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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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Marcus J. Borg'의 <<Speaking Christian>>
Why Christian Words Have Lost Their Meaning and Power-
And How They Can Be Restored
한국어 번역판,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에서
제가 발췌 요약 정리한 "예수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다.
8장 예수의 죽음
속죄로서의 죽음
속죄로서의 죽음은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즉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 우리의 죗값을 치렀다는 것이다. 이를 신학 용어로는 ‘대속’ 또는 ‘속죄’라고 한다. 예수는 우리가 받아 마땅한 형벌을 대신 겪음으로써 하느님의 진노를 가라앉혔다.
이러한 이해방식이 굉장히 만연해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정통적이고 전통적인 이해방식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방식은 전통적인 것이 아니고, 성서에 나오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1천 년이 될 때까지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해방식이었다.
예수의 죽음을 ‘우리를 위해’ 그리고 ‘희생’과 관련짓는 언어는 신약성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대신해서’라는 의미가 최초로 결부된 것은 1097년이 되어서였다. 켄트베리의 대주교 안셀무스는 <<왜 하느님은 인간이 되었나, Cur Deus Homo?>>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왜 하느님은 인간이 되었나?, 왜 예수로 육화했나?” 안셀무스의 답변에 따르면, 인과응보의 하느님이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인간 편에서 치러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에 그 죗값을 온전히 치를 수 없다. 오로지 완전한 인간만이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신성이 있지 않는 한 인간은 완전할 수 없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인간인 예수가 되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방식이 단지 고대의 것이 아니라고 해서 부적합해지는 건 아니다. 성서 시대 이후에 이뤄진 신학적 발전이 우리의 이해를 돕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성서 시대가 끝났다고 계시가 멈춘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영은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러한 이해방식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알지 못하는 심각한 문제점들이 내재해 있다:
1. 그러한 이해방식은 예수가 우리 죄 때문에 죽어야만 했고,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였다고 암시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완전히 지워 버리고 모호하게 만든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는 그냥 죽은 게 아니다. 살해된 것이다. 그것도 범죄자나 암살자에 의한 게 아니라 제국 권력과 종교 권력의 결탁에 의해, 그냥 처형된 것도 아닌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또한 비공개적인 방법이 아니라 공개적인 방법으로. 십자가형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에게 도전하면 너희도 이렇게 된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을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로 본다면 이 모든 역사적 의미가 사라지고 만다. 그 당시 지배 권력자들이 정치 종교적 목적으로 예수를 죽였다. 하지만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을 수 있도록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2. 대신 바쳐지는 제물, 즉 대속은 하느님의 성품에 의문을 제기한다. 대속은 하느님을 징벌적인 존재로 그린다. 하느님은 우리가 위반한 법을 제정한 입법자다. 하느님은 우리를 징벌함으로써 법을 시행해야 하는데, 우리를 처벌하지 않으려면 그에 버금가는 충분한 희생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의 죽음이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가 되었다. 이 말할 수 없이 훌륭하고 선한 사람을 처형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때로는 이것이 사랑의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한 논리로 전용되기도 한다. 즉, 하느님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기꺼이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 주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포장한다 해도 징벌적인 하느님의 성품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 누구든 반드시 벌을 받아야만 한다. 하느님은 피를 위한다. 우리의 피든 예수의 피든.
3. 그러한 이해방식은 그리스도교의 의미를 왜곡한다. 예수의 죽음을 대속의 틀로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죄와 용서,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내세의 축복에 관한 종교라는 세속의 통념을 강화한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천당과 지옥 해석틀의 본바탕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면? 사실은 그리스도교의 구원이 변환, 즉 우리 자신과 세상의 변환에 관한 것이라면? 예수의 죽음을 대속의 틀로 이해하는 방식은 이러한 점을 가려버린다. 또한 예수를 믿고 용서받아 천국에 가는 게 그리스도교의 전부인 것처럼 만들어버린다.
예수의 죽음이 지니는 의미
신약성서가 전하는 그 의미는 모두 부활절 이후의 것이다. 예수가 죽기도 전부터 예수와 제자들이 그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자 했다고 가정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예수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요약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는 십자형에 처해졌다.: 바울의 편지와 복음서들은 이를 전한다. 1세기의 상황에서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했음을 강조한다는 것은 곧 복음이 반제국적인 복음이라는 의미였다. 마가의 세 번(막 8:31~33, 9:30~32, 10:32~34)에 걸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예고는 우리 죄를 위한 죽음에 대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자들이 그를 죽일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예측이었다.
