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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적 대파국 이후

 

묵시적 대파국은 기존의 모든 질서가 완전히 해체되는 걸 가리킨다. 모양이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 자체가 뒤바뀌는 것이다. 우주와 지구, 국가와 인간, 모든 역사와 제도 등이 다 허물어진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우주의 마지막 이후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른다. 우주 물리학자들도 확정적으로 말할 게 별로 없을 것이다. 신학이 말하는 종말 이후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몇 가지는 말할 수 있지만 그건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나의 대파국 이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만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어제 묵상에서 짚었듯이 어느 순간이 오면 나는 묵시적 대파국을 맞는다. 더 이상 지금 인간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상실된다. 이것을 무()가 된다고 말해도 된다. 그 상태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을 무조건 없어지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무와 없어지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의 차이를 잘 모른다.

바울은 죽음을 잠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한다. 죽는다고 해서 우리의 생명이 완전히 없어지는 게 아니라 잠자듯이 잠시 멈추는 것이다. 내가 흙이 되는 것도 잠자는 것이다. 이게 사실은 안식이다. 나를 완성해보려고 공연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잠자는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되는지는 모른다. 세계가 끝나는 종말까지 지속되지 않겠는가.

신학적으로 말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말하겠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신학적인 쪽으로 다시 흘러갔다. 먼 미래의 궁극적인 문제이니 피조물인 인간이 그걸 어떻게 경험한 것처럼 사실적으로, 또는 생물학적으로나 물리학적으로 말할 수 있겠나. 신학적으로, 즉 신앙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한 걸음만 더 나가서 말하자. 내가 죽고 잠에 빠져들었다가 우주의 종말 때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실제로 믿는가? 그것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문제는 그 부활생명의 내용에 대한 것이다. 나는 부활생명을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삶이 변형되거나 연장되는 어떤 것쯤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창조와 종말의 주이신 하나님의 전적으로 새로운 통치에 포함될 것이라는 사실만 분명하게 내 입으로 말할 수 있다. , , 구름이 나의 미래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에 속한 것이라면 그것을 기꺼이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모두 거룩하고 선하기에 나의 미래도 거룩하고 선할 것이다. 특별히 예수를 통해서. 나는 그렇게 믿는다.


쌀알

2015.11.22 04:47:42

목사님의 글을 볼때면 굉장히 급진적이라는 생각이 들때가 종종있습니다. 진보라고 하기도, 자유주의라고 하기도 어렵지만 (특히 보수적) 기독교인이라면 지니고 있을 근본적인 믿음의 토대를 흔들어버릴 만한 내용들을 보게됩니다.
이 묵상에서 결론으로 도출된 내용을 보면 (저는 불교를 잘 모르지만 아마도) 사람들은 불교의 윤회사상과 매우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게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요즘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가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날 경우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생각이 기독교 신앙과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목사님께서는 이것조차 하나님의 통치의 방식으로 보신다는 점에서 잠시 당황을 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예수를 통해서" 그럴 수 있다니 말이죠..ㅎㅎ
목사님의 신앙은 (좋은 의미에서의) 복음주의적이며 근본적이면서도 (그로부터 매우 비약적인) 진보적 신학과 사고를 가지고 계시는 거 같은데 이 양자를 어떻게 하나의 지점으로 도달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가 항상 궁금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것은 모든 이성을 초월할 수 있는, 흔들릴 수 없는 신앙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갑자기 관찰자적 입장에서 판단을 한 것 같아 매우 주제 넘는 짓을 한 것 같네요ㅠ
여튼 저도 이 모든 고민을 삼킬만한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통치에 붙들려 살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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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2015.11.22 21:41:39

쌀알 님이 저의 신앙과 신학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묘사해 주셨군요. 

관찰자적 입장은 바람직한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또

신앙적으로 성숙해지는 거겠지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

그것이 우리를 이 땅에서

이렇게 지탱할 수 있게 하는 근원이겠지요.

 

쌀알

2015.11.23 13:38:21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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