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실정을 감안하면 헌금의 신학적 근거만으로 신자들이 헌금 행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게 어려운 일이다. 한국교회 신자들의 헌금 행위는 강제에 의해서만 작동된다. 겉으로는 거룩한 포즈를 취하지만 속으로는 노예 심리다. 헌금이 강제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간단히 언급되었지만, 여기서 다시 두 가지로 다시 정리하겠다.
하나는 영성의 차원이다. (십일조)헌금을 하면 수십 배의 보상을 받으며, 거꾸로 헌금을 하지 않으면 물질이나 건강의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신자들의 영혼을 채우고 있다. 일종의 기복주의 신앙이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막연하게나마 그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헌금을 한다. 다른 하나는 구조적인 차원이다. 한국교회에서 십일조 헌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장로가 될 수 없다. 장로만이 아니라 권사나 집사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받들면서도 헌금 문제에서만은 확인과 검증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사실 이 두 가지 강제력은 헌금 제도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신앙을 총체적으로 지배한다. 기복주의는 기본적으로 돈에 대한 욕망이고 장로제도는 명예(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교회는 이걸 부추긴다. 교회 지도자들을 이걸 당근과 채찍으로 삼아 신자들을 닦달하며, 신자들은 이것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돈과 권력이라는 귀신이 지배한다. 세상은 어쩔 수 없다. 아니 당연하다. 그것이 삶의 모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창조와 종말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세계관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은 결국 신앙이 없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이야기를 잠간 하자. 러시아 정교회에 관한 이야기다. 예수가 재림하여 초림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다가 교회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갇힌다. 어느 날 밤 러시아 정교회 최고위 주교가 감옥의 예수를 찾아와서 충고한다. ‘이 세상은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잘 이끌어가고 있으니 당신은 여기서 더 이상 시끄럽게 하지 말고 당신 나라인 하늘로 올라가시오.’ 예수가 없어야 오히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러시아 정교회를 고발하는 이 이야기는 오늘 헌금 행위에 건강하지 못한 각종 욕망이 뒤엉켜 있는 대한민국교회에 그대로 적용된다.
목사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한국교회를 끌고 가는 쌍두마차가 기복주의와 율법주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주변에는 오히려 율법주의의 올무에 걸려 헌금생활을 강요받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면 열배로 되받아가신다고 하셨다네요... ㅡ.ㅡ
그런데 아무리 쉽게 설명을 해드려도 불암감을 지울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아마도 오랜 세월동안 잠재의식속에 둥지를 튼 율법주의가 쉽게 자리를 내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