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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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본회퍼는 지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어릴 때부터 성직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란 아주 명석한 아이였고, 신학을 전공하는 과정에서 하르낙 - 그는 본회퍼의 가족들과도 친분이 깊었다고 합니다 - 을 비롯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서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신학자는 바르트였다고 합니다. 바르트는 본회퍼가 쓴 논문을 보고 그의 신학적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고, 훗날에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이 둘은 첫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왠지 바르트의 신학과 본회퍼의 신학은 질적인 유사성이 느껴지는 것 같거든요...)


본회퍼의 신학에서 현재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그의 신학이 투옥되기 전과 투옥된 후, 즉 전기와 후기가 연속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그의 신학의 후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의 관점이 초기에도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김동건 교수님은 “그렇다”는 쪽이시네요...   


그의 신학이 백과사전적 바르트 신학과 차별화되는 가장 큰 특징은 일단 그는 오로지 “기독론(그리스도론)”에 집중한다는 사실과, 그의 “기독론”은 전통적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현존


그는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죽은 예수의 영향력이 후대로 내려오는 것이라는 관점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힘과 능력으로만 인식하는 관점을 모두 거부하고, “인격적 현존(presence)”의 관점으로 인식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와 인격적 만남을 가지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떻게 현존하시는가?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양식을 말씀, 성만찬, 공동체의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관념으로서 말씀이 아닌, 쌍방 간의 대화로서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상징과 의식으로서 성만찬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로서 성만찬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며, 집합적인 공동체가 아닌 생명의 유기체로서 공동체로 살아계신다고... (뭔가 ‘그리스도의 실체’ 에 대한 손에 잡히는 설명을 기대한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힘 빠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 나를 위한 그리스도와 나를 넘어서는 그리스도


본회퍼는 “나를 위한 그리스도” 와 “나를 넘어서는 그리스도” 의 변증법적 긴장 속에서 그리스도의 본질을 이야기 합니다. 전자의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역사의 현장 속에서 나와 연관성을 가지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실존주의적이고 구체적인 측면에만 머물지 않고, 후자적인 의미에서 그 것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그리스도를 이야기 합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라고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리스도는 나에게 “너는 누구냐?” 라는 물음을 되던지시고, 그리스도의 물음은 나로 하여금 자신이 좌절과 무능 속에 있음을 직시하게 만들며, 결국 나를 넘어서서 계시는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여, 그 속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와의 실존적인 만남을 통해 나는 다시 역사를 향하여 책임 있는 존재가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곳: 인간, 역사, 그리고 우주의 중심


이어서 본회퍼는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곳이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어디’ 라는 것이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란 것이 중요한데, 그는 인간의 존재, 역사, 우주의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를 이야기 합니다.


먼저 인간의 존재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옛 존재와 새 존재 사이의 한계선, 그 정중앙에 위치해 계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한계선은 인간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으며, 또한 인간이 그 한계선에 직면하는 순간 인간은 심판 받아야 하지만, 인간은 그 한계선, 그 중심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를 통해서만 새 존재가 될 수 있으며, 인간의 한계가 극복이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두 번째로 역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현존의 장소는 약속과 성취의 중심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그리스도는 역사가 약속의 성취에 대해서 무능한 바로 그 지점, 스스로 약속을 잃어버리고 희망을 상실한 그 지점에서 그 약속에 대한 성취(선취)로서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세 번째로 우주적 관점에서 그리스도는 자연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인데, 자연도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의 은혜 속으로 들어온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 부분은 충분히 이야기가 되지를 못했답니다.)


