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 말하지만, 기도의 문제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유대교는 신학이 없다고 주장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한 하나님이라는 말로 그 사람이 무엇을 뜻하든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현대에 흔히 있었다. 이제 하나님이라는 말로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하나님은 무엇인가? 알맹이가 없는 일반론인가? 하나의 알리바이인가? 우리가 발전시킨 일종의 관념인가? 내가 평생 씨름해 왔던 문제는 그분께 기도할 때 내가 정말로 하나님이라는 말로 무엇을 뜻하는지, 심지어 내가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를 아는 일에 성공했는지 하는 문제다. 나는 여전히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을 섬기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어느 철학자가 발전시킨 어떤 용어를 선택해서, 심지어 그 철학 자체가 철학사에서 이미 죽은 지 오래 되었다 해도, 그 철학 용어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176쪽)
헤셸은 관념적인 것을 설명하면서도 아주 명백한 언어와 개념을 사용한다. 대충 지나가는 법이 없다. 어떤 것을 확실하게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 인식이 잘못된 것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나님 경험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확실하게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거다. 기도 행위도 결국 하나님이 관건이라는 뜻이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과 경험 안에 다 들어오지 않으나, 오히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계속 질문해야 한다. 그런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과 점점 멀어질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섬기게 되고 말 것이다. 오늘날 기도생활을 하는 기독교인들의 영혼에 그려진 하나님 상은 헤셸이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미 용도 폐기된 어떤 사조나 이데올로기일지 모른다. 어린아이처럼 투정하듯이 하나님께 달라고 매달리니, 그 하나님이 누군지 알만하지 않은가. 하나님을 향한 관심이 아니라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둔 채 기도하고 있으니,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뻔하지 않은가.
너무 바쁜 일상이지만 헤셸의 매일 묵상은 안 읽을 수가 없게 만드네요.
감사드리며..
나는 여전히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을 섬기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가슴에 쿵하는 소리가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