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22일
자색 옷(6)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15:20)
십자가 사건에서 고통이 핵심이 아니라는 어제 묵상의 마지막 언급을 보충해서 설명해야겠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에게 당한 가혹한 폭행 장면을 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십자가 처형 장면도 육체적인 고통과 직결해서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제 잠시 말씀드렸듯이 마가복음 기자는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했다고 말할 뿐이지 채찍질에 대해서는 직접 거론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납덩이가 가죽 끈 끝에 달린 채찍으로 맞으셨을까요? 그럴 개연성은 높습니다. 로마의 십자가 처형 제도는 죄수를 십자가에 매달기 전에 채찍질을 합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은 그 사실을 왜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을까요? 대신 우스꽝스러운 조롱 장면만 전할까요?
복음서기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감정적으로, 심리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목마르다는 말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수난과 십자가 처형의 과정에서 거의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처형에서 아무런 육체적인 고통이 없었다는 게 아닙니다. 그걸 무시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십자가 사건의 핵심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본질이 아닌 것을 본질로 호도하면 그 동기가 아무리 순수해도 신앙이 훼손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육체적인 고통으로 접근합니다. 얼마나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웠을까, 하고 청중들의 감정을 자극합니다. 심지어는 성찬식 때도 바로 그런 육체적인 고통을 부각시킵니다. 그런 고통으로만 말한다면 예수님보다 더 크게 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수난의 본질은 다른 데 있습니다.
어제 <설교강좌>에서 민영진 목사님께서 소개하신 김춘수시인의"못"중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인용되어 있었는데,
시인이 느끼시기에도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고통이 아주 컸던 거 같습니다.
"시편의 남은 귀절은 너희가 잇고.. 맨발로 가라, 찔리며 가라."
시인은 우릴 보고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라고 하시는데..
제가 의구심이 나는 것은 예수님의 고통의 무게를 우리가 얼마나 감당할수 있을까입니다.
시인은 어떤 의미로 인용한 것인지 모르지만(은유적)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의미가 온 피조물의 구원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고통과 이 "엘리 엘리 사마 사박다니"를 결코 연결시킬 수 없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제게 이제는 이 귀절이 온 피조물의 종말론적인 구원, 생명과 연결되어 있어 보여서요.
성찬식도 그렇구요. 그러니 우리가 흘려야 될 눈물은 그 구원의 기쁜 눈물 아니겠는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