생 때 누구에게
배운 것이 계속 마음 깊숙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찬양은 거리낌 없이 불러도 되고 오히려 좋은 것이고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도구처럼 여겨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흐르는 저 자신의 찬양에 대해서 반성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언젠가부터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의 감정이 무시되면 안되겠지만 나의 감정의 근원이
하나님 바로 그 분이 아니라 ‘내 생각 안의 하나님’일 가능성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 생각 안의 하나님’과 참하나님이 정확하게 일치할 수는 없겠지만
큰 줄기가 잘못 된 것은 피해야 할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내 생각 안의 하나님’은 정말 착하고 좋은 분으로 이었던 것 같습니다.
착하고 좋은 분이라는 ‘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푸근하게 생긴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는 분을 상상하면서
나 혼자 울고 웃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찬양이 ‘악한’ 것은 아니지만 참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가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참 ‘찬양’이 되기 보다는 위대한 시편기자나 위대한 신앙의 거인들이
한 것들을 ‘흉내’내는데 그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런 흉내를 내면 하나님이 막연히 좋아하시고 왠지 점수가 쌓일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흉내는 ‘아부’에 그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가 흉내내야 할 부분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소리로 나오는 ‘찬양’이기 보다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경험한 ‘초월적인 하나님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은 분명 말로 전수되기가 힘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식’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식’되는 분이 아니지만 ‘인식’될 수 있다는
역설 내지는 신비에서 우리의 경험이 시작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두려움과 신비가 없는 감사는 참다운 감사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의 ‘하나님 경험’에는 이런 요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우리는(혹은 저는) 두려움과 신비가 해제된
‘좋으신’ 하나님만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는 어떻게 보면
역설적인 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우리에게 파악되지 않고 초월적이며 두려운)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우리 존재의 근원이며, 우리는 예수와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라는 신비스러운 사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흉내에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사’와 ‘찬양’만을 흉내 낸다면
레오나르도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고 남들이 좋은 그림이라고 하니
나도 덩달아 좋다고 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솔직한 마음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보여주기 전에도 알고 계시며 숨길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두려운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솔직한 나 자신의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아직 제 수준에서는 감정적인 흥분을 억제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인격적인 하나님께서 감정은 받아주시지 않아서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흥분 보다는 고요함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양이 먼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존재를 만드시고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나누어 주시며
(신비적인 표현을 한다면) 나 보다 나 자신에 더 가까운 분께 드릴 찬양은
꾸밈이 없는 솔직함일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성령의 내재하심의 신비를 더 깨닫는다면
나 자신을 놓아버리는 찬양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감정이 앞서 간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슐라이엘마허라는 신학자가 신앙은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감정이라고 표현한 것은 한 인간이 절대자 앞에서 경험하는 것이
절대자를 이성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 앞에서 그 분께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두렵고 신비스러운) 감정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감정은 전인격적인 충격이요 전존재를 개벽시키는 힘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이성과 지성은 백기를 들고 감정만이 기독교에서 내세울 수 있는 분야로 남아있다는
현시대의 세속적인 기독교에 대한 진단에 굴복할 수는 없습니다.
감정을 앞세운다면 세속적인 기독교에 대한 판단에 굴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성은 모르겠다.. 내가 좋은 내 감정은 내 마음이니 건드리지 말아라..’
우리는 우리의 ‘전존재’가 드리는 찬양이 어떠해야 할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반성해보고 같이 이야기도 나눠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이 유행가를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대학생 때 누구에게
배운 것이 계속 마음 깊숙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찬양은 거리낌 없이 불러도 되고 오히려 좋은 것이고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도구처럼 여겨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흐르는 저 자신의 찬양에 대해서 반성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언젠가부터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의 감정이 무시되면 안되겠지만 나의 감정의 근원이
하나님 바로 그 분이 아니라 ‘내 생각 안의 하나님’일 가능성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 생각 안의 하나님’과 참하나님이 정확하게 일치할 수는 없겠지만
큰 줄기가 잘못 된 것은 피해야 할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내 생각 안의 하나님’은 정말 착하고 좋은 분으로 이었던 것 같습니다.
