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관련링크 : |
---|
좋은 글이 있어서 퍼왔습니다.
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이신 이종록 교수님이
SNS에 올리신 글입니다.
"이와 같은 때엔(29)-소비 욕망에 대해 생각해보자"
경고 : 재미는커녕 그지없이 식상하고 꽤 긴 글임.
1. 디지털 시대 키워드-“자본”
디지털은 인간이 가상(假想)으로 그리던 세계를 형상화시켰다. 물론 가상이라고 해서 그것이 현실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가상의 것들이 현상적인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현실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가상적인 것들이 영향력을 가질 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는데, 이제 디지털 기술을 통해서 그것들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이 상상하는 모든 것들을 그래픽 기술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상상”(想像)이 고전적인 의미를 잃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이 생각하는 모습(像)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대상의 현시성을 부인하는 상상이라는 말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늘날 상상은 엄청난 자본을 통해서 더 엄청난 자본을 만들어내는 기술적 도구이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내는 정교한 영화는 상상을 디지털로 구현하는 이매지니어(imagineer : imagine+engineer)들 몫이다. 옛날과 다르게, 상상은 바로 자본이다.
2. 디지털 시대 키워드-“탐욕”
그런데 자본은 자본 주체들이 자본을 들여 모든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조장하는 탐욕에 의해서 더욱 증대된다. 제2의 데카르트 시대라고 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는 인간의 주체성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그런 주체성은 자본과 결합해서 ‘소비’(消費)로 나타난다. 디지털 시대는 인간 개체의 소비욕구를 증대하고, 그것을 계속 극대화한다. 그리고 통신속도의 발달과 아울러 교통속도의 발달로 인간들의 소비욕구를 갈수록 더 신속하게 채워준다. 그래서 디지털 시대에 인간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탐욕스러워진다. 특히 한국은 ‘지름교’를 이야기할 만큼, 물질적인 소비욕에 사로잡혀 산다. 우리는 현실적인 욕구실현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다. 컴퓨터를 켜면,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은 사라지고, 인간이 이루려는 가상의 세계도 사라지고, 그저 모든 것이 눈앞에 존재하고 모든 것이 현시적인, 그래서 현실적인 욕구충족만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다.
사고 싶은 것들은 모두 인터넷이 연결해준다. 인터넷은 인간들을 끊임없이 배고프게 한다. 그래서 물건을 사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한다.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무조건 ‘지른다.’ 여기에는 인터넷뿐만 아니라 티비의 상업방송도 큰 몫을 한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미디어에 귀가 얇아져서 미디어를 신봉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용카드 번호를 불러주거나 번호를 타이핑하는 자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형국이다. 이처럼 이 시대는 사람들에게 과도한 탐욕을 불러일으키고 모두를 탐욕무아지경으로 몰아간다(쥴리엣 쇼어, 『쇼핑하기 위해 태어났다』).
3. 한국교회-“달라”교
이런 욕구는 교회를 새로 짓고 확장하고 싶어 하는 통제할 수 없는 욕구와도 일치한다. 교회도 탐욕과 몰아적 소비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교회 역시 현실적인 욕구충족을 위해 봉사하는 듯 모습을 보인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설교와 음악들은 모두 현실적인 욕구충족을 위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이미 고전이 된 “꿈은 이루어진다.”는 구호를 아직도 내건다. 하지만 기억하라. 꿈은 하나님이 꾼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꿈을 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꾸는 꿈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 꿈을 이루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더 이상 요셉을 꿈꾸는 자라고 말하지 말라. 요셉이 꾸었던 두 가지 꿈은 ‘개꿈’이다. 그는 출세욕에 사로잡혀 가족을 어렵게 만든 사람이다.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렇다. 제 야망으로 똘똘 뭉친 자가 오는도다. 그게 한국교회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결국 “그저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인겨” 라고 외치는 자가 오는도다.
도대체 인간들에게 욕심을 부추기는 종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종교라면 당연히 인간들에게 욕심을 버리자고 외치지 않는가? 그런데 예전에는 영과 육을 구분하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구분하면서,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지만, 그래도 말로는 이 세상 것들 다 쓸데없다고, 명예와 부와 권력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더니만, 지금은 드러내놓고 그 쓸 데 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애쓴다. 그래서 성공하는 것이 곧 진정한 신앙의 증거라는 사실에 모두 동의한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뵈어도”라는 찬송은 “이 눈에 성공이 증거로 뵈이니”로 불러야 할 상황이다.
이렇듯 디지털 시대에 기독교는 욕심을 잉태하고 욕심을 실현하는 데 전력 질주하는 탐욕스러운 종교로 변모한다. 근면과 검약을 기초로 자본주의를 만들어낸 기독교는 오늘날 상업적인 자본주의와 완벽하게 결합함으로써 쾌락과 소비를 표어로 삼는다. 한국기독교는“쓰다가 죽자!”라고 외쳐대는 듯하다.
미국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한국 기독교는 얼마 전부터 자본주의의 상업적 논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서 극대화한다. 야베스의 기도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 전략은 ‘아침형 인간’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야베스의 기도는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완벽하게 결탁했음을 입증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더 많이 바라고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벌기 위해 필요하다. 그래서 예배는 사라지고 자본적 주술만 남는다. 우리가 경외할 신은 사라지고 램프의 요정 ‘지니’만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은 버려두고 법궤만 들고 전쟁터로 나서는 홉니와 비느하스다.
4. 한국교회-“웰빙”교
이런 주술적 사회에서 우리는 인터넷으로 전 세계를 연결하면서도 끊임없이 개인화하고 고립화한다. 교회와 교인들의 개인화는 정말 심각하다. 나는 토마스 머튼을 공부한 사람들이 개인적인 영성으로 치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 머튼이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고, “아무도 섬이 아니다”는 책을 쓴 그 사람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영성은 윤리(倫理)를 기본으로 한다. 윤리는 기본적으로 어우러짐의 이치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짐이 없이 어찌 영성이 가능하겠는가? 골방에 틀어박혀 영성을 이루려는 것은 일장춘몽이다. 성경을 쓴 사람들이, 예언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 골방으로 들어가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그들은 각박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지고 얽히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런 삶 속으로 말씀을 들고 다시 들어갔다.
영성을 정신훈련쯤으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다. 어떤 방법을 통해 정신적인 평화와 안정을 취하는 것을 영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반성서적이고 반기독교적이다. 그러려면 차라리 참선(參禪)을 하든지 요가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그렇게 닮으려고 하는 우리 주님은 신(神)인데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지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도 못 이루고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처절하게 외치셨다. 왜 우리 주님은 신이면서도 불안과 염려를 떨치지 못했는가? 왜 고통을 이기지 못했는가? 예상과 다르게, 주님은 항상 염려하셨다. 목자 잃은 양같은 사람들을 보고 안타까워 하셨다. 나사로가 죽은 것으로 보고 눈물지으셨다. 예루살렘을 보면서도 눈물 흘리셨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노하셨다. 종교를 통해서 평안을 얻으려는 웰빙 욕구로 충만한 이 시대에, 평상심을 잃는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을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 이종록 교수(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이네요...
특히나 이 시대가 사람들을 탐욕무아지경으로 몰고 간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때로는 탐욕의 광기로 가득차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속에서 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니...
오직 주의 은총을 구할 수 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