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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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않을 사람을 미리 선택해놓았다고 하는 "선택구원론" 도 상황과 논리의 산물임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신학자가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둘러보니, 자기 눈에 보기에는 하나님을 잘 믿고 충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어도 안 믿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다. 즉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있어 보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논리적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은 완전한 것이어야 하는데, 현실에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생기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은 불완전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논리적 완전성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미리 선택해 놓고 선택해 놓은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는 일점 일획의 틀림도 없이 이루어내신다는 결론을 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칼빈의 경우에는 거기에 덧붙여, 그 당시에 신생 개신교를 이끌면서, 전통의 가톨릭을 상대하면서 느끼는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선택하셨다"는 생각이 꼭 필요했었다고 한다.)
오히려 상황을 초월한, 원론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의 완전성" 은 보편 구원론을 지지하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었고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었어야만 그 완전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그리고 선택구원론을 지지하는 신학자의 오류는 구원의 여부에 대한 예비적인 판단을 스스로가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도 전에.
좀 쉽게 결론을 낼 수 없는 어려운 문제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쉽고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고.
어려운 주제지요?
세상 끝날에야 다 드러날 텐데,
그때까지 '진리질문'을 놓치지 말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기다려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