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12일
바라바 이야기(13)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15:15)
드디어 올 것이 왔습니다. 빌라도는 민중에게서 점수를 얻기 위해서 결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바라바를 풀어 주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석방이 불가능해졌다는 뜻입니다. 전형적인 포퓰리즘(대중추수주의) 정책입니다.
포퓰리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정치 지도자가 독단이 아니라 민중의 생각을 따른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민중에 영합하느라 바른 정치를 펴지 못할 때가 많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민중의 판단이 늘 옳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전제됩니다. 길게 보면 민중의 판단이 옳을지 모르지만 일시적으로는 틀릴 때도 많습니다. 이런 예를 우리는 국내외 현대 역사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는 민중들의 소리는, 그것이 자신들의 실질적인 이익에 부합한 것이었거나 아니면 대제사장들의 선동에 의한 것이었거나 상관없이, 진리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일종의 광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개인보다는 집단에서 이런 악한 힘에 더 쉽게 사로잡힙니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도덕적인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에서 이런 현상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사람도 사회에서는 쉽게 부도덕성에 노출된다고 말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키는 일에 연루된 집단은 셋입니다. 하나는 민중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함이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 앞에서 기분이 좋았을 겁니다.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산헤드린입니다. 이들은 쾌재를 불렀겠지요. 하나님을 모독한 예수를 쉽게 처리했으니까요. 셋째는 빌라도입니다. 그도 역시 나름으로 이익을 본 것입니다. 민중의 이름으로 사회 소요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악은 이렇게 협조를 잘 합니다.
대중이 항상 깨어있는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각성되어 있는 시간은 사회의 모순이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시점인것 같습니다.
민중은 자신들의 문제를 가지고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할 때의 인간집단을 가리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즉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고 각성하여 역사발전의 힘으로 나설 때를 의미하는 것이라 봅니다.
프랑스혁명에서의 부르죠아와 농노들, 3.1독립만세를 외치던 우리 민족들, 5.18광주항쟁과 6월항쟁에 거리로 나선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조직화했던 세력들이 바로 민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 대학생 놈들이 포시러워서 데모나 한다고 지탄하던 사람들, 수 많은 비리의혹에도 MB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리발표시 그를 욕하던 사람들 우리는 이들을 누구라고 불러야 할까요?
이들이 가진 것이 없고 지배당하고 있다고 하여 민중이라고 칭할 수 있을 까요?
대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의 논리에 지배당하고 있고 자신들의 처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이해관계에 의해 선동당하는 사람들...
그러나 답답하고 환장할 노릇이지만 역사는 이들이 깨어남에 의해서만 앞으로 전진합니다. 항상 깨어나는 것도 아니고 가끔씩 필요할 때(?)만 깨어나는 민중들의 분노와 힘만이 역사는 발전합니다.
여기에 진보적 지식인이 하는 역할이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그 인간이 그 인간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사람에게는 사고라는 영역이 존재하기에 그리고 사고의 전환은 전혀 다른 인간을 만들어 내기에 동일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