재밌는 것은 본회퍼는 ‘어디’ 라는 질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 인지를 답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합하면 그리스도가 “중심” 이라는 말은 인간 존재에서, 역사에서, 우주에서 그리스도가 바로 새로운 피조물을 향한 “주체” 라는 의미로서, 모든 종교적 경건과 율법을 앞서는 은혜라는 말로 다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본회퍼의 “그리스도의 현존”적 관점이었다고 한다면, 이어지는 이야기는 본회퍼의 세상에 대한 이해, 거기에서 파생되는 비종교화와 윤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현대 세계에 대한 이해


본회퍼는 현대 세계의 성격을 성숙성(자율성)과 무신성의 이중성으로 보았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이성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신화적 세계관이 힘을 잃게 되고, 인간은 ‘하나님’ 이라는 작업가설(working hypothesis)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사태를 처리하고 결정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으며, 대신에 인간 스스로에게는 책임성이 요구되는 성숙한 성인된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다른 말로 하면 종교의 시대에서 세속화의 시대로 넘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율적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서 신은 유물로서의 종교적 형식 안에서만 유명무실하게 존재하게 되는 그런 무신성의 시대가 도래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신성은 결국 건더기 없는 국물처럼 허무주의로 귀결되죠.


이런 세속화된 세상 속에서, 다시 말하면 무신성이 허무주의로 드러나는 현대 세계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가... 어떻게 복음을 의미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고민에서 본회퍼의 “기독교의 비종교화” 사상이 출현합니다.


*기독교의 비종교화


현실 기독교는 이런 위기에 대한 상황인식을 하긴 했지만, 그 해결책으로는 아주 졸렬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첫 번째로는 인간의 한계적인 약점을 잡아 죄책감을 유발하여 그 심리적 불안감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말하게 하거나... 두 번째로 평소에는 성인된 자율적인 삶을 살다가 어려울 때만 찾게 되는 도깨비 방망이의 하나님을 말하게 하거나... 세 번째로는 인간의 통전성을 뒤로한 채 신을 내적 영역에만 가두어서 결국은 인간의 제한된 주관성과 경험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말하게 하는 시도들 말이죠... (지금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정확히 예언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전율이 느껴지네요... 후덜덜)  결과적으로 이 세 가지 시도는 공히 하나님을 중심에서 주변부로 열외시켜버리고, 성서의 계시를 인간의 심리적인 부분에서만 작용하게 하는 종교로 전락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본회퍼는 보았습니다.


그는 또한 종교란 것을 계시(복음)를 표현하는 표현형식(옷)으로 보았고, 그 표현형식은 그 시대에서만 잠정적인 효용성을 가지는 것으로, 옷의 패션이 변하듯 항상 변하는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세속성과 성숙성, 그리고 자율성은 어떠한 종교도 필요 없는 혁명적 변화의 시대를 낳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앞에서 말한 이 세상의 현대적 특성은 종교라는 껍데기를 무력화함으로써 인간이 다이렉트로 하나님과 직면하게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즉, 현대의 비종교성이라는 위기 상황은 종교에 기대지 않은 액면 그대로의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하는 기회로 변한다는 것이죠.


비종교화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종교 속에서 말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말하여지고, 그리스도는 진정한 이 세상의 주가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결국 비종교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과 속’ 이라는 이원론의 해체입니다. 거룩함은 종교적인 영역에서 말하여질 것이 아니라 세속적 차원에서 말하여져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신과의 만남을 연결하는 매개체는 종교가 아니라 삶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또한 그 유명한 본회퍼의 “신 없이, 신 앞에” 라는 말은 종교라는 이름에 의한 신 없이, 그러나 세상 속에서는 더욱 철저하게 신과 함께 사는 기독교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본회퍼는 다음의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예수는 인간을 새로운 종교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삶으로 부른다.”


“종교적 행위가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기독교인을 만든다.”


*윤리


마지막으로 본회퍼가 그렇게도 공을 들였지만 끝내 마무리 짓지는 못했던 “윤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본회퍼에게 “윤리”는 이론을 넘어서 있는 실제적인 삶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현실에 집중을 합니다.


그렇다면 본회퍼가 말하는 “현실”은 무엇인가?


