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목표
모든 강의에 목표가 있는 것처럼 설교에도 목표가 있다. 목표에 대한 생각도 다들 다를 것이다. 회중들을 회심시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설교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회중들을 더 성숙한 기독교인이 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설교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성령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라든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하여 복 받게 하는 것이라고도 답할 수 있다. 교회 일에 충성하는 신자가 되게 하는 것이라거나, 목사의 말을 잘 듣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나는 회중들로 하여금 질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설교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성경과 신학을 통해서 내가 배운 것은 질문하는 것이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과 신학자들도 모두 질문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성경 자체가 사실은 답이라기보다는 질문이다. 겉으로는 답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 답은 질문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답의 형식을 띤 질문이다. 두 군데만 예를 들겠다.
창 1:1절은 다음과 같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사람들은 이 문장, 또는 이 명제를 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답은 답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수많은 질문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 수많은 질문을 거쳐서 나온 대답이자 또 하나의 질문이기 때문에 이 명제를 이해하려면 일단 그 질문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태초’라고 했다. 이 태초가 무엇일까? 이 태초 문제를 놓고 수많은 물리학자와 철학자들이 질문하고 대답했다. 현대 물리학은 태초를 빅뱅(대폭발)의 때로 본다. 성서기자는 대략 140억 년 전이라는 그 순간을 생각하고 태초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닐 것이다. 시작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런 히브리 사람들의 생각이 세계를 영원회귀로 본 헬라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점이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 태초라는 말에 가까이 갈 수 없으며, 그런 상태에서는 설교가 불가능하다. 설교하더라도 공허하다.
천지는 고대 사람들이 생각하던 세상이다. 그들에게 하늘은 전혀 미지의 세계였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늘 위도 물의 세계다. 하나님께서 첫째 날 빛을 만드시고, 그 다음날은 궁창을 만드셨다. 궁창을 만드셨다는 말은 하늘의 물과 아래의 물을 나누었다는 뜻이다. 성서시대 사람들은 세상이 온통 물로 뒤덮여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럴만하다.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는 물이 가득하며, 하늘에서는 시시때때로 비가 쏟아진다. 천지가 온통 물이다. 그들의 물리학적 정보가 우리에 비해서 현저하게 부족하지만 하늘과 땅과 바다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열망만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그 열망은 질문이다. 나는 창세기만이 아니라 성경의 그 어떤 본문을 대하든지 궁극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질문이 눈에 보인다. 내 설교를 듣는 분들도 그런 질문의 세계로 들어가기를 바란다.
신학자들은 과학자들이네요.
제가 아는 과학 또한 제대로 된 질문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배웠거든요.
그리고 제대로 질문 속에 절반의 답이 있다고 지도교수님께도 배웠고 저도 이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저에게 다가운 새로운 문제는 똑바른 질문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이게 과연 제대로 된 질문인가는 물론 설령 질문이 생겼다고 한들
이미 이전의 과학자들이 그와 같은 질문을 하였을 경우, 독창성이 결여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이건 신학과 조금 다를 수도 있겠네요). 설령 같은 질문이라고 해도 접근하는 각도를 달리하면 질문이 달라질수도 있는데.
그게 참 힘듭니다.
지금은 궁금한 게 무엇인지 조차 멍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것 또한 제대로된 질문이 아니라 어떤 결과를 내야한다는 강박관념(전제) 때문에
인위적으로 짜낸 질문 때문이라는 생각도 가집니다. 세상에 길들여지는 것일까요?
아! 또 삼천포로 가는 것 같습니다. 늘 이런것 같습니다. 출발은 분명 어떤 방향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다보면 자꾸 곁가지가 생기네요..
그리곤 돌아오는 질문은
유행가 가사처럼.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