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관련링크 : |
---|
주일아침, '신앙의 부족함'을 전제로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사춘기때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신후, '지와 사랑'의 나르치스 처럼 오직 그분안에서의 삶을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서 인문사회학을 공부한후, 좀더 구체적으로 기독교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즉, 니체가 제기한 '인간의 노예성과 주체적 인간', 본회퍼 목사님의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함께'란 비종교성 테제에 대한 관심이 20~30대의 청년기의 삶을 줄곳 지배했습니다.
열심을 품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큰소리 쳤지만, 아쉽게도 본회퍼 목사님이 세속화된 사회에서의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기대했던 바람과는 달리 세속주의에 빠져드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겨우 돌부리를 붙잡고 떨어지는 절벽아래에서 다시 기어오르는 심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향해 나아가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가급적 개인적 판단이나 선택을 자제하려고 노력하면서.(현실은 정말 쉽지 않고 그냥 마음과 생각만이라도. ㅎㅎ)
개인적으론 하나님의 손 안에서 신앙의 변증적법 연주를 하지만, 유치한 어린애 수준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 모습에 부끄러워 어찌할바 몰라합니다.
여전히, 남는 고민은 과연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알면서 행하지 못하는 존재)이 그분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실제 가당치도 한 것인지? 지정의라는 인격적 주체를 가진 존재로서 자발적으로 삶을 선택하면서 그분의 뜻을 따라가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고민입니다.
신앙의 선배님들의 좋은 가르침을 기대합니다.
부족한 사람이 작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푸른별님의 인생을 제가 어떻게 재단하며 그 출발과 마지막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 답이 무엇이라고 확신한다면, 그 순간 그 답은 또다른 사고의 감옥이 되어 자신을 가두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제 짧은 생각으로는 지금까지 잘 살아오셨고, 잘 살아가시리라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런 순간순간들을 수없이 많이 겪었습니다.
아니... 진리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은 반드시 그 순간들을 끊임없이 지나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지 않느냐구요...
그렇지요... 하지만, 우리 인간의 인식과 이성은 그런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이상을 넘어갈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가시에 둘러싸인 고뇌에 빠져 있어야 하느냐구요?
그 한계의 순간순간을 외줄타기하듯 견디고 버티며 기도할 때...
그 순간 하나님의 빛이 우리를 붙잡아 준다고 믿습니다. 그 빛을 보신다면 힘이 나지 않으실까 생각됩니다.
푸른별님의 말씀대로... 변증법과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는 고백이 맞는 듯 합니다.
변증법 신학의 대가 칼바르트의 말을 빌리자면요...
신학은 아무리 훌륭해도 그 자체가 죄악되고 불완전하며 부패했고 무성에 떨어진 인간의 행적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하나님봉사와 교회공동체 봉사와 이 세상에서 전혀 쓸데없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신학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자비란 하나님의 선택인데 이 선택 안에서 하나님은 또한 유기하신다. 하나님의 자비란 하나님의 부르심인데, 이 부르심 안에서 하나님은 작별을 고하기도 하시고 제거해 버리시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자비란 하나님의 은총인데, 이 은총 안에서 하나님은 심판을 행사하신다. 하나님의 자비란 하나님의 "Yes"인데, 이 "Yes" 안에서 그는 "No"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유기, 제거, 심판 및 거부는 인간의 가장 훌륭하고 고상한 업적과 신학이라도 심판하시고 파괴하셔서 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죄악스럽고, 불완전하며, 부패하였고, 무성에 떨어진 것으로 증명해 버리신다.
모든 신학활동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타당하고 유용할 수 있으려면 이 하나님의 불에 노출되어야 하고 이 하나님의 불을 통과하여야 한다. 이 불이란 하나님의 사랑의 불인 바 동시에 이는 태워버리는 불이기도 하다. (복음주의 신학입문 중에서)
윗 글에 나오는 신학을 신앙으로 바꾸어도 뜻이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칼바르트는 철저히 하나님 주권의 은총을 이야기합니다. 그 은총이 푸른별님을 부르셨고, 푸른별님은 응답하셨고, 그 음성을 따라 광야와 골짜기를 지나오신 것입니다. 아직 음성을 쫓고 계시구요. 하나님의 예스와 노를 계속해서 변증법적으로 꼬인 줄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을까요? 중간중간 오아시스와 같은 주의 은혜를 맛보면서 말입니다...
저도 아직 흔들리는 촛불에 불과합니다. 인생이 그런 위기의 연속 아닐런지요...
고정되어 있는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있었다면 이 세상은 이미 파라다이스가 되었겠지요.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만이 아시겠지요...
좀 더 방향을 정확하게 잡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바라보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이라든지... 칼 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입문도 좋은 책입니다. 최근에 개신교신학입문이라는 제목으로 새 번역본이 나왔네요. 수십년 쌓이셨다면 얽히고 설킨 실타래가 영혼을 휘감고 있겠네요.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시다 보면 그 실타래를 풀게 하는 한가닥을 잡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청년 전도사 때 어느교회 표어가 이랬습니다.
'주님은 나 위하여 돌아가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
참 감성적인 표어로 신자를 목회의 도구로 여긴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 사람은 40일 금식을 하면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하겠죠.
어떤 사람은 전도를 많이 하면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어떤 사람은 헌금을 많이 하면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무엇이 주님을 위한 삶일까요?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