그가 말하는 현실은 “지금 여기”라는 구체적인 현실이 아닙니다.  그랬기에 그는 현대 사회의 성숙성과 무신성의 ‘현실’을 직시하긴 했지만 긍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가장 유일하고 궁극적인 현실은 “그리스도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본회퍼가 말하는 윤리는 ‘지금 여기’ 라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행동 강령과 동력을 찾는 일반적인 윤리와 궤를 달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현실과 그리스도의 현실을 분리하지 않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이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본회퍼는 기독교 윤리의 과제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이 그 피조물 가운데서 실현되는 것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본회퍼는 “선(善)”이란 인간의 경험적 실증에 의해서 만들어진 보편적 규범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실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현실이 아닌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강한 저항과 변화를 요청받고 그 현실의 실현을 위해서 강하게 실천적으로 참여하는 것, 그 것을 선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회퍼의 히틀러 암살 가담은 상황 윤리가 아닌, 그리스도의 현실을 가로막는 어두움의 힘에 구체적으로 저항한다는 신학적 성찰에 따른 행동으로 보아야 정당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성(forming)


그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형성(formation) 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우리가 따라야할 경건하고 선한 생활의 모범, 또는 종교적 모범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세상이, 성과 속이, 초월과 내재가 하나의 현실로 형성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 윤리의 최종적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성을 이 세상에서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이 형성은 인간이 성취하는(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형성에 동참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끌려 들어와 참인간이 되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한 인간의 유일한 모습으로 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또한 그리스도의 형성을 향해 부름 받은 모임으로,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자들의 종교단체가 될 수도 없고, 또한 교회 그 자체가 목적인 ‘종교적 사회’ 가 될 수도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교회는 진정한 현실인 그리스도의 현실을 증거 하는 곳으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부분에서 교회 자체가 지상 목적이 되어버린 우리나라 교회 현실을 한 번 돌아보게 되네요.)


*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인 것(the ultimate)과 궁극 이전의 것(the penultimate)이 하나됨


본회퍼는 또한 궁극적인 것 - 그리스도의 은혜 속으로 들어와 완전히 의로워진 현실 -과 궁극 이전의 것 - 그리스도의 현실로 들어오지 못해 의로워지지 못한 상태 - 사이에서 현실 참여를 고민할 때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의 두 개의 극단적 태도를 이야기 합니다.


그 한 가지는 급진주의적 길로서, 궁극 이전의 것들을 다 부정하며 심판의 대상으로 보는 입장이고, 다른 한 가지는 타협주의적 길로서, 현재의 현실을 인정하고 궁극 이전의 세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의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전자는 종말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후자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의 태도는 전혀 접점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본회퍼는 이 두 가지 다 반그리스도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 빗대어 이야기해본다면, 전자는 종말을 기다리던 엣세네 파에서, 후자는 이스라엘의 국권의 회복을 바라며 무장투쟁을 하던, 종교 단체라기 보다는 정치 단체에 가깝던 젤롯 파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어느 쪽도 긍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은 만납니다. 이 둘은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한단 말이죠.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궁극적인 것이 궁극 이전의 것 속으로 들어오고, 예수의 십자가에 의해서 역사는 심판을 받음과 동시에 은혜를 입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 역사의 어둠과 죽음은 끝이 나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생명을 죽음의 세계 한 가운데서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궁극 이전의 것은 궁극적인 것에 의해서 가치와 의미를 부여받고, 궁극적인 것은 궁극 이전의 것을 토양으로 해서 피고 자라며 완성되는 것입니다.


* 궁극을 향한 그리스도의 길 예비


또한 본회퍼는 궁극을 향한 그리스도의 “길 예비”에 있어서 인간은 책임 있는 존재로서 참여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어서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는 행위는 그 길 예비에 참여하는 행동의 구체적인 예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 행동은 궁극 이전의 것이며 궁극적인 것과는 구별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굶주린 자를 보고도 빵을 주지 않는다면, 이 것은 그리스도의 길 예비에 저항하는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궁극 이전의 것으로서 사회참여는 궁극적인 것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네 가지 위탁”(four Mandates)으로서 노동, 결혼, 정부, 교회의 네 가지를 이야기 하는데, 이것은 앞서서도 말했듯이 궁극 이전의 것이 궁극적인 것 안에서 의미를 가지는 구체적인 예로서,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부여한 소명으로서, 역사 속에서 실천해야할 윤리적 과제의 구체적 예로서 제시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남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부름과 따름