착하고 좋은 분이라는 ‘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푸근하게 생긴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는 분을 상상하면서
나 혼자 울고 웃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찬양이 ‘악한’ 것은 아니지만 참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가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참 ‘찬양’이 되기 보다는 위대한 시편기자나 위대한 신앙의 거인들이
한 것들을 ‘흉내’내는데 그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런 흉내를 내면 하나님이 막연히 좋아하시고 왠지 점수가 쌓일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흉내는 ‘아부’에 그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가 흉내내야 할 부분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소리로 나오는 ‘찬양’이기 보다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경험한 ‘초월적인 하나님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은 분명 말로 전수되기가 힘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식’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식’되는 분이 아니지만 ‘인식’될 수 있다는
역설 내지는 신비에서 우리의 경험이 시작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두려움과 신비가 없는 감사는 참다운 감사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의 ‘하나님 경험’에는 이런 요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우리는(혹은 저는) 두려움과 신비가 해제된
‘좋으신’ 하나님만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는 어떻게 보면
역설적인 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우리에게 파악되지 않고 초월적이며 두려운)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우리 존재의 근원이며, 우리는 예수와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라는 신비스러운 사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흉내에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사’와 ‘찬양’만을 흉내 낸다면
레오나르도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고 남들이 좋은 그림이라고 하니
나도 덩달아 좋다고 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솔직한 마음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보여주기 전에도 알고 계시며 숨길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두려운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솔직한 나 자신의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아직 제 수준에서는 감정적인 흥분을 억제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인격적인 하나님께서 감정은 받아주시지 않아서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흥분 보다는 고요함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양이 먼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존재를 만드시고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나누어 주시며
(신비적인 표현을 한다면) 나 보다 나 자신에 더 가까운 분께 드릴 찬양은
꾸밈이 없는 솔직함일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성령의 내재하심의 신비를 더 깨닫는다면
나 자신을 놓아버리는 찬양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감정이 앞서 간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슐라이엘마허라는 신학자가 신앙은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감정이라고 표현한 것은 한 인간이 절대자 앞에서 경험하는 것이
절대자를 이성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 앞에서 그 분께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두렵고 신비스러운) 감정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감정은 전인격적인 충격이요 전존재를 개벽시키는 힘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이성과 지성은 백기를 들고 감정만이 기독교에서 내세울 수 있는 분야로 남아있다는
현시대의 세속적인 기독교에 대한 진단에 굴복할 수는 없습니다.
감정을 앞세운다면 세속적인 기독교에 대한 판단에 굴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성은 모르겠다.. 내가 좋은 내 감정은 내 마음이니 건드리지 말아라..’
우리는 우리의 ‘전존재’가 드리는 찬양이 어떠해야 할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반성해보고 같이 이야기도 나눠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고파님,
아침부터 좋은 글을 읽고 여러 모로 공감하면서도
답글도 훌륭하여야겠다는 압박에 이제서야 글을 씁니다.
그렇다고해서 그런 답글이 생겼다는 얘기는 아니구요..
찬양에서 시작하신 글이 여러 면을 언급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먼저 찬양에서 시작해본다면
저희 교회의 찬양예배 시간대의 성가대로 있으면서
예배전 찬양 때부터 전면에 서서있다가
예배 중 찬양을 드리고 성가대 좌석으로 퇴장합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예배 전에 30분에 걸쳐서 드리는
찬양 때 만감이 교차합니다.
'만감'을 긍정적, 부정적 여러가지로 생각해주세요.
다비아를 접하면서부터 눈을 뜨게 된 것은
'내 생각 안에 하나님' 외에 생각을 해본다는 것입니다.
초월적 하나님을 초자연적 하나님과는 구분하여서
두려움과 신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빙산의 한 조각이며
이것만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한 조각이 영감의 시작이지 전부가 아니라는 것.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감정에서만 시작되도록 한정하느라고 내 감정을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이성으로 그 사랑을 한다는 것..
하고싶은 말들이 더 있지만
어려워져서 이만 맺겠습니다..^^
아침부터 좋은 글을 읽고 여러 모로 공감하면서도
답글도 훌륭하여야겠다는 압박에 이제서야 글을 씁니다.
그렇다고해서 그런 답글이 생겼다는 얘기는 아니구요..
찬양에서 시작하신 글이 여러 면을 언급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먼저 찬양에서 시작해본다면
저희 교회의 찬양예배 시간대의 성가대로 있으면서
예배전 찬양 때부터 전면에 서서있다가
예배 중 찬양을 드리고 성가대 좌석으로 퇴장합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예배 전에 30분에 걸쳐서 드리는
찬양 때 만감이 교차합니다.
'만감'을 긍정적, 부정적 여러가지로 생각해주세요.
다비아를 접하면서부터 눈을 뜨게 된 것은
'내 생각 안에 하나님' 외에 생각을 해본다는 것입니다.
