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7일
바라바 이야기(8)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5:13)
아, 듣고 싶지 않은 고함소리를 결국 듣게 되었습니다. 민중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들은 민족 해방의 영웅인 바라바가 자신들을 구원하지 예수가 아니었다고 생각한 걸까요? 아니면 대제사장의 선동에 놀아난 것뿐인가요. 어느 쪽이든지 절망적인 일입니다.
바라바와 예수는 여러 면에서 비교됩니다. 우선 비슷한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라바와 예수는 똑같이 삶과 세상의 혁명적인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바라바는 폭력을 통해서 정치적인 변화를 끌어내려고 했다면, 예수는 철저한 비폭력을 통해서 영적인 변화를 끌어내려고 했습니다. 폭력의 문제는 앞에서 한번 언급했으니 여기서는 그만 둡시다. 정치적 변화와 영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조금 더 진전된 논의가 필요합니다.
정치적인 변화는 구체적입니다. 민중이 살아가는 일상 자체를 인간다운 삶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힘입니다. 민중이 주체로 서는 민주주의와 경제정의가 정치적인 변화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이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돈을 벌고 집을 장만하고, 자식을 교육시키는 모든 과정이 정치적인 영역입니다. 이것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건 출가해서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에 반해서 영적인 변화는 관념적입니다. 정치적인 상황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 차원을 말합니다. 자칫 이런 영적인 차원이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현실적인 삶을 완전히 부정하고 초월적인 삶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적인 삶과 현실적인 삶을 적절하게 종합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영적인 변화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건 결코 유보될 수 없습니다.
목사님, 그렇군요.
예수님과 바라바는 '혁명'이라는 목적은 같았지만, 그 의미는 천양지차(天壤之差)였군요.
바라바가 가장 인간답게 살아 보려는 욕망(선의였겠지요)을 분출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오히려 그 욕망의 분출에 찬물을 끼얹음으로써 우리들을 제 정신 차리게 한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이 '욕망(혹은 갈망)은 그 어떤 변명에도 선하다고는 할 수 없어 보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이런 욕망 너머에서 이미 '가장 인간답게 살아 가는 법'을 제시해 주고 계시니까요.
저는 그게 십자가의 비밀, 혹은 부활의 소망이라고 생각되어지네요.
목사님, 요새 제가 묵상의 주제를 '동상이몽'으로 잡고 씨름하고 있어요.^^
예수님vs제사장 그리고 바라바와 군중들..
예수님과 그들이 꿈꾸던 세상이 어찌 이리도 다른지요.
그러므로,
"영적인 변화에 모든 것을 걸어야 된다"는 말씀은 우리가 이 두 세계에서 갈등없이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걸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a)
이 말씀이 우리에게 참 살길을 제시해 주시는 유일한 말씀인것처럼요.
아래 새하늘님 댓글을 읽어 보다가 라라가 거명되서 깜딱 놀랐습니다^^
그래서 제 글을 다시 찬찬히 읽어 보는 중에,
"십자가의 비밀,혹은 부활의 소망"이라고 한 말이 저도 좀 막연하게 생각되어서,
토를 달아 봅니다.
그것은 정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생명지향적인 삶, 은총지향적인 삶"이예요.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더 굴뚝 같아집니다.
"삶속에 영적인 투쟁"이야말로 이런 삶이 아닐런지요.
그러나 투쟁을 위한 투쟁은 지양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으로 남겨진 상처는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폐해를 안겨 줄 뿐이니까요.
그리고 이것은 어떤 행위에 촛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목적이 분명하면, 이런 삶은 오히려 "자유"그 자체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갑자기 한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네요.
몇 년전에 도룡뇽 살리자고 단식투쟁했던 여 스님의
사건을 놓고 제 조카랑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넘은 서슴없이 "국비를 낭비한 철 없는 분"이라 카데요.
그 스님의 생명사상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저는 참 허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예수님이 말한 "생명지향적인 삶"이 무엇인지,
밤이 새도록 얘기해 주고 싶었답니다.
그래야, 이 험한 세상을 '자기소신'껏 살아 갈수 있을 것 같아서지요.
그렇네요. "생명지향적인"주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렇지만 그것은 어떤 이념으로부터든 "탈출"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들어요.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생각이 드네요.
라라님의 댓글에서 더 쉽게 접근을 해봅니다.
삶의 투쟁과 영적의 투쟁에서 어느 한것도 놓칠수 없는 것들 입니다.
양자 택일이라고 하면 현실의 입장에서 뭐라고 해야 할까요?
단어와의 조합으로 '삶속에 영적인 투쟁'라고 써 봅니다.
바라바가 주는 정치적 투쟁은 오히려 실질적 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외치는 것이 공허하게 들릴니다.
민중이 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적인 해방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민중들에 와닿습니다.
예수님이 추구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쉽게 와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기적을 행하시지만 무기력하게 권력자들 앞에 쓰러지십니다.
무기력한 예수님 앞에 민중들을 실망하고 외면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진정한 메시아가 아닙니다.
좀더 세상을 넓게 보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에서 아직도 자신이 없습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바라바를 원하지 않나 물어 봅니다.
그것이 제가 갖는 현실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한계인가 봅니다.
그래서 영성 공부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목사님, 마지막 단락의 내용이 요즘 저의 뜨거운 감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제 삶에 임하는 것의 식상한 표현을 좀 개선하고자
정확히 오늘 아침에 머리를 감다가 떠오른 아이디어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약국 하기' 라는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이 생각이 어느 만큼 길게 갈 지는 모르지만
제 머리 옆에서 전구=다마=비르네 가 번쩍거리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루 별다르지 않게 지난 듯 하군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