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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는 시인의 말은 자칫 교만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게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 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자신의 의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말은 자신의 목회적인 업적마저 부정하는 발언이다. 자신의 기도와 설교와 봉사 등등도 자신의 의를 보장하지 못한다. 그런 것으로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과 계속해서 견줘야 한다. 누가 더 많이 기도했고, 누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는지를 말이다. 이 시인은 그런 비교와 경쟁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의를 얻은 사람이라서 ‘나와 다툴 자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의 목사직도 오직 여기서만 정당성이 성립되고 유지된다.
성실한 목사들 중에서도 자신의 목회 업적에서 정당성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성립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만큼 더 큰 오해도 없다. 목사는 죽을 때까지, 목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죽을 때까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천착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근거와 이유를 찾아야 한다.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한 아무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성한 사람은 없다. 이런 말은 성서 곳곳에 나오기에 내가 강조할수록 점점 더 진부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 다른 이들에게 말한다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말하는 중이니 나에게 중요한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참된 깨우침은 반복 훈련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테니스를 하면서도 반복해서 ‘볼을 끝까지 봐야지.’라거나 ‘힘을 빼야지.’라는 생각을, 또 ‘풀스윙을 해야지’라는 생각을 반복해야하는 것과 같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목사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 다른 길이 없다.