초월적 하나님을 초자연적 하나님과는 구분하여서
두려움과 신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빙산의 한 조각이며
이것만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한 조각이 영감의 시작이지 전부가 아니라는 것.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감정에서만 시작되도록 한정하느라고 내 감정을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이성으로 그 사랑을 한다는 것..
하고싶은 말들이 더 있지만
어려워져서 이만 맺겠습니다..^^
찬양에 대한 글이네요.
할 말이 좀 많습니다.
여기서 부정적으로 거론되는 "현대적" 찬양에
몸을 많이 담았었어요.
대학의 찬양단에서, 여러분이 이름을 들으면 다 알만한 찬양 단체에 소속되기도 했고
어쩌면 찬양계의 좌파라 할만한 인디밴드들에 깊이 관여해보기도 했으며
일반 음악계와도 소통할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었습니다.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제게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던 것 같아요.
제가 고3때 극본을 하나 썼었어요.
주제는 바로 알고파님께서 제기한 것이었죠.
"참된 찬양이란 무엇인가"
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말씀하신) 두렵고 신비스러운 감정은, 여기에는 사실 없습니다.
원초적으로 "다른" 영적감정이 아닌가 합니다.
만약 현대적 찬양에서 그런 감정을 찾는다면
실패할 것입니다.
저는 좀 더 넓은 스팩트럼을 함께 공유했으면 합니다.
어떤 위대한 음악가의 연주를 들으면 전율을 느낍니다.
그런 "감정"은 마치 우리가 "자연"에서 느끼는 신의 손길로부터의 감정과 같습니다.
물론 이는 감상적 측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연주해 냄으로써" 찬양하는 이들도 있고
그것을 듣는 이들도 같은 감정을 경험해낼 수도 있습니다.
일반 음악을 넘어 우리가 곡조 있는 찬양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스팩트럼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혹 어떤 음악가는 가사를 "찬양"으로 갖추면서도
음악적 전문성을 중요시 합니다. 그들의 음악성은 일반음악을 넘어서기도 합니다.
여기에 누군가는 손가락질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듣고 "감동"을 받고 그들과 함께 "찬양" - 입이 아닌 마음으로 -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스팩트럼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분명 고대 교부들이 느꼈던 전율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음악의 발전은 우리 생각보다 오래 되지 않았으니까요.
사실 오늘날 교회에서 쉽게 불려지는 "찬양들"은 기반과 근거가 빈약한 것들입니다.
처음 다비아를 접했을 때, "찬양의 내용들"에 대해서도 정목사님의 비평같은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누군가 하고 있고, 혹은 더 책임감있는 준비된 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날의 찬양곡들은 가볍고 접근이 쉽습니다. 그것의 장단을 따지는 것을 넘어서
그것 자체가 이미 현대적 사조의 흐름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존중해줄 필요가 있고
신학적 접근도 많이 필요하며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손길도 많이 필요합니다.
최근 여기 한 구약학 박사가 교수자격논문(하빌리타치온)으로 시편이 실제로 불려질 수 있었는가를
연구한다고 하더군요.
일단 여기서 줄이고요, 아마도 알고파님이 제시한 글과는 좀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버렸네요.
하여간 찬양 하니 떠오르는 내용을 몇 글자 적어둡니다.
할 말이 좀 많습니다.
여기서 부정적으로 거론되는 "현대적" 찬양에
몸을 많이 담았었어요.
대학의 찬양단에서, 여러분이 이름을 들으면 다 알만한 찬양 단체에 소속되기도 했고
어쩌면 찬양계의 좌파라 할만한 인디밴드들에 깊이 관여해보기도 했으며
일반 음악계와도 소통할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었습니다.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제게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던 것 같아요.
제가 고3때 극본을 하나 썼었어요.
주제는 바로 알고파님께서 제기한 것이었죠.
"참된 찬양이란 무엇인가"
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말씀하신) 두렵고 신비스러운 감정은, 여기에는 사실 없습니다.
원초적으로 "다른" 영적감정이 아닌가 합니다.
만약 현대적 찬양에서 그런 감정을 찾는다면
실패할 것입니다.
저는 좀 더 넓은 스팩트럼을 함께 공유했으면 합니다.
어떤 위대한 음악가의 연주를 들으면 전율을 느낍니다.
그런 "감정"은 마치 우리가 "자연"에서 느끼는 신의 손길로부터의 감정과 같습니다.
