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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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람 세속성자를 위한 신학강좌 갈수록 흥미 진진하다...
신론, 그리스도론, 구원론, 죄론까지...
카톨릭은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주입되는 것으로 보았고, 개신교는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전가되는 것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
따라서 개신교에서는 자연히 인간은 죄인이자 동시에 의인인 이율배반적인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았고... 교리적으로는 칭의와 성화로 나뉘어져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성만찬을 이해하는 입장만 봐도 카톨릭은 화체설을, 개신교는 기념설을 주장하는 것에서 “주입과 전가”의 차이가 드러난다... 즉 카톨릭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주님의 몸 그 자체로 보는 반면, 개신교는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는 점...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도 참 흥미진진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적 해이 속에서 교회에만 소속 되면 구원이 보장되는 것으로 생각하던 그 당시 상황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사람이 펠라기우스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선을 행함에 있어서 무능력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능력이 부여된다고 본 반면에,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은총의 일부분으로서 그 자체로서 완전하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으로 보았다.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으로 본 것)
내 입장을 말해본다면... 원론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 두 신학자의 중간에 서고 싶다...
둘 다를 비판해볼 부분이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해낼 가능성이 크고...
펠라기우스에게 있어서 절제는 절제를 위한 절제, 수행은 수행을 위한 수행으로 자기만족에 빠지는 극단적 금욕주의 신앙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두 입장의 중간에 서보면... 나는 절제와 수행은 그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준비 작업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총은 햇빛처럼 그 누구에게나 똑같이 내리지만, 갖은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마음과 청정하고 깨끗한 마음... 어떤 마음이 하나님의 은총의 임재를 더 잘 느끼고 누릴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자명하다...
참 재미있는 의견이시네요...
저는 어거스틴의 입장에 서 있는 편입니다.
저랑 이해가 조금 다른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크게 문제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펠라기우스는 자유의지를 은총의 일부분으로 보았다고 이해하셨는데요...
제가 알기로는 자유의지가 완전하다고 결론내렸고, 은총은 그 자유의지를 돕는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펠라기우스가 주장했다고 이해하고 있는데요... 더 치밀하게 연구 비교해 봐야 정확하게 알 듯 합니다.
그리고, 첫날처럼님의 마지막 결론은 새로운 시도라는 생각은 듭니다.
다만... 펠라기우스의 의견에 가깝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총은 완벽하지만... 인간의 노력여하에 따라 구원의 가능성이 결정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자리가 너무 빈약해지는 것은 아닐런지요...
또한... 절제와 수행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절제와 수행을 하지 않은 수많은 죄인들에게 예수님은 함께 하셨고, 또 역사적으로 그런 수행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수많은 악인들이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나 예수를 영접하였던 그런 예도 많이 있습니다. 결국 은총에 귀결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런지요...
저는 철저한 어거스틴의 편에 서고 말았네요...
무엇이 옳은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펠라기우스가 자유의지를 은총의 일부분으로 보았다는 것은 저도 확실치는 않네요, 그러고 보니. 그렇지만 자유의지가 완전하다고 보긴 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혹시라도 펠라기우스가 기독교 전통의 한 축, 즉 신의 초월이 아닌 신의 내재를 이야기 하는 쪽을 대변할 수 있다면, 그가 자유의지를 은총의 하나로 보았다고 이야기 하는 것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펠라기우스가 너무 홀대 당하고 딲이는 분위기라 그의 이야기에서도 뭔가 배울 점이 있기는 있지 않겠나 생각해본 것 뿐이구요.
그리고 저도 절제와 수행은 행위론적이 아닌 존재론적으로만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은총은 당연히 절제와 수행을 비웃는 방식으로도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죄인이라고 불리우던 사람들에게 다가갔을 때에도 그냥 "짠!" 했다기 보다는 그 사람들의 죄의 구름 속에 묻혀서 드러나지 않았던 그 은총의 빛을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소중한 존재들임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첫날처럼님, 잘 읽었습니다.
제가 요즘 최민순신부의 번역으로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고 있었어요.
1965년판, 부제가 -님 기림-이네요. 아, 그래서인지 더, 두 어르신의 논쟁이 눈에 들어오네요.^^
한번 옮겨 볼께요.
(저는 오늘 좀 큰 소리로 낭송을 해 봤더니.. 댑따 은혜스럽던데요?ㅎㅎ)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제 1편 1장)
주여, 당신은 위대하시고, 크게 기림직 하옵시며(시편, 144:3)
당신 능히 크시고 그 슬기는 헤아릴 길 없나이다.(시편,146:5)
이제 당신이 내신 한줌 피조물 인간이 당신을 찬미하고저 생심하옵다니
-죽음살이 두루 뻗혀 스스로 지은 죄의 증거와
(오만한 자를 당신이 물리치시는)그 증거를 몸소 지니는 인간이 아니오니까?
그러하와도 당신의 한 줌 피조물 인간이 감히 당신을 기리려 드옵나이다.
당신을 기림으로써 즐기라 일깨워 주심이오니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나이다.
주여, 당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면 당신을 기리는 것이 먼저인지,
혹은 당신을 아는 것이 부르는 것보다 먼저인지 나를 알게 하소서. 알아듣게 하여 주소서.
그러나 누구 있어 당신을 모르면서 부르오리까?
모르고 하는 자는 이것 대신 딴 것을 부르기가 쉽사옵니다.
이러하올진대 차라리 부름 받으시기는 알음 받기 위함이시온지?
그러하오나 (믿음 바 없는 그분을 어찌 부르며 전도하는 자 없어 어찌 믿으오리까(로마, 10,14)
그를 찾는 자들이 주님을 찬미하리니 찾는 자들이 그분을 얻고, 얻으며 그분을 찬미하리로다.
주여, 내 당신을 찾고, 당신을 믿으며 부르오리니 이미 당신은 우리에게 전도되었음이니이다.
내게 주시고, 당신 聖子의 人性과 당신 전도자의 성직으로
내게 불어 넣으신 내 信德의 주여, 당신을 부르옵나이다.
첫날처럼님 글은 매번 쏙쏙 잘들어옵니다 ..ㅎㅎ
저도 내리신 결론에 동의합니다. 동시에 방안을 잘 정리하고, 창문을 열어놓으면 미풍이 불어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크리슈나무르티의 말도 생각나네요 ..
좀 더 근본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든 펠라기우스든 자기기만으로만 흐르지 않고,
진정성을 유지한다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