마지막으로 본회퍼의 관심은 “남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하는 것이었는데, 부름과 따름으로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예수의 부름에 순종하는 따름에서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그 “따름”은 우리 삶의 한 부분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삶의 모든 법칙과 결별하는 것이고, 또 우리를 지켜 주던 모든 세상적인 안전을 포기하는 것이며, 전혀 아무런 내용조차 없어 보이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미래에 우리의 전 실존을 던져 넣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자세가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본회퍼는 이 따름의 문제를 구체적 항목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태도와 자세로서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예수의 부름에 대해 전적인 따름이 없이는 은혜가 값비싼 것임을 알 수가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자기위로에만 그치게 하고 변화가 없는 은혜의 교리는 이 은혜를 값싸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모범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우리의 노력은 사실 우리를 절망케 한다는 것을 그는 뼈저리게 느낍니다. 우리의 노력이 클수록 절망도 크며, 우리는 철저히 무능력한 자신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능력으로는 전적으로 예수를 따르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과 무능력 속에서 이것을 가능케 하는 은혜를 만나게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따라서 참된 순종과 따름은 은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자신의 재물을 다 바치는 것, 높은 수준의 윤리적 삶, 청빈주의, 혹은 이상주의는 자칫 율법화된 기준을 지키는 것으로서 자기 결단과 자기 의의 성취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는 첫 따름은 인간이 예수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그 것 조차도 예수가 우리에게 허락한 은혜로 보았고, 또한 그 첫 따름과 좌절,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은혜로 인간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무한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첫날처럼

2009.05.11 00:28:18
*.216.20.250

본회퍼 편은 상당히 힘들었어요... 최대한 내용을 축약을 한다고 한 것이 그래도 이렇게 기네요... 책으로 읽을 시간이 안되시는 분은 보시면 도움이 될 거에요... 빠지는 내용 없이 다 넣을려고 애썼으니까요...

본회퍼는 투사적인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냥 단순히 행동주의자로 오인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본회퍼의 동기보다는 결과만을 취하는 경우도 많은데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본회퍼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케리그마에 잇닿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살짝 맛이간 것 같지만, 서경석 목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사회 참여에 있어서 독일 기독교가 본회퍼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참 부럽다고... 우리 나라의 기독교 행동주의자들은 케리그마와의 접점이 너무 약하다고... 많이 공감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본회퍼가 그냥 단순한 행동주의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를 사신(死神)신학 - 1960년대를 풍미하다가 사라진 - 의 선구자로 보는 것도 어찌보면 그에 대한 깊은 오해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교가 아닌 삶의 자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리라는 말이 아주 인상깊게 와닿았습니다... 좀 적절치 않은 예인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예를 들어볼께요... 

정신이 그렇게 똑바르지 않은 어떤 할아버지가 자신의 발에 유리가 박히는 것도 잊은채, 아이들의 발이 다칠세라 매일 길거리에 나와서 유리조각을 깨끗이 주워담았다는 실제 이야기... 

복음을 땅 끝까지라는 기치로 선교 사업(?)을 열정적으로 진행하면서 그간 이루어낸 성과에 골몰하는 모습...
 
친구의 삶의 고민과 넋두리에 밤이 늦도록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답이 없는 이야기지만 함께 웃고  울며 계속 나누는 모습... 

나는 이미 해결책을 가지고 있기에, 끊임없이 그 사람에게 종교적 모범답안을 늘어놓으며 가르치는 모습...      

어느 것이 그리스도의 현실에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해봅니다...

그리고 본회퍼가 처했던 상황의 엄중성이 "부름과 따름" 이라는 주제를 아주 무겁게 느껴지게 하지만, 너무나 어려운 것이거나 거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부름과 따름이란 것은 아주 일상적인 것일 수 있다는 말이죠...

   



      

나이스윤

2009.05.11 10:54:18
*.148.138.103

프린트해서 읽어보려 합니다. 
첫날처럼님은 독서량이 상당하신듯 합니다.
다비아에 글도 꾸준하시구여~
감사드리며~^^*
profile

우디

2009.05.11 11:06:07
*.15.172.34

바르트편에 이어 본회퍼편까지 이렇게 잘 요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 책의 사이사이에 첫날처럼님의 요약을 끼워넣고 읽어야겠습니다.
염치불구하고 다음 편의 요약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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