물론 이는 감상적 측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연주해 냄으로써" 찬양하는 이들도 있고
그것을 듣는 이들도 같은 감정을 경험해낼 수도 있습니다.
일반 음악을 넘어 우리가 곡조 있는 찬양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스팩트럼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혹 어떤 음악가는 가사를 "찬양"으로 갖추면서도
음악적 전문성을 중요시 합니다. 그들의 음악성은 일반음악을 넘어서기도 합니다.
여기에 누군가는 손가락질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듣고 "감동"을 받고 그들과 함께 "찬양" - 입이 아닌 마음으로 -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스팩트럼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분명 고대 교부들이 느꼈던 전율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음악의 발전은 우리 생각보다 오래 되지 않았으니까요.
사실 오늘날 교회에서 쉽게 불려지는 "찬양들"은 기반과 근거가 빈약한 것들입니다.
처음 다비아를 접했을 때, "찬양의 내용들"에 대해서도 정목사님의 비평같은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누군가 하고 있고, 혹은 더 책임감있는 준비된 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날의 찬양곡들은 가볍고 접근이 쉽습니다. 그것의 장단을 따지는 것을 넘어서
그것 자체가 이미 현대적 사조의 흐름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존중해줄 필요가 있고
신학적 접근도 많이 필요하며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손길도 많이 필요합니다.
최근 여기 한 구약학 박사가 교수자격논문(하빌리타치온)으로 시편이 실제로 불려질 수 있었는가를
연구한다고 하더군요.
일단 여기서 줄이고요, 아마도 알고파님이 제시한 글과는 좀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버렸네요.
하여간 찬양 하니 떠오르는 내용을 몇 글자 적어둡니다.
알고파 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지금 샘터교회 예배에서
찬양이 어떻게 우리의 영적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답니다.
이미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가 그 답을 알려주고 있긴 하지요.
수도승들의 찬양과 같은 차원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예불 드릴 때 스님들이 함께 하는 염불에서도
어떤 종교적 깊이를 경험하기도 하는데요.
소리, 멜로디, 그것이 울리는 공간, 의미를 담은 언어 등등의 결합은
개인을 초월하는 거룩한 영의 현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 같더군요.
서울샘터교회의 예배에서 찬양소리가 꽤나 우렁차고 아름답습니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모인 탓인지,
그리고 예배에 집중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로서는 느낌이 아주 좋았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교회 회중 전체가 참여하는 합창제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좋은 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지금 샘터교회 예배에서
찬양이 어떻게 우리의 영적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답니다.
이미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가 그 답을 알려주고 있긴 하지요.
수도승들의 찬양과 같은 차원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예불 드릴 때 스님들이 함께 하는 염불에서도
어떤 종교적 깊이를 경험하기도 하는데요.
소리, 멜로디, 그것이 울리는 공간, 의미를 담은 언어 등등의 결합은
개인을 초월하는 거룩한 영의 현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 같더군요.
서울샘터교회의 예배에서 찬양소리가 꽤나 우렁차고 아름답습니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모인 탓인지,
그리고 예배에 집중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로서는 느낌이 아주 좋았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교회 회중 전체가 참여하는 합창제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좋은 밤.
알고파님의 찬양에 대한 깨다름이 대단히 건전 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대 차이가 나서 그런지 모르지만
요즘의 찬양이라는 것이 이해도 안되고 참여도 안됩니다
저는 요즘 교회마다 밴드(?) 수준의 악기와 소위 "몸찬양" 이라는 이름의 춤사위(?) 가
진정 기독교적인 것인가? 하는 의심을 합니다.
( 그럼 네가 말하는 기독교적인것이 무엇이냐 묻는 다면은 답하기는 어렵겟지만)
요즘 교회에서하는 찬양들은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라고 생각합니다
진정 하느님을 찬양 하기 보다는 "자기 감정의 표출" 로 보고 싶습니다
그 가사들도 내용이 깊지 않은 즉흥적인 짜깁기 형식이 대단히 많은 것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감정"보다는 의지가 "주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금의 사람들의 감정내지 감각만 자극하는 찬양들은
오히려 기독교의 복음의 내용을 훼손 하는것 아닌가 ? 하고 생각합니다
알고파님이 말 한대로 하느님에 대한 찬양 보다는 자기감정 표출로
"아부" 의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 합니다
물론 우리가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찬송가 에도 잘못된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작금의 유행(?) 하는 찬양들은 찬송을 전문적으로 연구 해 온 분들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에 "긍정적"인 면 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많다고 들 말합니다
하루속히 진정으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찬양이 회복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