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8일
허공으로의 투신
어제 인용한 문장에 절벽 아래의 허공으로 자기 몸을 던지는 어린 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모습은 실제로 다큐멘터리 동물의 세계에 자주 나온다. 우리가 볼 때 무모할 정도의 행동을 새들은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은 평범한 새들보다 한 차원 높은 비상의 능력을 소유한 새가 된다. 나는 이런 새들처럼 하나님의 무한한 품에 자신의 운명을 던질 수 있는 순간이 온다고 말했다. 그게 기독교 신앙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죽음 이후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목사가 이렇게 말해서 의아하게 생각할 분들도 있을 거다. 죽음 이후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무한한 복락을 누린다는 대답을 듣고 싶을 것이다. 이 말 자체는 옳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세계는 천 길 낭떠러지 절벽 위의 새집에 앉아 날갯짓을 연습하는 어린 새가 절벽 아래의 허공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 영적인 허공이다.
우리가 지금 사는 방식은 이것과는 전혀 달라서 그 허공을 직면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이데거 버전으로 ‘섬뜩한 느낌으로서의 두려움’을, (오늘 대구 목회자 인문학교에서 열린 라캉 특강을 옳게 이해했다면) 라캉 버전으로는 언어 사이의 구멍을 누가 감히 마주하겠는가. 이런 두려움은 결국 죄와 죽음의 문제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완성하려는 욕망인 죄에 묶여 있는 한 자기가 해체되는 그 허공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런 죄와 그 결과인 죽음에서 해방된 사람은 그 허공에 투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에 자신의 미래를 던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