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혼
조병화는 ‘고독이라는 이름의 시인- 선생님께’라는 김대규의 편지를 받았다. 젊은 나이에 객혈까지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빴던 김대규는 “나의 이름 석 자가 내 시의 주석이 되기에 24세는 아직도 뜨거운 것인가!”라는 문장으로 편지를 맺었다. 그 편지에 큰 감동을 받은 조병화는 1964년 3월2일자 회신에서 자신의 시집 <밤의 이야기>에 나오는 연시 몇 단락을 비교적 길게 인용했다.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된다.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지하 5미이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
그리고 다시 이 시집의 서문에 나오는 한 문장을 인용했다.
시는 고독한 혼과 혼 사이의 대화다. 이 시집 <밤의 이야기>는 모두가 나의 이런 밤의 허허한 추방이다(161쪽).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시인은 고독한 영혼의 소유자들이다. 조병화는 그 고독을 죽음의 길로 이해했다. 지하 5미터가 어떻게 나온 계산인지는 모르겠다. 무덤은 기껏해야 봉분까지 계산에 넣는다고 해도 3미터 이상은 되지 못한다. 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의미로 저 숫자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삶의 길이는 어머니가 물려준 노자와 비례한다. 사람에 따라서 노자가 다르듯이 모든 사람의 삶은 길이가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두가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이 직행 길에서 아무도 동행해줄 사람은 없다. 혼자다. 사람들은 이걸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 사실을 외면하면서 자꾸 한눈을 판다. 그래봤자 누가 피할 수 있겠는가.
죽음으로 직행한다는 사실을 뚫어보는 사람의 혼은 고독하다. 여기서 고독하다는 말은 외롭다거나 쓸쓸하다는 게 아니라 혼자 죽을 수밖에 없는 실존을 직시한다는 뜻이다. 시인은 그걸 몸으로 체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조병화에게 시는 고독한 혼과 혼 사이의 대화다. 죽음으로 직행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다. 또는 인간을 고독한 혼이 되게 하는 죽음과의 대화다. 목사는 시인보다 이 사실을 먼저, 그리고 더 깊이 체득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는지.
여기서 노자 는 무슨 뜻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