2.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개개인의 변환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두의 변환을 상징하는 은유가 된다. 이는 바울의 자전적 고백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 2:19~20) 또한 로마서 6장 1~4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것이 세례의 의미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서는 그것은 새로 태어나는 것, 성령으로 새로 나는 것으로 말한다.(요 3:3) 새로 태어나는 것이란 옛 정체성과 존재방식이 죽고, 새로운 정체성과 존재방식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개인적 변환의 길을 열어주며, 이것이 사순절 기간의 주된 의미이기도 하다.
3.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다.: 이러한 이해에는 중요한 전제가 깔려 있는 데, 그 전제 없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즉, 바울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하느님의 결정적 계시로 보았다는 점이다. 예수에게서 우리는 하느님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본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권력에 도전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에서 하느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도록 예수를 보낸 징벌적인 하느님이 아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변환을 갈망하는 하느님이다.
희생
우리가 ‘대속’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대신하여’라는 개념은 성서에 나타난 희생의 목적과 의미를 철저히 왜곡한다. 희생은 결코 ‘대체’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 재물만 바치면 하느님이 기꺼이 그 짐승을 대체물로 받아주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희생’은 무언가를 하느님에게 바침으로써 그것을 성스럽게 만든다는 뜻이다. 희생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sacrifice의 라틴어 어원이 sacrum(성스러운) + facere(만들다)라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느님에게 바쳐지는 짐승 제물은 그 과정에서 성스러운 존재가 된다.
성서 시대에 희생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그중 어느 것도 대체에 관한 것은 없다. 사제들은 성전에서 매일 희생제물을 바쳤는데, 이는 성전에 거하는 하느님을 ‘공양’하는 의미에서였다. 감사의 표시로도 희생제물을 바쳤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감사의 뜻이었지 무언가를 요구하는 건 아니었다. 기원을 위한 희생제물이 무언가를 요구하고자 바치는 제물이었는데 가뭄, 기아, 전염, 전쟁 등을 겪으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그러한 제물을 바쳤다. 정화를 위한 제물도 있었는데 불결함을 없애기 위한 것이지 죄를 씻기 위한 게 아니었다. 죄나 악행에 대한 희생제물도 있었다. 죄를 저지른 자는 죄를 보상하고 하느님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하느님에게 희생제물, 곧 선물을 바쳤다. 그러나 여기에도 ‘대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곧잘 ‘희생양’이 우리 죄에 대한 희생제물로서 바쳐진 예수의 죽음을 설명해주는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대교에서 희생양은 재물로 바쳐지지 않았다. 유대교 속죄일 의례에서는 두 마리의 염소를 사용하는데, 한 마리는 성전에 희생제물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상징적으로 사람들의 죄를 지워 광야로 내보냈다.(레위 16:20~22) 이 때 그 두 번째 염소를 ‘희생양’이라 했다. 그 염소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제물로도 바쳐지지 않았다.
예수의 죽음이 위에서 제시한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희생에 해당하는가? 나중에 다룰 선물과 식사라는 주제 말고는 그런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이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고대에서뿐만 아니라 현대의 세속적 언어에서도 통용되는 의미에서의 희생이었는가? 그렇다.
우리는 누군가가 어떠한 목적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고 말한다. 꼭 목숨을 잃는 게 아니더라도 우리는 다른 이들, 가족이나 더 큰 세상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희생은 사랑과 함께한다.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사람은 사랑이 더 많은 자다. 이들의 죽음이 무언가를 대신하여 죽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자신의 삶을 희생했다고, 타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하느님이 예수의 죽음을 희생제물로 요구해서가 아니다. 하느님이 디트리히 본회퍼, 마틴 루터 킹, 오스카 로메르의 죽음을 요구했다고 말하면 비웃음을 살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선물로 바쳤다. 하느님이 요구해서가 아니라 그가 하느님 나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갈망으로 충만했기 때문이었다.
예, 닥터케이님, 마커스 보그의 글이 조금 생소하고 혼란스럽지요.
저도 처음 접할 때는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지금은 제법 익숙해졌고 편안하게 읽어내고 있습니다.
세상과 하느님을 바라보는 새로운 렌즈를 하나 더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고 안하고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기독교 2000 년을 주도해 온 바울 신학의 중심인 "신앙의 그리스도"에서 벗어나,
"역사적 예수"를 더 집중해서 조명하고자 하는 예수 세미나 회원 중 마커스 보그
의 저술들은 다른 연구자들의 저술보다 쉽게 읽을 수 있으며, 명료성이 돋보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평신도들도 이해하고 접근하기가 비교적 용이하다고 봅니
다.
