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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근래까지 기독교와 음악은 함께 시대를 걸어왔다.
한 때 쯔빙글리인가 어떤 교파는 예배의 순수성을 강조하여 그 순수성을 해칠 수 있는 요소의 하나로 보고 예배당내에서 모든 장식품들과 함께 오르간을 철거했던 역사적인 일도 있었지만, 어떻든 중세 서양음악은 늘 교회 주변을 맴돌았고 교회들은 음악을 예배의 주요 요소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지금 이 시대에는 (그게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음악 없는 예배를 떠올리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현대인들에게 있어 음악 없는 생활은 생각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즉, 우리 모두는 어떤 류의 음악(때로는 아예 소음화된 음악까지도)이 됐든 늘, 일상적으로 듣고 또한 거기서부터 그 무엇인가를 느껴야만 하는 처지를 마치 이 시대를 사는 숙명의 하나처럼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음악(때로는 어떤 소리)처럼 인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매개체도 없다.
음악은 매우 직접적이고도 또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예술 장르이며, 한마디로 만민 공통언어이다.(나치는 독일인의 우월성이 효과적으로 표출됐다고 여긴 리하르트 바그너의 순 게르만 풍 음악들을 당의 선전용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감정과 의사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쓰인다는 측면에서, 악곡은 아니지만 언어 또한 일종의 음악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특히 이태리, 독일 등 서양의 말소리가 보다 더 음악적이다.)
우리가 일상 티비나 라디오 혹은 시내 이곳저곳에서 끊임없이 무의식중에 듣게 되는 한 토막의 소리화 된 짤막한 음악들이 우리의 순수 감성이나 신앙심을 무의식중에 해치고 있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예를 들어서, 노래방 속에서 흔히 들려지는 이런 저런 대부분의 음악(노래)들은 이런 관점에서 말할 수 있는 대표적인 최악의 요소이다. 또한 째즈음악 장르는 그 예술성 유무를 떠나서 반 신앙적이다.
일본 한국 등 극동지역의 산물인 뽕짝가요와 그것의 리듬들 또한 우리가 늘상 접하는 소리 중에서 대표적인 반 신앙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대부분의 기계적 소음들과 도회지의 생활소음들은 우리의 혼을 어둡고 지치게 만들고 있으며 실로 이는 심각한 지경이다.
좋은 음악은 모든 윤리서와 철학 교과서보다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반대로, 잘못된 음악은 폭력을 싹 틔우고 키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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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명성을 가진 음악가로서 베토벤과 모짜르트를 비교하자면, 베토벤 음악은 심사숙고한 것이고 책임성이 강하나, 모짜르트 음악은 대부분 직관에 의한 것이고 즉흥적이며 한편은 마음 내키는 대로이다.
이런 관점에서 베토벤 음악에 관하여 어떤 평론가는 '베토벤 음악은 매우 도덕적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당시의 대다수의 서양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짜르트 역시 세려명을 가진 카톨릭신자였겠지만, 그가 전례용 미사곡이나 그밖의 몇몇 종교음악을 작곡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심을 확인할 만한 뚜렷한 유물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반면에 베에토벤의 여러 가지 유물에서는 이를(그의 신앙심을) 확인할 만한 게 종종 있다.
그가 임종시에 두 손안에 조그만 십자를 품고 있었다고 알려진 사실 말고서도, 그 중 나는 특히나 그의 6번 교향곡(일명 <Pastorale, 즉 전원>)을 꼽고 싶다.
이 곡은 그가 청각 장애가 오기 시작했던 20대에 한적한 전원지역인 하일리겐시타트에 요양을 가 그곳 자연 풍광을 보고나서 그 때의 감명을 기초로 하여 작곡한 것으로, 훗날 그는 "그 곡을 작곡할 당시 대자연을 보면서 위대한 창조주이신 신과 교감했노라"라고 그의 6번 교향곡의 작곡 배경을 스스로 언급했다.
총 다섯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악곡 전체 중에서, 약 절반 분량에 해당하는 처음 1악장과 2악장 부분이 특히나 창조주가 만드신 모습 원래 그대로의 아름다운 대자연을 귀와 눈, 그리고 우리의 모든 감성이 총동원되어 총체적으로 느끼도록 만들어 준다. 참으로 순수 음악예술이 표현해 주는 '아름다운 모습' 의 극치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이 곡이 예수님 말씀하신 '마음의 평안' 과 상통하는 '정서적 안정' 에 다가가도록 도와준다.
가령, 이를 테마로한 찬송가 버전을 찾으라면 나는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을 말하고 싶다.
이 곡은 매우 파퓰러한 음악이면서도 특히나 순수음악성이 강해서 제대로 연주된 게 매우 드문 곡으로, 나는 언제나 1952년도에 녹음된 명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비엔나 필하모닉과 연주하여 녹음한 작품을 듣는다.(그 약간 뒤 시대에 녹음한 역시 왕년의 대 지휘자인 브로노 발터 것도 명연주로 평가받고 있지만 내가 보는 바로는 푸르트 뱅글러의 연주에는 여러 면에서 미치지 못한다.)
나는 이 음악을 현대 크리스찬들이 들어야 할 음악의 하나로 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