보그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심장"에서 기독교 전통(성서, 신조, 교리)과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과거의 패러다임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이 보고 있습니다. :
1. 성서를 하느님이 만드신 것으로 본다
2.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3. 신앙은 믿는 것이 중심적이다.
4. 내세(afterlife)가 중심적이다.
5. 기독교인의 삶은 요구되는 것들과 보상에 관한 것들이다.
반면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1. 역사적: 성서는 고대 이스라엘과 초기 기독교 운동이라는 두 가지 옛 공동체의 역사
적산물이다. 성서는 우리에게 혹은 우리를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그 성
서를 만들어 낸 고대의 공동체를 위해 쓰여진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인간
의 응답이다. 역사적 접근방식은 그 고대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해석해야 그
의미를 잘 드러내는 힘이 있다.
2. 은유적: 성서를 은유적으로 본다. 이 말은 성서의 “문자 이상”의 의미, “사실 이상”
의 의미를 뜻한다. 즉 성서 이야기들의 역사적 사실성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지만, 그 의미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성서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어
떤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을 가리킨다. 문자적으로 사실
적으로 일어났던 이야기라기보다는 은유적인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난처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이 그런 식으로 발생했던지 발생하지
않았던지 간에, 그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이야기는 우
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성례전적: 이 말은 성서가 (세례와 성만찬과 같은 성례전처럼) 신성한 것을 매개할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성례전은 눈에 보이고 물질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거룩한 영이 우리에게 현존하게 된다. 성례전은 은총의 수단이며,
거룩한 영의 도구 혹은 그릇이다.
과거의 패러다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패러다임은 성서를 신성한 경전으로 보지만,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신성하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성서는 그 위상과 기능
에서 신성하지만, 그 기원과 권위에서 신성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요점은
성서와 기독교 전통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성서와 기독교 전통, 곧 신성한 것의 은유
와 성례전으로서, 거룩한 영이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수단으로서
의 성서와 기독교 전통 안에서 살아가는 일이다.
4. 관계적: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내세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 요구되는 것들을 충족
시키는 것이 아니며 굳이 믿는 것에 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인의
삶은 현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즉
기독교인 된다는 것은 기독교를 믿는 것을 뜻하지 않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신성한 것의 은유와 성례전으로서의 기독교 전통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내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의 심장"은 쉽게 읽을 수 있으며, 가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청파교회를 비롯해서 몇몇 교회가 독서 교재로 사용했더군요.
Sorry for my writing in English.
I am writing at my office where no Korean script is available.
I am currently reading the Korean translation of the 'Meaning of Jesus' (2007),
a dialogue between Marcus and Tom Wright.
I like Tom Wright a lot but his writing in this book is difficult to read.
He is usually a very descriptive and I like his style but this book is too much.
Hope this is not the problem of translation.
On the contrary, Marcu's writing is very succinct and concise.
Actually this is my first reading of Marcus but, as two readers above,
I think I like him: an eye-opening perspective, which will broaden my horizons.
Himalaya님 반갑습니다.
어디 히말라야가 보이는 외국에
거주하시나 보지요?
저도 동감입니다. "예수의 의미"에서
'톰 라이트'의 글은 너무 만연체이거나
문맥의 호흡이 길어 읽어 내기도
핵심을 잡아내기도 힘들더군요.
반면에 보그의 글은 지적하신대로 아주
명료하고 간결해서(succinct and concise),
읽어 내기도 쉽고 핵심을 잘 파악할 수 있었으며,
독서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어서 좋았습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보그의 문체와 형식, 논리전개를
본받고 싶습니다.
보그는 주로 독자들이 이 세상과 하느님을 보는 눈,
즉 perspective의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거 같습니다. 요 다음에 "예수의 의미"에
나오는 보그의 글들을 정리해서 올려볼께요.
톰 라이트의 글들은 요약하기가 넘 힘들어요.
지금은 냉탕에서 온탕으로 옮겼는데,
저도 좀 헷갈리네요.ㅎ ㅎ
Marcus J. Borg를 덮고 '마틴 로이드 존스'의
사도행전 강해설교를 며칠째 읽고 있습니다.
냉탕과 온탕의 차이가 이럴 줄이야...
그러나, 양쪽 다 진정성이 있어서 좋습니다.
마커스 보그의 통찰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머리속이 잠시 멍해지는 듯 했네요.
위의 내용에 100프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충분히 주위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할만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